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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연자에 대한 압박은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교사생활 초기에는 으레 선생님들 책상 위에는 재떨이가 있었고, 그날 담배꽁초가 수북이 쌓이면 퇴근 후 사환이 깨끗이 닦아 놓았다. 교무실 내 자리에서 담배를 물고 교재 연구도 사무도 보고, 심지어 남자 학부모인 경우는 서로 담배를 권해 태우면서 상담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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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후반, 민주화 열풍이 거세게 불자 어느 날 직원회 시간에 한 여선생님이 "교무실을 금연구역으로 만듭시다", "담배를 태우실 분은 휴게실을 이용하십시오"라는 제안을 했다. 그러자 대부분 여선생님이 "옳소"로 맞장구, 기습 통과시켜 학교에서는 급기야 휴게실을 만들고 대형 재떨이까지 마련했다.

그 이후부터 나는 쉬는 시간이면 쥐구멍 드나들 듯 휴게실을 부지런히 드나들며 담배를 태웠다. 내 온 몸과 옷에도 담배 냄새가 밴 탓인지 학생들도 우회적으로 선생님 담배 좀 줄이면 좋겠다는 말도 자주 했다.

어떤 학생은 나에게 담배 7개비만 들어가는 담배곽을 선물하면서 "선생님 하루에 7개비만 태우세요"라고 했다. 금색으로 된 담배곽을 열어보니, 아침 식사 후 오전 휴식시간 점심후 등 하루를 7등분하여 아주 시간까지 배정을 해두었다. 학생의 마음씨가 고마워서 그대로 따라 보았지만, 밥을 반밖에 못 먹은 사람 이상으로 궁짜가 들고, 니코틴 함량 부족으로 인한 정서 불안이 심해서 작심 이틀 만에 포기하고 말았다.

다른 분에게 담배 냄새 공해라도 줄여드리고자 태운 후 열심히 양치질을 하고 은단을 먹었으나, 아내나 아이들은 오히려 담배 냄새에 은단 냄새가 배합되니 더 맡을 수 없다고 충고했다.

마침내 아내는 나에게 정히 담배를 끊지 못하겠거든 되도록 여선생님들 곁은 피하라고 충고했다. 아내 말이 일리가 있어서 회의나 회식 때도 되도록 여선생님 곁에서 멀찍이 앉았다. 우리 학교는 이사장 명예 이사장 총장 학장 교장 교감 모두가 깨끔한 여자 분인데다가 처녀 분도 많았다. 꾀죄죄한 남자 냄새도 싫을 텐데 거기다가 담배 냄새까지 폴폴 풍기면 얼마나 싫을 텐가.

사범대학 교수였던 최윤애 선생님이 교장으로 오셨을 때 마침 그때 교무주임(요즘 부장) 보직을 맡고 있어서 마주 대할 때가 많았다. 처녀이신데다 치마에 주름하나 흐트러짐이 없는 청정무구 완벽한 분이라 되도록이면 피했고 멀리 떨어져 앉았다. 그런데 선생님은 나의 깊은 뜻은 모르시고 꼭 옆 자리로 불렀다. 하는 수 없이 이실직고를 해서 오해를 풀어드렸다.

흡연 때문에 입은 직간접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금연지대가 하도 많아서 건물 밖에만 나오면 담배부터 입에 물었다. 그런데 꽁초 버릴 데가 없다. 길거리에 재떨이가 없으면 신발 바닥에 비벼 끄고는 꽁초를 윗주머니에 넣었다가 새로 산 셔츠에 구멍을 내기도 했고, 맞춰 입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순모 양복에 담배 불티로 구멍도 몇 번 내기도 했다.

안팎의 무수한 구박으로 금연을 결심하여 한 열흘 견디다가 도저히 흡연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몇 모금 빨다가 금연 전보다 흡연량이 더 늘어나 버렸다. 재학생이나 졸업생들에게 '박도 〓 담배'가 인식될 정도로 나는 무척 애연가였다. 제자들로부터 오랜만에 받은 편지나 연하장에도 담배 좀 줄이라는 애정 어린 부탁은 약방에 감초처럼 적혀 있었다.

한 번은 연초에 집으로 찾아온 제자들이 저희끼리 연상 퀴즈 놀이를 하는데 한 학생이 '담배'하자 '박도'라고 답하니 맞았다고 해서 한바탕 크게 웃었다. 언저리에서 그렇게도 금연이나 절연을 권고해도 나는 담배를 끊지 못했다. 때때로 나 스스로 담배 하나도 끊지 못하는 놈이라고 자괴감에도 여러 번 빠졌다.

1992년 여름 유럽여행을 가는데 비행기에 탑승하기 전 김포공항 흡연실에서 두어 대를 연거푸 빨고 기내로 들어갔다. 50분 쯤 지나자 흡연의 욕구가 발동하는데 미칠 지경이었다. 꼭 횟배 앓는 증상이었다. 물도 마시고 껌도 씹었으나 흡연 욕구는 잦아지지 않았다.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화장실에 갔더니 거기도 ‘No Smoking'이었다.

흡연할 공간을 기웃거렸더니 마침 맨 뒤 빈 공간에서 누군가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얼른 가서 두어 모금 빠는데 파란 눈의 승무원 아가씨가 오더니 눈망울을 크게 뜨고 뭐라고 지껄였다.

프랑스어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틀림없이 흡연을 나무라는 경고일 것 같아 얼른 담배를 끄고는 두 손으로 싹싹 빌었다. 그제야 승무원은 싱긋 웃으며 다섯 손가락을 폈다. 5시간만 더 참으라는 말이었다. 파리의 드골 공항에 내려 터미널을 빠져나온 후 줄담배로 세 대 피우자 머리가 핑 돌면서 현기증이 났다.

돌아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비행기를 타기 싫은 가장 큰 이유가 금연 때문이었다. 그 후 몇 차례 해외에 나갈 때면 버릇처럼 탑승 전 흡연구역에서 두어 대 빨고, 도착 후 터미널을 빠져 나오면 두어 대 태우면서 그동안 못 태운 것을 철저하게 보충했다.

점차로 담배 태우는 사람의 설 자리가 좁혀졌다. 한 번은 새로 부임한 교장 선생님이 "선생님들이 먼저 담배를 끊어세요. 담배 태우는 선생님이 어찌 흡연하는 학생을 지도할 수 있습니까?"라는 말씀에, 무척 심한 말씀이라고 반발하다가 다시 생각해 보니 옳은 말씀이었다.

담배 냄새를 물씬 풍기면서 담배 피우다가 걸려온 녀석에게 "너 담배 피지 말아!"하면 그 말이 씨가 먹히겠는가? 앞으로 교단에 더 머물러 있자면 금연해야 할 시점이 왔다고 생각됐지만, 성공 여부를 확신할 수 없어서 섣불리 결단을 내리지 못한 채, 담배만 태우면 뾰족한 해결책이라도 있는 양 계속 빡빡 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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