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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MF 이후 경기 침체와 청계천 복원 공사로 인해 손님이 많이 줄은 황학동 시장.
ⓒ 권기봉
"옛날에는 이곳이 대부분 논이었으며, 황학이 날아와 앉았으므로 황학동(黃鶴洞)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부근에는 백학동(白鶴洞)이란 마을도 있어, 백학동과 대칭적으로 생긴 지명으로 보기도 한다." – 김기빈의 <600년 서울 땅이름 이야기> 中

얼마 전까지만 해도 왕십리 논밭에 물을 대던 이곳 주변으로 황학 대신 사람이 몰려들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청계천 복원공사와 맞물려 이제는 이전과는 비교도 하기 힘들 정도로 한산해졌다는 것이 황학동 사람들의 대체적인 평가.

불과 올 초까지만 하더라도 '아저씨가 먹으면 요강이 깨진다'는 약을 파는 아저씨와 철 지난 성인 비디오와 도대체 쓸 데가 있을까 싶은 철물을 파는 상인, 신용불량자도 개통 가능하다는 핸드폰을 어지럽게 진열해놓고 파는 이들이 삼일아파트 앞뒤로 그득했다. 또 그것을 구경하고 사고자 하는 남녀노소 장삼이사들로 시끌벅적 왁자지껄했던 것은 물론.

그러나 입추가 지난 황학동에서 이전의 활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인 듯싶다. 확 불타올랐다 사그라지는 여름 한 때의 열기처럼, 가을을 준비하는 8월 중순의 황학동에서 예의 번영은, 그저 한때의 영화려니 체념하는 분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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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오후 어스름, 청계천8가와 7가 사이

황학동을 찾은 것은 소나기가 막 쏟아지려는 어느 오후 어스름. 지하철 6호선 동묘앞역에서 지상으로 나오는데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둔탁한 소리가 들려온다. 한 달 이상 계속되고 있는 청계천 복원공사 현장이다.

▲ 73년 개업한 이후 김정남 민속골동 대표는 황학동을 떠난 적이 없다.
ⓒ 권기봉
서울 한 복판에 맑은 물이 졸졸 흐를 하천이 복원되고 있는데도 마음 한 구석으로부터 그다지 반가운 기분이 들지 않는 이유는 무얼까. 솔직히 어린 시절 족대 들고 송사리 잡던 고향의 맑은 냇물이 서울 도심에 재현된다는 데 기대가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 이면에 숨어 있는, 아니 적잖은 사람들이 알고 있으면서도 애써 외면하고 있는 현실이 그 기대감의 총량을 능가하는 것은 아닐까. 기대감으로 잔뜩 들떠 있어야 할 지금 이렇게 적적한 걸음을 옮기고 있는 이유도 어쩌면 거기에 있는지 모른다.

청계천 복원 이후 이 일대가 어떻게 변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이미 세운상가와 대림상가를 포함한 그 주변에 대한 재개발 계획이 속속 나오고 있는 가운데 기계나 공구, 금속 관련 시장은 장지동 등 다른 곳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는 분위기이고, 각종 중고 수리 및 판매 업종이나 적잖은 노점상들 역시 '도시 미관'을 위해 다른 곳을 찾아 떠나야 할 판이다. 그들을 위한 뚜렷한 대책? 상인들은 마냥 불안해 한다.

그런데 현재의 청계천을 특징 짓는 풍경 중 기계나 공구, 노점상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제는 '어느 핏발 솟은 리어카꾼의 험상 궂은 욕설'도 '어느 맹인 부부 가수의 노래'도 듣기 힘들어질 청계천8가와 7가 사이. 이곳에는 이른바 '우리나라 최대'라는 중고품 시장이 들어서 있다. 바로 시쳇말로 '사람'과 '새 것' 말고는 안 파는 게 없다는 황학동 도깨비 시장.

부산 갈매기, 새벽 열차에 오르다

이제 곧 헐릴지 모를 삼일 아파트 15동과 16동이 만나는 곳에 섰다. 김정남(61·경기 부천)씨가 운영하는 '민속골동' 간판이 바로 눈 앞에 보이는 곳이다. 그가 황학동에서 만물상을 시작한 것은 벌써 3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 8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학력 때문에 진급도 안되고 월급도 낮아 부산을 떠났다고 했다. 앞에서 네 번째가 어린 시절의 김정남 대표로, 사진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그때 그 시절을 회상하면서.... 새로운 각오와 다짐으로 참된 삶을 설계할 것이다!
ⓒ 권기봉
"고등학교 졸업하고 군대 제대하고 바로 사회로 나갔지. 선박회사에서 사무 보는 일이었어. 그런데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학력 때문인지 진급이 되질 않아. 또 월급도 낮고. 조금 있으니까 내 밑에서 배운 사람들이 계장 되고 과장 되는 거야. 대학 나온 사람들이 말이야. 그러니까 불만도 많아지고 자연히 의욕도 떨어지고. 그래선 안되겠다, 더 이상은 무리다, 자영업이라도 해야 되겠다 했지."

사무직으로 들어갔던 김 대표는 차츰 현장 업무를 맡게 되는 빈도가 높아지면서 1~2년을 다닌 직장에 회의를 느끼게 된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현대조선을 설립한 1972년, 그는 선박회사를 떠난다.

"진급이 안되다 보니까 사무 계통에는 멀어져가고. 자꾸 작업 현장으로만 나가게 되고 말이지. 그래서 에라, 이럴 바에 차라리 서울로 가자고 했지. 난 상고 나왔으니까 장사치로 나가자. 대망의 꿈을 품고 서울 가는 밤 기차를 탔어."

그러나 부산 갈매기의 뜻이 아무리 대단하기로서니 바다가 없는 서울이란 대도시가 그리 호락호락한 상대만은 아니었다. 상고를 졸업했기에 장사라도 해보자고 상경한 길이었지만 밑천도 변변찮고 주변에 아는 이도 별로 없었던 탓에 만만치 않은 게임이었다.

"아니 뭐 할 게 있어야지. 공사장에서 막노동도 하고, 동대문 남대문에서 난전도 했어. 이것저것 온갖 잡다하게 안 해본 게 없지."

이후에 쓴 그의 비망록에는 '회상'이란 제목의 글이 있다.

"세월가면 잊어질까. 세월아, 말 좀 해다오. 못 잊어, 못 잊어서, 가슴만 태우는 옛날을 생각하면서! 얼마나 고달프고 슬픈 날이 많았는지. 배가 고파 울고, 외로워 고독하여 울고, 무서워서 떨고, 추워서 떨고, 괄세 받아 북받치고, 공부할 수 없어 부끄러워 숨고 피하고. (후략)"

그렇게 1년. 그러나 마음에 와 닿는 게 없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신설동 달동네 자취방을 떠나 구경이라도 할 겸 인사동을 찾았다는 8남매의 장남 김정남 대표.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어느 점포 앞을 지나는 순간 가슴에 찌릿하고 와 닿는 게 있었다고 한다.

▲ 김정남 민속골동 대표
ⓒ 권기봉
"공사판도 일요일에는 쉬었거든. 그래서 구경이나 할 겸 인사동에 나가봤지. 당시 인사동에 있는 골동품 상점에는 비싼 것들만 있는지 알고 외국 사람들은 안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들어가볼 엄두를 못 냈던 것 같아. 근데 한번 들어가 봤어."

그는 거기서 앞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았다고 했다. 학창시절 때 역사를 좋아했고, 위인전을 많이 읽었다는 김 대표는 그 이후부터 역사서와 박물관 도록을 끼고 다니다시피했고, 각종 미술 전시회와 박물관, 전국 민속 장터들을 훑기 시작했다.

"그 사람들이 그러는데 최소한 10년은 해야 된대. 그동안 먹고 살 것도 없긴 했지만, 에라 일단 하면 되겠지 싶었어. 그런데 뭘 알아야 하지. 책 끼고 다니면서 줄줄 외울 정도로 공부하고 여러 군데 수소문해가면서 배웠어."

인사동 골동품 상점에 들어가 구경을 하던 중 물건을 깨뜨려 변상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는 김 대표는, 그러나 대학교수라 불릴 정도로 열심히 공부했다고 기억한다.

"술 먹으러 갈 때도 책을 항상 갖고 다닐 정도였어. 그래서인지 날 대학교수인 줄 알더라니까?"

때로는 희열, 때로는 절망

밤잠 설쳐가며 열심히 공부했던 탓일까. '인사동 사건' 이후 1년 정도가 지나면서 차츰 눈이 트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고.

"여기저기 헤매다가 황학동 왔는데 어떤 할아버지가 리어카를 끌고 지나가더군. 그런데 그 안에 도자기가 하나 있어. 흙, 기름으로 범벅이 되어 있길래 뭐냐고 물어보니까 그냥 꽃병이래. 8천원 주고 샀지. 내가 꽃을 좋아하는 남자라 꽃병으로라도 쓸려고 말이야. 싸잖아."

그런데 그 8천원짜리 꽃병이 뜻하지 않게 최초의 희열을 가져다주었던 것이다.

"어떤 가게 앞을 지나가는데 날 부르는 거야. 꽃병 자기한테 팔라고 말이야. 그래 신기해서 얼마 줄 거냐고 하니까 5백만원이면 사겠대. 아니 그래서 놀랐잖아. 백만원은 더 쓰라고 해서 6백만 원에 팔고 왔어. 알고 보니 조선시대 백자였던 거야."

ⓒ 권기봉
이후 그는 며칠간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잠을 제대로 못 자 아침이면 눈이 퉁퉁 부을 정도로 놀랐던 것이다. 또 속초의 한 재래식 화장실에서 발견한 조선시대 민화 병풍 등 우연하게 찾아온 횡재의 순간은 그에게 이 일에 대한 흥미를 북돋우는 구실을 했던 것 같다. 그 돈으로 책을 사 보고 자료집을 구해 봤다는 김정남 대표. 그러나 그에게 항상 이런 기적 같은 순간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한번은 개업하고 1년쯤 지난 뒤였는데 엿장수한테서 족자를 하나 샀어, 만 원 주고. 낙관이 의미해서 누구 것인지 모르고 나중에 3만 원 주고 팔았는데, 그것 때문에 벙어리 냉가슴을 알았지. 나중이 어느 전시회에 갔는데 그게 추사 작품이라고 딱 걸려 있잖아. 약국 가서 진정제 사먹고 난리도 아니었어. 어디다가 내색도 못하고."

뚜렷한 스승을 둔 것도 아니고 딱히 옛 물건들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경험이 없었기에 골동품과의 대면은 항상 우연이었고, 고뇌의 순간으로 이어질 때가 적지 않았다.

"물건 감정을 잘 해야 하는데 실력이 없으니 진품인지 가짜인지 구별이 잘 안 되는 거야. 사고 싶었지만 누구 작품인지도 모르고 좋은 건지 확신이 안 서 안 샀다가 놓친 것도 있고."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은 값을 깎는다고 속을 뒤집어 놔. 근데 가끔은 인사동 사람들도 이곳에 골동품 사러 오기도 하거든. 이 사람들은 가격을 부르면 그냥 바로 사겠다고 그래. 그러면 아차 싶다니까. 또 당했구나 하고."

소박함을 바탕으로 우리은행 청계7가 지점 VIP고객이 되기까지

한국전쟁 이후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수많은 이들로 북적이던 황학동 일대는 그러한 연유 때문인지 골동품 상점들이 많이 들어섰는데, 김정남 대표가 들어올 때만 해도 50~60개 업소가 성황을 이루고 있었다고 한다.

ⓒ 권기봉
80년대 잘 나갈 때는 골동품 상점만 1백여 개에 이르렀다는 황학동. 망해 나간 이들도 있었지만 또 한편에서는 활기찬 시장을 바탕으로 목돈을 만지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지난 72년 혈혈단신으로 상경, 막노동과 난전 등을 거쳐 만물상까지 차리게 된 김 대표도 그 중 하나. 그는 이제 꿈을 이뤘다고 말했다. 상경 3년만에 터전을 잡아 부산에 남아 있던 가족들을 불러들였고, 4평으로 시작한 점포는 현재 20평 남짓한 점포 두 개 총 40평이 되었다.

단순히 수치만 비교해도 10배로 성장한 셈. 김정남 대표는 아내와 함께 살고 있는 부천의 정원 딸린 집 역시 그때 당시 벌었던 돈으로 구입한 것이라고 했다.

심지어 한때는 하루에만도 입금하기 위해 은행에 두 번이나 갈 정도로 장사가 잘 됐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우리은행 청계7가 지점의 VIP 고객이 되었다. 그런데 그가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윤택한 기반을 마련한 것이 전적으로 80~90년대의 활황 때문이었을까?

틈틈이 기록해온 그의 비망록에는 딸과 아들, 아내에게 보낸 편지의 초안과 순간순간 느꼈던 삶의 편린들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유독 자주 눈에 띄는 글귀는 '미래'와 '준비', '노력'과 '근면'.

"힘들고 고통스러운 부끄러운 지난 세월은 후회하지 말자. 밝은 내일이 있으니까. 자신 있게 살아갈 때에 목적을 달성하겠지!"

"마음에 안정을 찾을 때에는 힘든 등산을 하면서 땀을 흘리고 건강을 위하여 고난도 참을 줄 아는 인내심을 가져야! 나는 할 수 있다. 자신 있다. 무엇이든지 오라! 남아의 기상을 보아라!"


"내가 여길 왜 떠나, 여긴 내 동네야"

김정남 대표는 자타가 공인하는 '황학동 터줏대감'이다. 고향을 떠나 처음 사업을 시작한 곳도 황학동이요, 이후 약 30년간 머물러 있는 자리 역시 청계천이다. 장사가 안 된다고 해서 잠시나마 다른 업종으로 전업을 했던 적도 없다.

"청계천 복원 공사 때문에 시장이 다 죽었지만 한 2년 지나면 그래도 좀더 살기는 좋아지겠지. 복원 자체는 환영하지만, 일단 2년을 버티는 게 어려운 일이야."

▲ 그의 비망록엔 가족에 대한 사랑이 녹아 있다. 아들 성학과 딸 정은에게 보내는 편지의 초고.
ⓒ 권기봉
그래도 그는 어느 정도 기반을 닦아 놓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황학동에 대한 남다른 애정 때문일까. 이전에 만나보았던 상인들에 비해서는 청계천 복원공사가 가져다준 걱정의 정도가 그리 심해 보이지는 않았다.

"내가 여길 왜 떠나, 여긴 내 동네야. 난 죽을 때까지 황학동에 남아 있을 거야. 나중에 청계천 복원되면 천변에 앉아 소주라도 한 잔 해야지. 평생 공부하고 울고 웃고, 여기가 내가 뼈를 묻을 동네야."

옛날 황학동에는 사과박스 놓고 막걸리를 단지로 파는 집이 많았다고 한다. 몇 십 원짜리 왕대포에 돼지비계 안주면 억수로 맛있었다는 황학동. 과연 청계천 복원 이후에도 여기저기서 손님과 상인이 흥정하는 보이는 사람 부대끼는 멋이 있는 곳으로 남아있을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김 대표는 자신의 현재를 가능하게 해준 황학동을 절대 떠나지 않을 기세다.

"이 직업은 적성이 맞아야 영원히 자기 직업이 돼. 이건 내가 직접 다니면서 찾은 직업이야. 자부심을 느껴."

▲ 때로 힘들 때 그를 지탱해준 것은 가족이었다.
ⓒ 권기봉
그의 이런 고집을 증명이라도 하듯 딸 내외 역시 '민속골동'이라는 같은 이름으로 채 1분도 안 떨어진 곳에서 상점을 운영하고 있다. 김정남씨가 거의 매일 들르며 조언을 마다 않는 또 하나의 민속골동을 돌보는 것은 그의 사위 김세훈(35)씨.

"한 3년째 특별 수업 중이야. 이제 2년 정도 지나면 아들한테 아예 물려줘야지. 나도 은퇴하고."

사위 이름이 뭐냐고 묻는 기자에게 그는 '사위'가 아니라 '아들'이라고 했다. 아들이나 다름 없다는 이야기다. 역시 그의 비망록에는 사업과 인생 선배로서의 진정 어린 충고의 편지 초고가 남아 있다.

"세훈이에게 – 비망록 또는 수첩에 사업 리스트 관한 사항은 언제나 업무처에 필수적 소지해야 될 것을. (중략) 매사에 준비상태 부족함. 수정할 것을 기대함. 정신 무장이 요구됨!"

"젊음이 있을 때는 때로는 힘들고 고독할 때와 마음이 차지 않을 때도 있으므로 가는 길에 좌절도 맛 보고 쓴 맛도 알아야만, 후에는 탄탄한 대로가 펼쳐지는 것이다. 인내할 줄 알고 쉬어가면서 생각할 줄 아는 사람만이 지름길이 나온다. 의욕은 넘치므로 발전할 수 있겠다. (중략) 정신적인 문제가 인생을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인출만 해가는 VIP고객?

그러나 자신감이 넘쳐 보이는 그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가장 최근에는 IMF때문에 경기가 바닥을 쳐 수요가 현저하게 줄었다고 한다. 물론 이후에도 경기는 살아나지 않았고 특히 요즘에는 청계천 복원 공사 때문에 단골이 아닌 한 아예 황학동에서는 장사를 안 한다고 믿는 이들까지 있다고 한다.

▲ 김정남 대표의 아들에 다름 아닌 사위 김세훈씨. 그 역시 근처에서 ‘민속골동’을 운영하고 있다.
ⓒ 권기봉
"예전엔 서로 들어오려고 난리였는데 요새는 가게 보증금 빼먹고 나가는 이가 많아. 요 위로 가보면 빈 가게 천지야. 한 달에 딱 이틀 쉬면서 아침 8시부터 저녁 8시까지 일하는데 은행에는 별로 갈 일이 없어졌어. 가끔 가봐야 돈 찾으러 가는 거고. 요샌 은행 직원이 돈 좀 그만 빼가래."

한때는 집도 사고 딸 결혼 자금도 마련해준 상점이지만 지금은 가겟세나 근근이 낼 정도로 사정이 악화되었다고 한다.

"또 여긴 예전부터 주차시설이 없어 손님들이 불편해했어. 어떨 때 손님이 주차 위반이라도 하면 내가 벌금을 내주고 그랬다니까. 여기가 교통도 불편하고 86 아시안게임 때문에 장안평이나 이태원으로 많이들 떠났지. 지금 여기 만물상은 한 15개 정도 남아 있나?"

그런데 대다수의 청계천 일대 상인들이 걱정하듯 그에게도 청계천 복원 공사는 '단꿈'이 아닌 '고난의 행군'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앞으로 복원 공사가 완료될 때까지 버티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물론 불경기라 장사가 안된 것도 있지. 그런데 청계천 복원하면서 사정이 훨씬 나빠졌어. 청계천 복원으로 혜택을 누리는 사람도 있겠지만 피해를 입는 사람들도 반드시 있게 마련이거든. 상인들한테 대책을 세울 시간도 안 주고 이런 경우가 어디 있어? 영세 상인들이 권리금을 몇 천만 원씩 들여서 왔는데 너무 갑작스럽잖아. 준비운동이 안 돼 있는데, 너무 서두르는 것 같아."

황학동, 그 쓸쓸한 존재여

절대 황학동을 떠날 일은 없을 것이라는 김정남 대표. 30년간 이 일을 해오면서 "이 장사는 고독을 씹는 직업, 외로운 투쟁"이라는 사실을 느끼게 되었다는 그의 표정에서는 온갖 회한이 교차하는 듯했다.

남들이 무시할 때도 있었지만, 세월 지난 물건들을 만지는 이 일이 좋았고 옛 물건을 찾고 보수하는 작업 자체가 마음에 쏙 들었다는 김정남 대표. 그는 자신의 인내와 열정에 남다른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고 거듭 이야기하며 절대 황학동을 떠나지 않겠노라고 장담하지만 사이사이 보이는 불안한 표정은 무얼까.

▲ 하나씩 잘게 잘려 나가는 청계고가 상판을 바라보는 상인들의 눈동자. 누구에게도 터놓고 말하기 힘든 삶의 애환, 그리고 기약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엿보인다.
ⓒ 권기봉
물건을 팔러 오는 중간 상인들이 전국 각지를 벼룩처럼 팔딱팔딱 뛰어다니며 만물을 수집해온다고 해서 '벼룩시장'으로 불린 황학동. 무당들이 사용하던 옷이나 신발, 도구 등 마치 도깨비가 나올 것 같다 하여 '도깨비 시장'이라 이름 붙여진 황학동. 사람들이 개미떼처럼 북적이고 너무 알뜰해 버리는 게 없을 정도라고 해서 '개미 시장'이라 불리기도 했던 황학동. 또 없는 게 없다 해서 '만물시장'이 된 황학동.

여러 별명만큼이나 다양한 사람들이 찾았고, 전국에서 만물 사러 혹은 팔러 간다면 당연히 그리로 간다고 생각했던 서울 하늘 아래 둘째가라면 서러운 서민들의 시장.

그러나 지금의 황학동에서는 활기 띤 모습이나 상인들의 열기를 느낄 수 없다. '물샐 틈 없는 인파로 가득 찬 땀냄새 가득한 거리'는 없었다. 하나씩 잘게 잘려 나가는 청계고가 상판을 바라보는 상인들의 눈동자. 누구에게도 터놓고 말하기 힘든 삶의 애환, 그리고 기약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엿보인다.

그나저나 어느 물건이 잘 팔렸을까?
시대에 따라 팔리는 물건도 변해

ⓒ권기봉
시대의 변천에 따라 사람들의 관심도 달라지게 마련이다. 이는 만물상에서 팔려나가는 골동품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김정남 민속골동 대표에 따르면 70년대에는 주로 실생활에서 이용할 수 있는 민속용품이나 중고로서 이용가치가 있는 물건들이 많이 팔렸다고 한다. 이후 80년대 들어서는 도자기나 옛 가구를 찾는 손님들이 많았다고. 그리고 90년대 들어서는 인테리어 소품을 쓸 만한 것들이 인기가 좋았다고 한다. 이는 요즘에도 마찬가지인데 카페 주인이나 가정 주부 등이 주로 사간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요즘 들어서는 아프리카나 중국, 동남아시아에서 민속품들이 상당량 수입되고 있다고.

한편 이전에는 유명한 이들의 서예품도 상당수 거래되었다고 한다. 김정남 대표의 말을 들어보자.

“이완용이나 이승만도 작품을 여러 개 남겼는데 값이 싼 편이었어. 이완용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이승만은 나중에 장기집권 하려고 해서 그랬나? 아마 그래서 값이 높지 않았겠지. 비싼 것 중에는 김구 선생 것이나 박정희 대통령 게 있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쓴 것은 웬일인지 값이 좀 나가더라고. 독재를 했는데도 이승만 하고는 다른가 보지? 그리고 전두환? 그거 갖다 놔봐야 사가는 사람이 어디 있어?” / 권기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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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기억 저편에 존재하는 근현대 문화유산을 찾아 발걸음을 떼고 있습니다. 저서로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알마, 2008), <다시, 서울을 걷다>(알마, 2012), <권기봉의 도시산책>(알마, 2015)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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