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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여 가구가 넘었던 마을은 이제 잡초더미로 남았다.
ⓒ 최윤미
꼭 태어난 곳만을 고향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면 내겐 언제나 그곳이 고향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6학년을 졸업할 때까지 꼭 3년을 살았던 작고 작았던 마을. 강원도 삼척시 도계읍 심포리…. 38번 국도를 따라 삼척에서 태백 쪽으로 가다보면 중간쯤에서 만나지는 아주 작은 마을이다.

내가 고향 아닌 그곳을 고향으로 삼기로 결정한 건, 이사가던 첫날 마주쳤던 푸른 보리밭 때문이었다. 그때까지 다 자란 보리밭을 본 적이 없었던 나는 쏴∼하는 바람 소리를 내며 푸르게 일렁이는 보리밭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어린 마음에 이제부터 여기가 내 고향이다,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나중에는 그 마을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숱한 추억들 때문이었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때부터 그곳은 늘 그리움이 솟는 곳이고, 고향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이 되었다.

▲ 예나 지금이나 마을 입구에 자리한 건널목 초소.
ⓒ 최윤미
그곳을 14년만에 찾아갔었다. 마냥 들뜨고 설레어야 할텐데, 그곳에 가겠다고 생각했을 때부터 내 마음은 불안했다. 한 번쯤 그저 무심히 다녀올 수 있는 일인데도, 간간히 그곳의 소식을 듣고 있었기에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기억하는 풍경들이, 내가 기억하는 사람들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을까봐서 말이다. 내 불안은 얼마간 근거가 있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하나둘 마을을 떠나기 시작할 무렵, 우리 가족도 그 마을을 떠나왔고 그 이후로 더 많은 사람들이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던 터였다.

삼척을 지나 1시간쯤 달려 마을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차를 세웠다. 아연했다. 이곳이 수 백 명의 사람들이 이마를 맞대고 어울려 살았던 마을이라니. 한 동에 네 가구가 살았던 백여 동이 넘는 사택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마을 한 가운데 자리한 한옥집 한 채와 그 집의 너른 마당이기도 한 공터를 중심으로 질서 정연하게 늘어서 있던 집들이 사라진 자리는 그저 잡초 무성한 풀밭으로 변해 있었다.

▲ 동화책을 읽으며 이 벤치에서 가끔씩 졸고는 했다.
ⓒ 최윤미
마을의 아버지들은 모두가 석탄을 캐는 광부였다. 석탄산업합리화 정책이라는 그럴 듯한 정책 때문에 탄광들이 모두 문을 닫았으니 아버지들이 내릴 수 있는 결론이란 어디든 일을 찾아 떠나는 것뿐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한 집, 한 집 모두 떠나서 마을은 텅 비어버렸을 것이다. 내 아버지는 폐광이 되기 전에 다른 일자리를 찾으셔서 우리 집은 마을이 북적거릴 때 떠나온 축에 속했다. 그래서 솔직히 이렇게까지 됐으리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여전히 마을을 돌아나가는 기찻길을 건너 상심한 마음을 달래듯 학교 안으로 숨어들었다. 다행히도 초등학교는 거의 변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물옥잠을 관찰하던 뒷마당의 연못과, 여름이면 뛰어들어가 물놀이를 하던 분수대와, 동화책을 읽다가 가끔씩 졸기도 했던 독서광장과, 스케치북을 얹어놓고 물감을 찍어 그림을 그리던 화단 옆의 벤치와, 미끄럼틀에 매달려 놀다가도 다섯 시가 되어 애국가가 울리면 어김없이 가슴에 손을 얹고 바라보곤 했던 국기계양대와…, 많은 것들이 그대로였다. 문이 잠겨 있어서 교실엔 들어갈 수 없었지만 하나하나 지나칠 때마다 살아나는 그 때의 기억들이 상심한 마음을 얼마쯤 녹여주었다.

▲ 페인트칠만 달라졌을 뿐 예전 그 자리에 놓여있는 시소.
ⓒ 최윤미
아버지들이 모두 떠났으니 아이들도 다 떠났을 텐데 전교생이 여섯 명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단 하나 매달려 있던 반 표찰도 3·5·6학년이었다. 여섯 명의 아이들이 한 교실에서 수업을 받고 있는 모양이었다. 선생님은 매일 아침 읍내에서 출퇴근하신다고 했다. 내가 졸업할 때만 해도 전교생이 170여 명이었는데, 도계초등학교 심포분교가 된 이곳도 <선생 김봉두>에 나오는 그 학교처럼 폐교되는 건 아닐지….

집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여기쯤은 은정이네, 여기쯤은 선화네, 주혁이네, 재현이네, 여기 쯤은 우리집…, 이렇게 가늠해보는 동안 동네 사람들 모두가 몰려 나와 잔치를 벌이던 모습이 먼저 떠올랐다.

반장님 댁에서 키우던 돼지를 잡는 날, 아버지들이 한꺼번에 보너스라도 받는 날, 마을 어른 어느 분의 생신 날, 핑계거리만 있으면 어느 때곤 잔치는 열렸다. 겨울에 김장을 담글 때도 어머니들은 집집마다 품앗이를 하며 함께 했고, 눈이 많이 내린 날은 동네 사람들 모두가 함께 눈을 치웠고, 텃밭을 가꾸는 일도, 읍내에 장을 보러 가는 일도, 학교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행사에도 마을 주민들 모두가 함께 했다. 다닥다닥 맞대고 살아서 더 살갑던 이웃들, 친구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그 속엔 아직 젊으신 아버지와 이제 쉰을 훌쩍 넘기신 어머니의 젊은 모습도 섞여 있다.

▲ 작은 구멍가게 자리에 스위치백 휴게소가 생겼다.
ⓒ 최윤미
겨우내 지치지도 않고 눈썰매를 타던 산기슭도, 아카시아 꽃 송이 따먹던 기찻길도, 호미 하나 들고 씀바귀 캐던 동산도, 옷을 다 태워먹으며 쥐불 놀던 밭들도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사람들이 어울려 살던 흔적만 사라지고 없었다. 사라진 그 마을에 영동선에 유일하게 남아 있다는 스위치백 구간을 폐쇄하기 위한 사무소가 들어서 있었다. 사라진 마을에 또 무엇을 사라지게 하기 위한 사무소라니.

편리함과 경제성이라는 논리 앞에 사라져간 것들이 어디 우리 마을뿐이겠는가, 저 스위치백뿐이겠는가, 생각하면서도 마음이 스산했다. 사라진 마을을 고향으로 간직해야 하다니….

하지만….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살아가면서 힘이 들 때, 쓸쓸해질 때, 나는 어김없이 심포리를 떠올릴 것이다. 그 마을에 함께 살았던 이웃들, 친구들, 풍성한 자연의 얼굴을 기억할 것이다. 사람 사는 정이 아직은 푸졌던 그 때를 내가 잊지 않는다면 그 따뜻했던 시절은 늘 내게 힘이 되어 줄 테니까. 그 믿음을 아직은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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