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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인들이 먹물이라는 걸 애써 드러내기 위해 쓰는 말 중에 '게이트키퍼'라는 말이 있습니다.

간단히 이야기하면 '편집자'라는 말이지요. 물론 이들은 게이트키퍼라는 개념이 좀더 복합적인 개념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만, 근본적으로는 기자들이 써온 기사의 경중을 판단해서 지면에 배치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기자들이 아무리 기사를 열심히 써 온들, 게이트키퍼의 문을 통과하지 못하면 신문 한 구석에도 실리지 못하는 경우가 흔합니다. 반대로 정말 아무 것도 아닌 기사를 써 와도 그게 게이트키퍼-편집자-데스크(모두 비슷한 말이지요) 눈에 확 들어오면 1면에 대문짝만한 활자로 박히는 영광을 얻기도 합니다.

오늘(8월27일자) <동아일보> 1면 기사가 실리기까지는 아마도 게이트키퍼의 역할이 지대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 기사를 쓴 박용 기자조차 이 기사가 1면 머릿기사가 되리라고는 아마 생각하지 못했을 테니까요.

그렇게 판단하는 이유는 이 기사는 심층취재라기보다 경제면에 간단히 실릴 법한 가벼운 기사이기 때문입니다. 내용은 간단합니다. 월마트 관계자가 '2004년부터 한국에 투자하기로 한 1조 6천억원에서 2조 4천억원의 투자계획을 재조정하기로 하고 본사와 협의중'이라고 발표한 것이 전부입니다. 그 이유로 북핵, 노사관계, 경기침체 등을 들었다는 정도가 덧붙여졌군요.

동아일보 8월 27일자 1면 머릿기사
월마트, 한국투자 재검토…경기침체-노사갈등-北核 고려

이 정도로는 '타 신문이었다면' 경제면 톱기사도 어렵습니다. 데스크에서는 아마 다른 사례를 더 취재해서 보강하라거나, 월마트의 경영상태에 대해 조사를 해 보라거나, 아니면 몇 명이 취재해 온 비슷한 사례의 기사를 종합해서 심층기획 보도를 했을 겁니다.

그런 요구를 하지 않는다면 괜찮은 데스크라고 할 수 없지요. 이 기사는 문제가 많습니다. 기사의 생명인 취재가 없는 단순한 '받아적기' 수준에 불과하니까요. 이 기사의 문제를 짚어봅시다.

우선 월마트는 노조의 영향력이 강한 제조업 기업이 아니라서 '노조가 한국경제를 망친다'는 주장의 근거로는 좀 부적합하죠. 대부분의 매장직원은 노조원이 아닌 일용직, 아르바이트입니다.(기사에서조차 한국투자 재검토 이유는 경기침체나 북핵 고려가 더 크게 들어 있습니다.)

두번째, 유통 쪽에 조금만 관심이 있는 기자라면 그나마 들고 있는 경기침체나 북핵 고려, 노사관계조차 월마트가 추가투자를 안하는 이유로 들기는 무척 궁색하다는 것을 알 겁니다. 월마트가 추가투자를 안하는 이유는 한 마디로 '한국 적응에 실패한- 즉 장사를 못한' 탓이라고 판단되기 때문입니다.

월마트는 현재 국내 대형할인점 산업에서 업계 5위에 그치고 있습니다. 대형업체 중에서는 사실상 '꼴찌'입니다. 변명의 여지도 없습니다. 자금력이야 세계 제 1의 업체이니 말할 것도 없고(포천지 선정 세계 500대 기업에서 2003년 1위입니다) 경영 노하우는 세계 할인매장 업체들의 벤치마킹 대상입니다. 부족할 게 없지요.

토종기업의 텃세 내지는 한국인의 애국심에 밀렸다? 외국계 할인점간 경쟁에서도 까르푸는 물론, 후발주자인 테스코 홈플러스와도 격차가 큽니다. 이유는 매장에 가보시면 압니다. 까르푸나 홈플러스가 한국 실정에 맞게 매장을 배치하고 상품을 갖추어놓은 반면, 월마트는 미국과 동일한 상품 품목, 매장 배열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기자가 월마트에 한 번이라도 찾아 보았다면 월마트의 문제를 파악할 수 있었을 겁니다. 할인점 매출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피복류에서 자사상품(PB라고 하죠) 외의 상품이 부족하고, 식품에서도 한국인이 잘 찾지 않는 외국 기호품 우선으로 매장을 배열하고 있는 데다, 미국식으로 식료품보다 잡화류를 입구쪽에 배치하는 등 한국에 정착하려는 노력이 부족했습니다. 북핵이나 경기침체가 전부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북핵이 문제라면 현재 무서운 성장세로 1위를 넘보는 홈플러스는 왜 한국에 투자를 합니까?

노조가 문제? 까르푸는 노사관계로 많은 내홍을 겪었지만 그래도 한국투자 포기한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한 적이 없습니다.

경기침체? 그런데 이마트는 올해 12개의 신규점포를 연다고 하니 모를 일입니다.

아마도 월마트의 한국 경영진이 투자 재검토를 발표하면서 이렇듯 내부적인 '고민'을 인정하기란 쉽지 않을 겁니다. 따라서 북핵이나 노사문제 같은 외부적 변수를 더 크게 문제삼았을 수는 있겠죠. 하지만 그걸 덥석 물어서 기사로 내어놓은 기자의 양식이 의심스럽습니다.

유통업 전문가도 아닌 제가 봐도 명확해 보이는, 조금만 취재를 했더라면 드러날 그 이면의 사실을 박 기자는 몰랐거나 아니면 애써 외면했다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비난받아야 할 것은 <동아>의 게이트키퍼들입니다. 언론에 조금만 몸담은 사람이라면 이 기사가 기사의 중요성이나, 취재의 깊이에서 1면 톱이 될 수 없다는 건 상식입니다.

경제신문이라도 이 정도 기사를 단독으로 1면 톱으로 뽑지는 않습니다. 적어도 4-5개 기업을 취재해서 심층취재 기사를 만들지, 한 기업의 사례를 덜렁 1면 톱으로 올리다니요.

그 해답은 최근 계속 고조되고 있는 노사 문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는 결국 협박입니다. 노조를 겨냥해 '니네 때문에 우리나라가 망한다'고 협박하는 거죠. 혹은 세뇌입니다. 국민들에게 '노조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고 주문을 거는 거죠. 물론 이 정도 '협박-세뇌'는 경제신문들을 필두로, 조선일보나 중앙일보도 연초부터 꾸준히 해 오고 있습니다.

문제는 동아일보는 경제신문이나 조선처럼 세련된 프로파간다를 못했다는 거지요. 이를 단지 수준 차이로 봐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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