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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김성칠 교수
故 김성칠 교수 ⓒ 창작과비평사
<역사 앞에서>는 김성칠 교수가 1945년과 46년 그리고 6·25가 일어났던 1950년에서부터 전쟁의 와중이었던 51년까지의 일기를 모아놓은 책이다. 이 책이 세상에 나오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저자의 미망인 이남덕 전 이대 국문과 교수는 "우리 민족사에 있어서 <동족상잔> 이라는 끔찍한 전쟁을 경험하게 했던 6·25 동란을 당시 치열하게 대립했던 좌 우 어느 편에서도 서지 않았고, 또 어디로 피난도 못 가고 앉은 자리 서울 근교에서 전쟁을 겪었던 한 <역사가의 눈>을 통하여 그 전쟁의 의미를 살피는 것"이 <역사 앞에서>를 출판하는 목적이라고 책의 후기에서 밝혔다.

역사를 전공한 저자는 이데올로기보다 민족이 우선이었던 사람이었다. 남한과 북한의 전쟁이 결국 당시 미국과 소련의 대리전임을 직시하면서 이데올로기의 망령에 놀아나는 민족의 비극에 대해서 안타깝고 비통한 마음을 숨기지 못한다. 그는 전쟁이 일어난 3일 후 서울에 입성한 인민군을 보고 다음과 같이 적었다.

"어제 본 국군과 이들과 무엇이 다르단 말이냐, 다르다면 그들의 복장이 약간 이색질 뿐, 왜 그 하나만이 우리편이고 그 하나는 적으로 돌려야 한다는 말이냐…서로 얼싸안고 형이야 아우야 해야 할 처지에 있는 그들이 오늘날 누굴 위하여 무엇 때문에 싸우고 있는 것이냐. 나는 길바닥에 털퍽 주저앉아서 땅을 치고 통곡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나는 울래야 울 수 없는 인민공화국 백성이 되어 있는 게 아니냐." 50.6.28

책을 읽으면서 단편적으로나마 알았던 한국전쟁 당시의 서울의 모습이 입체적으로 다가왔다. 그것은 그동안의 반공교육으로 한쪽의 시선으로밖에 볼 수 없었던 한국전쟁의 객관적 모습이기도 했다. 인민군은 우리가 교육받았던 것처럼 극악무도하지만은 않았고 당시 남한의 정치인들도 북벌을 주장하며 전쟁을 선동했다는 것은 새삼스러운 사실이었다.

"함께 대피한 사람들 중엔 인민군들도 있고 여자 군인도 있다. 말로만 듣던 여자 군인을 처음으로 가까이서 보았다. 여기서 본 인민군들도 모두 행동거지가 단아하고 정중하여, 이즈음 늘 갖는 느낌이지만 인민군은 질이 좋고 훈련이 잘 되어 있다. 맨 처음에 학교에서 받은 인민군에 대한 불쾌한 인상은 갈수록 씻겨진다.“ 50.7.25

"인민공화국에 있어서의 끊임없는 남침의 기획과 선전은 이미 천하가 다 아는 뚜렷한 사실이고, 또 이미 실천을 통하여 분명히 되고 말았으니 더 말할 필요조차 없으려니와, 대한민국의 요로에 있는 분들이 항상 북벌을 주장하고, 또 더러는 우리의 손목을 붙들고 말리는 사람만 없다면, 우리는 1주일 안으로 평양을 석권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을 되풀이하던 일이 아직도 기억에 새롭다." 50.9.1


그러나 인공치하에서 겪은 공산주의 사회는 체질적으로 리버럴리스트였던 저자에게 있어 결코 민족을 위한 대안사회는 아니었다. 남한내의 혼란과 정치인들의 부패에 개탄하며 남한사회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던 그는 자신이 한국전쟁을 통해 겪어보는 사회주의 체제의 문제점에 대해서도 날카로운 비판의 시선을 놓치지 않는다.

"하여튼 무어라 표현해서 좋을지 모를 정도의 철저한 언론 통제다. 대한민국 시절에 지저분한 신문을 자꾸 내어서 귀한 종이만 없애고 간상과 정상배의 협잡할 무대를 제공하는 것 같아서 몹시도 언짢게 여기었더니, 이렇게 되고 보니 무능지의 난립이던 그 시절이 되레 그립다." 50.8.29

그는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은근한 호기심과 기대가 있었음을 부인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겪어본 공산주의 체제 역시 이데올로기를 위해 인간을 도구화하는 사회였을 뿐 그가 생각했던 민족의 자존을 위하는 체제가 아니었음에 실망한다. 그는 스탈린에게 종속되어 그의 개인우상화에 치중하는 인공치하를 보면서 다음과 같이 개탄하였다.

"북조선에서 발간된 잡지를 보니 우리 인민공화국에서도 스딸린의 생일에 굉장한 선물을 보내었음은 물론이요, 이날을 경축하기 위하여 평양을 비롯한 북조선 방방곡곡에서 솔문을 해 세우고 기행렬을 하고 만세를 부르고 꽃불을 올렸다 한다. 청나라 건륭제의 70생일을 경축하기 위하여 주하사 박명원 일행이 북경으로 갔다가 다시 열하로 돌아들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연암의 <열하일기>에서 보았지만, 그때 서울에서 축하 행사를 하였단 말은 듣지 못하였다.(중략) 언제나 이 민족이 사대를 안 하여도 살 수 있을까." 50.8.3

결국 김성칠은 한국전쟁의 전황을 뒤집을 인천상륙작전이 이뤄지기 전 날밤. 석 달 동안 경험했던 인공치하에 대해 다음과 같은 심경을 밝히며 '인민공화국'에 대한 은근한 기대를 접는다.

"빨갱이라는 어감이 우리들의 귀에 그리 거슬리지 않고 들리던 때가 어제런 듯하건만, 적어도 날로 부패해 가는 대한민국을 바로잡고 우리 민족에 새로운 희망을 던져줄 수 있는 그러한 무엇이 아닐까 하고 은근한 기대조차 품었더니... 불과 두세 달 동안에 그 말에서 받는 인상이 이대도록 달라진 것은 대체 무슨 까닭일까?“ 50.9.14

마침내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되면서 인공치하의 경험은 종지부를 찍는다. 그는 미군에 의해 서울이 수복되는 현실을 목격하며 자신이 어쩔 수 없는 민족주의자임을 드러낸다. 자신의 동네에서 미군과 인민군의 격전이 있었는데 인민군이 미군에 비하여 화력의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미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는 사실에 "그들이 어느 편에 서 있는 군사임은 별문제로 하고 조선사람이 그처럼 용감하다는 말에 나는 허턱 좋았다"고 일기에 적어 놓았다. 그가 보기에 미군과 유엔군의 참전은 또 다른 외세의 침입이었던 것이다.

서울 수복이 되자 인공기를 걸었던 그의 집에는 태극기가 걸리게 된다. 10월 6일 일기에서 "아내가 간직하여 두었었던 태극기를 내걸었다. 석 달 동안 낯선 인공기가 펄럭이던 바로 그 깃대에 다시 태극기를 달아놓고 적이 마음이 후련해짐을 느끼었으나 해바라기인 양 이 깃발 저 깃발을 갈마 꽂는 내 몰골이 몹시 서글프기만 하다" 며 씁쓸한 소감을 밝힌다. 그것은 비단 저자의 소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평양까지 진격하겠다는 대한민국 정부의 방송만 믿고 서울을 떠나지 않았다가 인공치하를 겪어야 했던 모든 시민들의 소감이었을 것이다.

그는 서울 수복이후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다음 인공치하에서 겪었던 느낌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괴뢰집단의 일이라도 좋은 점은 물론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조직과 훈련은 과연 우리보다 앞선 듯싶다. 그러나 인간을 기계나 다른 물질처럼 알고 이를 학사(虐使)하여 모든 힘을 전쟁 준비에로만 기울이는 정치는 그리 좋은 정치라 할 수 없을 것이며, 백성이 허턱 괴롭게만 구는 정치는 본받을 만한 것이 못될 것이다." 50.10.14

이 부분을 읽으면서 과연 저자가 요절하지 않고 반공이 국시였던 60년대 군사독재시절까지 살았더라면 어떠한 시선으로 시국을 판단했을지 궁금했다. "괴뢰집단의 일이라도 좋은 점은 물론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다." 이 말만 가지고도 그는 감옥에 갔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역사 앞에서 표지
역사 앞에서 표지 ⓒ 창작과비평사
<역사 앞에서>는 1990년대 초반에 발간된 책이었다. 금세기 내에 통일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이남덕 여사의 생각이 이 책의 출간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통일에 앞서 가장 장애가 되는 6·25의 비극이 이 책을 통해 미약하나마 극복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녀는"6·25 동란을 누가 먼저 저질렀느냐 하는 것이 이즈음 신문 보도에서도 발표되었지만, 그것이 밝혀진다고 해서 우리의 고통이 극복되는 것도 아니다. 얼마나 집단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되었으면 동족에게 총부리를 겨누었겠는가? (중략) 6·25 동란의 고통을 무엇으로써 보상받겠는가? 그 고통을 극복하고 탈피해서 민족 전체가 정신적 성숙으로 재생 변신하는 길밖에 보상받을 길이 없을 것" 이라며 남편의 일기를 책으로 발간하는 심정을 토로하였다.

저자의 일기가 쓰여졌던 50년대나 책으로 엮어져 발간되었던 90년대 초반이나 지금 필자가 책을 읽은 21세기 초반이나 정작 한반도의 현실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 답답했다. 그는 단지 이데올로기보다 민족의 생존과 자존을 우선시 했을 뿐이었다. 인민군에 의해 죽음을 당했던 남한 사람들이 보기에 저자의 일기는"친북좌파"의 글로 읽혀질 수도 있고 국군에 의해 죽음을 당했던 북한 사람들이 보기에는 "반동분자"의 글로 읽혀질 수도 있을 정도로 특별히 어느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었다. 지식인에게 선택을 강요했던 시대의 폭력성에 가슴아팠다.

책을 읽으면서, 그가 서울 수복에 기뻐했던 것은 단지 남한내의 자유를 그리워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인공치하에서는 개인의 자유가 통제되어 있었다. 그가 북한의 체제를 가장 견딜 수 없어하던 부분이었다. 그가 소중히 여긴 자유는 신체의 자유뿐만 아니라 사상과 언론의 자유이기도 했다. 그가 군부독재시절까지 살아남아 대한민국이 사상과 언론의 자유를 말살하려던 시기를 겪었다면 어떠했을까? 싶었다. 그에게 남아있던 비교우위에 있어서의 남한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당시 지식인들의 글답지 않게 김성칠 교수의 글은 읽기 쉬웠다. 한문을 배웠으면서도 한글 쓰기를 사랑했던 저자의 의식은 쉽고 아름다운 우리말 쓰기에 대한 자부심으로 나타났다. 그는 인공치하에서 바람직하게 여겼던 것도 한글전용이었다.

다시 수복이 되자 한문 쓰기를 강요하는 대한민국을 보면서 "옳은 짓은 누가 하기로나 옳은 일이고 좋은 것은 누가 지니기로서니 좋음에 틀림이 없을 터인데 조선 사람으로서 당연히 하여야 할 한글 전용을 이북이 먼저 실천했다 해서 이에 반발한 까닭은 무엇일까" 하며 한탄한다.

새삼 “북한이 하는 모든 것은 다 나쁜 것이다” 라고 배웠던 과거의 반공교육이 생각났다. 그 반공교육의 여파는 21세기인 지금도 그다지 변한 것이 없는 것 같았다. 북한을 같은 민족의 입장에서 받아들이고자 하면 아직도 빨갱이 라는 소리를 듣기 십상인 남한에서 과연 온전한 통일 논의가 가능할 것인지 염려스러웠다.

<역사 앞에서>는 그런 면에서 다음과 같은 교훈을 주고 있었다. 우리가 가진 한쪽만의 이데올로기의 창이 아닌 남북 모두 <역사 앞에서> 자신들의 오류를 인정하고 민족의 관점으로 다가갔을 경우에만 한반도에서 동족상잔의 비극이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 하지만 그것이 지금 현실에서도 얼마나 난해한 것인지 책을 읽는 동안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한반도의 미래는 불안하기 때문이다. 그 불안의 원인을 단지 민족 내부의 문제만으로 치부할 수 없다는 것 또한 별반 달라지지 않은 한반도의 현실이다.

마지막으로 눈길을 잡았던 그의 일기 한 토막.

"서울신문은 하루빨리 원자탄을 써야만 한다고 강경히 주장하고 있다. 무슨 소리를 한댔자 세계에서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이니까 마음내키는 대로 아무런 말이라도 하는지는 모르지만 남이 만들어놓은 원자탄을 우리 땅에 제발 써주십사 하는 태도는 그래도 명색이 일국의 대신문으로서 취할 바 태도가 아닌 것이다.....될 수 있으면 원자탄 같은 건 다시는 살인의 무기로는 쓰지 말았으면 하는 것이 세계의 양식(良識)일 것이다. 그것을 하필 우리 땅에 던져서 동족상잔의 무기로 써줍소사 하는 마음보는 이해하기 어려운 노릇이다."50.12.4

그때나 지금이나 언론은 무책임하기가 비슷했구나 싶어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뒷맛이 썼다.

지구를 구한 꿈틀이사우루스

캐런 트래포드 지음, 제이드 오클리 그림, 이루리 옮김, 현암사(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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