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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집이냐고?  아니다 우편함이다. 우편함에 번지수가 큰 글씨로 쓰여져 있다.
새집이냐고? 아니다 우편함이다. 우편함에 번지수가 큰 글씨로 쓰여져 있다. ⓒ 정철용
서울에서는 이사 간 친구의 집을 방문하기 위해서 주소만 달랑 받아 적었다가는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큰 규모의 아파트 단지가 아니고서는 주소만으로 집을 찾는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그곳이 초행길인 경우에는 가는 길까지 낯설어서 한참을 헤맬 각오를 해야 한다.

따라서 처음 초대받아 가는 경우라면 집을 찾느라 허비할 시간을 미리 염두에 두고 조금 일찍 출발하는 것이 좋다. 길눈이 그리 밝지 않은 이들은 약도와 함께 휴대폰을 챙기는 것이 현명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곳 뉴질랜드 오클랜드에서는 주소만 알면 누구나 쉽게 초대받은 친구의 집을 찾아갈 수 있다. 새로 이사 간 친구의 집이 어디이든지간에, 주소만으로 그 집을 찾는 일이 결코 어려운 일은 아니다. 약도도 필요 없고 휴대폰도 필요 없으며 주소만으로 충분하다. 그곳이 초행길이라면 오클랜드 시내 지도 한 장만 더 챙기면 그만이다.

이것은 오클랜드의 인구가 서울의 10분의 1에 불과해 주택 밀집도가 상대적으로 낮고 상업 지역과 주거 지역이 명확히 구분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클랜드에서 집 찾기가 서울보다 훨씬 수월한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도 주소의 체계가 한국과는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에서는 주요 도로들만이 이름을 가지고 있으며 주소는 도로명과는 거의 무관하다. 그래서 주소의 번지수 앞에 붙는 것은 도로명이 아니라 동네의 이름이다. 그러나 대부분 번지수는 길잡이라기보다는 미궁으로 이끄는 암호에 더 가깝고, 특히 아파트의 경우에는 번지수가 거의 의미를 지니지 못하여 생략되기 일쑤다.

따라서 한국에서는 집을 찾는 데 번지수를 아는 것이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눈에 띄는 지형지물을 찾아 근처까지 가서 전화로 다시 확인하는 것이 길에서 허비하는 시간을 줄이는 방법이 된다.

이와는 달리 뉴질랜드에서는 주택가의 작은 골목길 하나 하나에도 제 각기 이름이 있으며 그 길의 입구와 출구에는 도로명이 새겨진 표지판이 꼭 세워져 있다. 그래서 주소에도 번지수에 도로명과 동네 이름을 함께 적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그 번지수는 도로의 진행방향으로 보았을 때 오른편에는 홀수, 왼편에는 짝수로 순서대로 매겨져 있어 찾기 쉽게 되어 있다.

또한 대부분 상가 건물에는 번지수를 나타내는 숫자가 벽이나 간판에 표시되어 있으며, 주택의 경우에도 집 앞 우편함에 번지수를 커다랗게 적어 놓아 길에서도 쉽게 주소 확인이 가능하다. 이렇게 운전하면서도 번지수를 확인할 수 있으니 주소만 알면 오클랜드에서 집을 찾는 것은 그야말로 누워서 떡 먹기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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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골목길이라도 이름이 있는 뉴질랜드의 도로. 막다른 길에는 친절하게 "출구없음' 표시도 함께 단다.
작은 골목길이라도 이름이 있는 뉴질랜드의 도로. 막다른 길에는 친절하게 "출구없음' 표시도 함께 단다. ⓒ 정철용
이처럼 뉴질랜드와 한국 주소체계의 가장 큰 차이점은 뉴질랜드는 도로 중심의 주소 체계인 반면에, 한국은 마을 중심의 주소 체계라는 점일 것이다. 무엇이 이러한 차이를 만들었을까? 나는 오래 전에 인류의 삶의 방식을 지배했던 유목 문화와 농경 문화의 차이가 현재까지도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잘 알려져 있듯이 앵글로 색슨족은 유목 민족인 게르만족의 한 갈래인데, 이곳 키위들은 바로 앵글로 색슨 족의 후예들이다. '이동성'이 우선인 유목민들에게는 눌러 앉는 마을보다 미지의 세계로 통하는 길이 더 가치가 있다. 그러한 유목민의 후예가 건설한 나라답게 이곳 뉴질랜드에서는 길을 의미하는 단어가 무척이나 많다.

그것은 이곳의 도로명만 살펴보아도 금방 알 수 있는데, 가장 흔하게는 Street(약자로는 St), Road(Rd), Avenue(Ave)가 사용되며 이외에 Drive(Dr), Way, Lane(La)도 자주 사용되는 단어다.

그런데 전혀 도로의 이름 같지 않은 단어들도 도로명으로 사용되고 있어 흥미롭다. Place(Pl, 출구가 없는 막다른 골목길), Crescent(Cres, 초승달처럼 둥그렇게 굽어져 있는 길), Court(Ct, 집들로 포위된 출구 없는 길), Terrace, Rise, Close, Gardens, Grove, Parade, Mews, Heights 등이 바로 그러한 단어들이다.

거의 20종에 이르는 이곳의 도로명과 비교해볼 때 한국에서 도로명으로 사용되는 단어는 너무나 단순하다. '세종로'나 '청계천 1가' 등에서 볼 수 있듯이 '로(路)'나 '가(街)'가 대부분이고 기껏 변주를 해보았자 '양재대로'나 '고산자길'에서 볼 수 있듯이 '대로(大路)'나 '길'이 고작이다.

하지만 이와는 대조적으로 한국에서는 마을을 뜻하는 단어는 비교적 풍부한데, 이것은 함께 모여서 마을을 이루어 사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던 농경 문화의 소산일 터이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동(洞)이나 리(里)뿐만 아니라 아직도 시골에서 자주 들을 수 있는 부락, 고을, 골, 촌, 마을 등이 이를 잘 말해준다.

집은 저 안쪽에 있어도 우편함은 길 앞쪽으로 나와 있다. 이것이 뉴질랜드에서 집찾기가 쉬운 이유이다.
집은 저 안쪽에 있어도 우편함은 길 앞쪽으로 나와 있다. 이것이 뉴질랜드에서 집찾기가 쉬운 이유이다. ⓒ 정철용
이처럼 문화 시원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한국과 뉴질랜드의 주소 체계의 차이는 그 사용 방식에서도 차이를 보인다. 그러한 차이에서 우리는 세계관과 가치관의 차이까지도 읽을 수 있다.

여기 예를 들어 '대한민국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매탄동 xxx번지 xx호 홍길동'이라는 주소가 있다고 하자. 이 주소가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듯이, 한국의 주소에서는 세계는 개인에게로 수렴한다. 개인의 정체성(identity)은 세계를 내면화함으로써 확보되며, 따라서 다양하고 풍부한 세계의 경험자로서 연장자는 존경의 대상이 된다.

개인의 이름보다 그가 속해 있는 세계의 이름을 더 앞에 놓는 한국의 주소는 개성보다는 집단의 규범이나 조직의 규칙을 더 존중하고 다양한 집단 소속감을 통하여 삶의 중요한 활력을 얻는 한국인의 전형적인 초상화와 일치한다.

반면에 'Mr John Banks, xx Kimberly Rd, Epsom, Auckland, New Zealand'라는 뉴질랜드의 주소에서는 개인이 세계로 확산된다. 세계는 인간에 의해서 그 실체(entity)가 드러나는 탐험과 연구의 대상이며, 따라서 미지의 세계가 더 큰 가치를 지닌다. 이 때문에 가능성으로서 어린이가 존중받는다.

세계의 이름을 호명하기에 앞서 개인의 이름을 먼저 부르는 뉴질랜드의 주소는 동질 집단 내에서도 개성과 다양성을 장려하고 집 안에서조차도 철저하게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는 이곳 키위들의 모습과 일맥상통한다.

주소로 읽을 수 있는 이러한 동서의 의식구조의 차이가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인류 역사 속에서 이러한 세계관의 차이는 서세동점(西世東漸)이라는, 우리 동양인들에게는 뼈아픈 현실로 나타났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아주 사소한 것이지만 주소의 차이에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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