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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윤영
“사람이 춤추고 노래하는 인생처럼 즐거운 인생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남들이 보기에 화려해 보이는 그 이면에는 엄청난 고통이 따르기도 했지요. 하지만 내가 원하고 좋아서 하는 일이었기에 고통도, 어려움도 다 견딜 수 있었답니다.”

공자가 15세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지학 志學), 서른에 뜻이 확고하게 섰다고(이립 而立) 논어에서 말했던가. 그 역시 무용을 시작한 것은 중학교 3학년 시절이었고, 서른 즈음인 지난 84년 대전에 정착했다. 그리고 발레지도자로, 안무가로 활발한 활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대전지역에서 발레의 대중화를 위해 지난 20년간 한길을 달려온 문치빈 발레단의 문치빈(46) 단장. 대전지역에서 유일한 남자 발레인이기도 한 그는 대전지역의 무용 역사에 큰 획을 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꿈의 땅>이란 작품으로 지난 97년 대전 무용제 대상, 대구 무용제에서 대상, 안무상, 미술상을 수상했고 제6회 전국 무용제에서 지역 최초로 대통령상, 안무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특히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꿈의 땅>은 기회의 땅을 찾아 한국에 온 외국인 근로자들이 겪는 고통과 좌절, 동시에 대전이라는 척박한 문화지역에서 그가 겪는 성공과 좌절을 담아 낸 작품으로 대구, 청주, 인천, 서울 등 전국을 비롯해 필리핀, 카자흐스탄, 키르키스탄 등의 외국에서도 호평을 받았다.

“무용으로 주목받지 못하고 열악한 대전에서 대통령상과 안무상을 수상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제 무용 인생에 있어서도 가장 잊을 수 없는 기쁨이었습니다.”

국립발레단에서 활동하던 그는 우연한 기회에 대전에서 학생을 지도하다가 발레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대전에 발레 아카데미를 개원했다. 가정형편으로 인해 레슨비, 작품비, 의상비를 내지 못하는 학생들에게도 배움의 기회를 제공했다. 대전 지역의 발레 학원 원장들은 대부분 문치빈 발레 아카데미 출신일 정도다.

ⓒ 권윤영
하지만 그는 지도자보다는 예술가로서의 삶에 무게중심을 실어왔다. 창작하고 공연하는 것을 목표로 살았기에 단 한번도 창작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너무 힘든 길이기에 다시는 공연을 안해야지하고 생각을 해도 공연이 끝나면 어느새 머릿속으로 또 창작을 하고 있는 저를 발견하게 됩니다. 발레에도 퓨전을 도입해 한국적인 발레, 사회적인 이슈로 창작 발레를 할 계획입니다.”

문치빈 단장 이력

한양대학교 무용과 졸업
경희대학교 체육학과 대학원 졸업
전 국립발레 단원
현 한국미래춤학회 이사
현 한국무용협회 대전광역시 부지회장
현 공주교육대학교 강사
현 대전문화예술진흥협회 진흥위원
현 문치빈 발레단 단장, 문치빈 발레 아카데미 원장
이어 그는 과거에 비해 발레가 어느 정도 대중화됐지만 <백조의 호수>, <호두깎기인형> 같은 줄거리가 있는 클래식 발레는 관객들이 많이 찾는데 비해 창작발레는 덜 관심을 갖는다며 아쉬워했다.

어느새 불혹(不惑)의 나이를 훌쩍 넘어 하늘의 뜻을 깨달아 알게 되었다는 지천명(地天命)의 나이가 가까워지는 문 단장은 점점 나이가 들어 무용가로서 춤을 추기 어려워진다는 사실이 가장 안타깝다.

먼훗날 마음 내키는 대로 해도 법도에 넘어서지 않았다는 70세 종심(從心)에 이르러, 그가 어떤 것을 선택하고 무엇을 하며 살아가든 그는 이 시대가 나은 최고의 예술가이자 안무가임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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