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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6일 마리의 장례식에 참가한 끝없는 인파
지난 8월 6일 마리의 장례식에 참가한 끝없는 인파 ⓒ 박영신
"네가 잃어버린 것을 슬퍼하지 말고 세상을 알았음을 기뻐하거라."

아버지 쟝-루이 트랭띠냥(Jean-Louis Trintignant)은 말을 맺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려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8월 6일 토요일 오후2시, 마리는 세상과 영원히 작별인사를 고하고 파리의 묘지 뻬르 라셰즈(Pere-Lachaise)에 짐 모리슨(Jim Morrison), 에디뜨 피아프(Edith Piaf)와 나란히 묻혔다.

자유로운 여성의 대명사 마리, 배우자 폭력으로 사망

마리가 죽었다. 7월 27일 밤 11시경, 리투아니아의 도미노 플라자(Domino Plaza) 호텔에 묵고 있던 마리는 많은 다른 커플들처럼 말다툼을 했을 것이고 맞아서 부어오른 얼굴로 다음날 빌니우스 대학병원으로 옮겨졌다.

반면 마리의 연인이며 프랑스의 인기 록그룹 '느와 데지르(Noir desir, 검은 욕망)'의 리더 베르트랑 깡따(Bertrand Cantat, 39)에게서는 어떤 폭력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일방적인 폭행이었던 것이다. '마리가 잠든 줄 알았다'고 말한 깡따의 증언과는 달리 마리는 그 자리에서 혼수상태에 빠졌으며 깡따가 구조를 요청한 것은 다음날 아침 7시 30분경이었다.

2차례의 수술을 거친 뒤 가족의 요구로 7월 31일 파리의 병원으로 옮겨진 마리는 5일간의 혼수상태를 극복하지 못하고 8월 1일 뇌부종으로 눈을 감았다. 사체를 부검한 의료진에 의하면 머리에 입은 충격이 직접적인 사인이다. 향년 41세, 네 자녀의 어머니 마리는 젊었고 아름다웠다.

마리는 지난 6월 말부터 남성중심 사회를 거침없이 도발하며 자유로운 여성을 대변한 프랑스의 여류 소설가 시도니 가브리엘 꼴레뜨(Sidonie Gabrielle Colette)의 생애를 극화한 TV용 영화 '꼴레뜨' 촬영차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니우스에 머물렀다. 어머니 나딘과 함께 시나리오까지 담당한 '꼴레뜨'는 2004년 FRANCE-2 TV를 통해 2회에 걸쳐 방영될 예정이다.

이보다 앞선 1999년 마리는 어머니 나딘 연출의 TV용 영화 '빅트와, 혹은 여성의 고통(Victoire ou la douleur des femmes, 빅트와는 극중 주인공의 이름이며 동시에 '승리'라는 뜻의 불어, '여성의 승리 혹은 고통'으로 번역될 수도 있다)'에서 1960년대 말 낙태 합법화를 위해 싸우는 페미니스트 의사 역을 열연한 바 있다.

5세였던 1967년 배우이자 연출가인 어머니 나딘 트랭띠냥(Nadine Trinrignant)의 처녀작 '내 사랑, 내 사랑(mom amour, mom amour)'에서 마리는 아버지 쟝-루이와 호흡을 맞추면서 데뷔해 60여 편의 극장과 TV용 영화에 출연하면서 이름을 떨쳤다.

끌로드 샤브롤 감독의 1992년 作 '베티'에서 열연한 마리 트랭띠냥
끌로드 샤브롤 감독의 1992년 作 '베티'에서 열연한 마리 트랭띠냥 ⓒ Betty
우리에게는 끌로드 를루슈(Claude Lelouche) 감독의 1966년 대표작 '남과 여( Un homme et une femme)'로 알려진 저명한 배우를 아버지로 가졌지만 마리에게 쟝-루이의 딸이라는 수식어는 무의미했다.

오히려 프랑스의 대표적인 여배우 쟌 모로(Jeanne Moreau)를 연상시키는 부드럽지만 엄숙한 목소리로 사랑을 말하고 여성을 말하고 평등을 말해온 마리는 마리였다. 그만큼 마리의 인상은 강렬했었다.


"처음으로 따귀 한 대를 맞았을 때 바로 떠나라"

마리의 연인, 깡따로 말하면 8월 1일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니우스(Vilnius)에서 열린 3차 공판에서 8월 14일까지 일시구류가 결정된 이후, 오는 8월 18일 국제수탁재판에 의거해 프랑스 수사관 나딸리 뛰르께(Natalie Turquey)의 방문을 기다리는 상태다.

깡따는 3차 공판에서 '범죄'라는 표현을 거부하며 격한 말다툼 끝에 일어난 '사고'라고 반박했으나 마리의 어머니 나딘은 '마리의 아이들에게 엄마를 살해한 자는 감옥에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며 깡따에게 중형을 선고할 것을 요구한 바 있다.

마리의 묘지를 뒤덮은 화환들
마리의 묘지를 뒤덮은 화환들 ⓒ 박영신
더불어 '더 이상의 피해자를 막기 위해 깡따는 반드시 중형에 처해야 한다', '마리 이전에 또 다른 매맞는 여성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후에 알게 됐다'며 깡따는 상습범이라고도 했다. 프랑스 언론은 깡따가 최고 15년형을 선고받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물론 깡따가 마리를 죽일 의도는 없었을 것이다. 역사 이래 전세계 모든 사회에서 그래왔듯, 남자의 힘으로 여자의 '행실'을 고치려 했을 뿐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정폭력은 사람을 죽인다. 마리 트랭띠냥의 비극적 결말은 상징이 되었고 프랑스에서 다시 한번 가정폭력의 심각성을 되돌아 보는 계기가 됐다.

가깝게는 지난 8월 9일 오후, 흰색 리본을 단 200여명의 시위대가 파리 1구 꼴레뜨 광장에서 마리와 매맞는 여성들을 기리기 위해 꽃과 짤막한 메시지를 담은 카드 등을 현장에 쌓는 집회를 가졌다.

국가여성연대동맹과 함께 이날 집회를 주관한 가족계획운동의 마이떼 알바글리(Maite Albagly) 사무국장은 "여성들이 일상적인 공포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싸울 것"을 거듭 강조했다.

코메디 프랑세즈(Comedie francaise) 앞에 설치된 현수막에 새겨진 수많은 익명의 메시지 중에는 "처음으로 따귀 한 대를 맞았을 때, 자신의 존엄성과 목숨을 구하기 위해 바로 떠나야 한다", "결코 남편의 폭력이 처음이라고 말하지 마라" 등의 글들을 찾아볼 수 있었다.

@ADTOP@
"배우자의 폭력으로 인한 사망 매달 6명"

여성운동 단체 '집 지키는 암캐(Chiennes de garde)'는 마리의 사망 다음 날인 8월 2일 논평을 내고 이번 사건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전세계 여성을 죽이고 있는 폭력의 성차별'을 상기시킨다며 동시에 미디어에 의해 자행되고 있는 가정폭력 왜곡보도 사례들을 고발했다.

예를 들어 7월 30일 수요일 FRANCE-2 TV는 오후 8시 뉴스 시간에 '말다툼이 일어났고 두 연인 사이에 폭력이 오고 갔으며 마리는 새벽까지 의식을 잃은 상태로 방치됐다'고 했으며 프랑스의 주요 일간지들도 '불화의 희생자, 마리 트랭띠냥', 심지어 '마리 트랭띠냥, 치정극의 희생자'라는 제목을 달았다.

'남편에 의해 떠밀린…'과 같이 배우자가 피해 여성에게 가한 폭력을 극소화하는 표현이라든가 '말다툼의 희생자'라며 여성을 비인간화하는 것, 혹은 '폭력이 오고 갔다' 등의 표현은 두 사람이 서로 폭력을 휘두르는 상황을 연상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깡따에게서는 어떤 상처도 발견되지 않았고 마리는 죽었다. 또 '마리는 말다툼의 희생자'라는 표현도 '지진의 희생자'라고 말하는 것처럼 가해자가 모호하다며 단지 말다툼으로 사람이 죽지는 않는다고 힐난하기도 했다. 뇌출혈을 초래한 가해자의 폭력으로 마리는 죽은 것이다.

이런 식의 폭행 묘사 방식은 현실을 부정하고 가해자를 명확히 가려내는 일을 소홀히 하게 한다. '맞을 짓을 했다'와 같은 식으로 살인이 은연중에 여성 자신의 잘못임을 암시하거나 '가정폭력의 희생자'에서 처럼 마치 여성이 운이 없어 희생된 양 묘사한다. 이로써 여성은 일차적으로 가해 남성의 물리적 폭력과 이차적으로 사실을 은폐하려는 무책임한 미디어에 의해 두 번 희생되는 셈이다.

가정폭력을 왜곡하는 위와 같은 표현은 결국 가해 남성이 '애정표현'과 '폭력'을 동일시할 수 없다는 사실을 끝내 깨닫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마리의 비극은 '치정극'이 아니란 말이다.

'집 지키는 암캐'는 다시 프랑스에서 '가정폭력에 의한 살인이 가해 남성의 잘못'이라는 엄연한 사실을 알리는 일을 게을리하고 있다면서 "프랑스에서는 배우자의 폭력으로 매달 6명의 여성이 죽는다. 이 달의 희생양은 마리였다"고 말을 맺었다.

이 통계는 프랑스의 또 다른 여성운동 단체인 'SOS 팜(Femmes, 여성)'이 프랑스 보건부의 요청으로 2001년 2월에 발표한 가정폭력 보고서의 조사 결과를 인용한 것이다.

가정폭력, 유럽 여성의 사망과 장애의 주원인

보고서에 따르면, 1990년에서 1999년 사이 파리와 주변 지역에서 652명의 여성이 살해됐으며 이 중 절반이 배우자 폭력의 결과라고 한다. 국립의학아카데미 회원이며 보고서를 지휘한 로제 앙리옹(Roger Henrion) 교수는 "프랑스에서 5일마다 1명의 여성이 가정폭력에 희생되고 있다"고 말했다.

파리와 근교에 사는 20세에서 59세 사이의 여성을 무작위로 추출한 표본을 조사한 보고서는 욕설, 정신적 학대, 물리적 폭력, 강간의 피해 여성이 우울증과 병적인 기아증 또는 식욕부진과 같은 정신과 치료를 요하는 증세에 시달리며 몇몇은 흥분이 극도에 달해 자살을 선택하기도 하며 또 일부는 순전히 배우자의 폭력에 희생되고 있다고 밝혔다.

폭력의 종류를 분석한 결과 피해 여성의 30%가 자상을 입었으며 30%는 화상, 20%는 목졸림을 당했고 10%는 죽을 만큼 구타당한 것으로 나타났다. 가정이라는 울타리 내에서 발생하는 대부분의 폭력 유형은 자녀를 볼모로 하는 공갈협박, 모욕, 감금, 강요된 성관계, 살인적 구타로 이어지며 이것은 조사대상 10쌍 중 1쌍의 경우에 해당한다. 그러나 가정폭력은 일반적으로 '사생활'이라는 이름으로 금기시 돼 문을 박차고 나가지 못하는 실정이다.

유럽위원회도 1999년 12월에서 2000년 3월 사이 유럽의 가정폭력 사례를 조사, 발표한 바 있다. 프랑스의 경우를 살펴보면 조사대상 43.9%의 여성이 배우자 폭력의 피해자라고 대답했으며 가해 남성이 사회 생활에서는 정상이면서 유독 가정에서만 폭력을 휘두른다고 대답한 비율이 78.4%에 달했다.

가정폭력의 주요인으로는 첫째, 자신의 권위를 강조하기 위해(62.7%), 둘째 알콜중독(54.3%), 셋째 가해 남성 자신이 어린시절 학대를 받은 경우(46.6%)였으며 불우한 출신이나 환경때문인 경우는 20%로 하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이들 요인은 두 세 가지가 동시에 작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에는 2002년 스트라스부르(strasbourg)에 있는 유럽회의가 44개 회원국을 대상으로 같은 조사를 했는데 매주 1명의 여성이 배우자의 폭력에 목숨을 잃고 있는 유럽에서 가정폭력은 만성적인 현상이라고 했다. 유럽회의는 보고서 통계를 인용해 16세에서 44세 사이 여성의 사망과 장애의 주원인은 암이나 교통사고, 전쟁이 아니라 가정폭력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공개해 사회에 경종을 울리기도 했다.

프랑스, 가정폭력에 관한 새로운 조항 이혼절차 개혁법안 도입

보고서를 발표한 슬로바키아 올가 켈토소바(Olga Keltosova) 위원은 가난이나 교육 부족이 가정폭력의 요인은 아니라며 "가정폭력은 오히려 수입과 교육수준의 증가에 비례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네덜란드의 경우 거의 절반의 가해 남성이 대학 졸업자인 것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언어 폭력, 모욕, 협박, 되풀이되는 학대, 감금 등은 여성이 자신에 대한 믿음을 상실토록 한다"며 켈토소바 보고서는 어쩌면 구타보다 더 고통스러울 수도 있는 '심리적 폭력'에도 주목했다.

2001년 한 해 유럽에서 135만명의 여성이 가정폭력에 피해자였으며 러시아에서는 매년 1만3000명의 여성이 목숨을 잃는다. 켈토소바는 소수 몇몇 국가에서는 부부 사이의 강간이 범죄로 취급되는 반면 "대다수 다른 국가에서는 남편이 아내에게 무제한적으로 성관계를 요구할 수 있으며 부부 사이에 '강간'이라는 말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이어 "폭력 사건이 발생한 즉시 증거나 법원의 결정이 없어도 피해여성을 주거지와 일상 환경 그리고 자녀들로부터도 신속히 격리 보호할 것"을 제안했다.

지난 7월 10일, 프랑스에서 가정폭력에 관한 새로운 조항이 이혼절차 개혁법안에 도입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위급한 상황에 놓인 피해자가 배우자의 폭력을 제재하기 위해 이혼 절차를 밟기도 전에 가정재판소에 사건을 제소할 수 있도록 한 이 조항은 설령 이혼소송을 제기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최대 3개월간 배우자로부터 격리를 합법화했다.

매맞는 여성은 자신이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죄의식을 가지며 여성이 집을 떠나고 있다고 현 실정을 고발한 국가여성연대동맹은 이 조항이 '경미한 사건'일 경우에도 적용돼 여성의 권리를 보호하고 가해자들을 법정으로 끌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1999년 3월에서 5월 사이 유럽연합 회원국민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62%의 유럽인이 어떤 상황에서도 여성 상대의 폭력을 용납할 수 없다고 대답했으며 아내를 구타한 남성은 법정에서 죄가를 치러야 한다고 대답한 응답자가 94%에 달했지만 경찰에 접수되는 사건은 20건 중 1건에 불과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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