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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재판소 재판정 모습
헌법재판소 재판정 모습 ⓒ 오마이뉴스 남소연
"변호사가 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런데 여성들은 이런 시간을 자녀를 키우고 교육하는 데 우선적으로 써야 하므로, 변호사란 여성들에겐 부적합한 직업이다."

1876년 미국 미네소타 주 법원은 이렇게 이유를 대고 여성에 대한 변호사 자격 수여를 거부했다. 1925년에는 컬럼비아 로스쿨 교수들이 여학생 입학을 반대했다. 여학생들이 자리를 차지하면, 그 수만큼의 유능한 남학생들이 하버드 로스쿨로 가버릴 것이라고 걱정했기 때문이다.

지금 그 학교의 2층 계단 복도에는 미국의 두번째 여성 연방 대법원 판사 루스 긴스버그의 초상이 걸려 있다. 긴스버그가 컬럼비아 로스쿨을 졸업했을 때, 그녀를 고용하려는 법률 회사는 하나도 없었다.

미국시민권연맹이란 시민단체에 들어간 긴스버그는 여성의 지위 향상과 권리 실현을 위해 정열을 쏟았다. 그리고 클린턴이 긴스버그를 연방 대법원 판사로 임명하자, 수많은 사람들은 그녀가 미국 사회에서 성평등을 실현하는 진정한 변화를 가져올 것을 믿었다.

이제 우리도 그와 유사한 희망을 가져볼 수 있을 것 같다. 오늘부터 최초의 여성 헌법재판소 재판관의 임기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취임식은 없었지만 어제로 전임 한대현 재판관의 임기가 종료되고, 오늘부터 신임 전효숙 재판관이 실제로 업무를 시작했다.

전 재판관은 시민추천위원회에 의해 대법관 또는 헌법재판관 후보로 추천되기도 했지만, 추천의 이유나 기대를 거는 까닭이 반드시 '최초의 여성'이란 형식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추천이나 기대가 무망한 것이 아니라는 작은 증거로, 이화여대 신인령 총장으로부터 들은 그녀의 이야기를 해 본다.

전효숙 재판관에게는 후학들의 초청으로 연단에 서서 강연할 기회가 몇 번 있었다. 그때마다 전 재판관은 정의의 실현이나 제도의 개혁 등 거창한 담론의 대상을 화제로 삼지 않았다. 그렇다고 자신의 입신과 경력을 위인 전기처럼 포장하여 젊은 사람들을 자극하지도 않았다.

전 재판관이 즐겨 사용한 연제의 하나는 여성의 지위였다고 한다. 남자들뿐인 사법시험 1차 시험장 화장실에서 겪은 이야기를 시작으로, 자기가 경험한 사실을 담담하게 펼쳐나가는 가운데 저절로 오늘날 여성의 위치와 문제를 확인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여성이 여성의 문제를 다루면서 그 정도 소박한 감동을 주는 경우는 드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다른 곳에 있었다.

전 재판관은 결코 성공한 여성의 입장에서 그렇지 못한 여성의 현실을 지적하는 태도를 보여준 적이 없다고 한다. 과거나 지금이나 여전히 남성 위주의 세계 속에서, 항상 해결해야 할 어떤 과제를 안고 있는 여성으로서 자신을 드러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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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효숙 신임 헌법재판관
전효숙 신임 헌법재판관
전 재판관의 사람됨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일화 하나를 소개하면 이렇다. 전 재판관은 이화여대 법과대학으로는 최초의 사법 시험 합격자다. 우리 역사를 통틀어도 역대 네 번째의 여성 법조인이다.

게다가 관료 법관으로서는 현실적으로 최고의 직급이랄 수 있는 고등법원 부장판사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그리고 동창으로서 물심 양면으로 모교에 공헌도 했다고 한다. 그러니 그 위치로 보나 기여도를 따지나, 이화여대 법대에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이었다.

어느 해 전 재판관의 딸이 이화여대 법대에 입학했다. 그런데 학교에선 아무도 몰랐다. 그때만 몰랐던 게 아니라, 몇 학기가 지나도록 몰랐다. 오히려 졸업이 더 가까워졌을 무렵 누군가 그 사실을 알려 확인이 됐다.

학장도 잘 아는 사이였을 뿐더러, 교수 중에는 법대 동기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을 꾹 다물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나 같았으면, 발표 전에 미리 합격 여부부터 알아본답시고 전화를 해댔을 터인데.

우리는 흔히 정체된 상황을 돌파하고 싶어 안달일 때 발상을 전환하라는 말을 곧잘 쓴다. 하지만 동일한 인간이 굳은 머리로 다른 생각을 한다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그렇지 않을 경우엔 시각을 달리하는 방법도 있다. 시선의 변화란, 결코 대상이 달라지는 것은 아닌데, 보는 측면이 다른 것이다. 즉 내가 평소 못 보는 곳을 발견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도 마찬가지로 어렵다.

따라서 새로운 시선을 원할 경우엔 다른 사고와 경험하지 못한 안광(眼光)을 가진 사람을 내세우면 된다. 그런 면에서 새 헌법재판관에 거는 기대가 있다. 우리가 볼 수 없는 면을 보고 깨우쳐 줄 것이다. 남성의 세계에 익숙해진 눈길이 아닌, 여성 고유의 문제를 놓치지 않고 있는 시선으로 헌법과 권리를 견주어 볼 것이기 때문이다.

작은 일화 하나로 가늠해 볼 수 있는 그녀의 인품으로 미루어, 대법관이든 헌법재판관이든 후보로 추천한 시민들의 감시의 눈을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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