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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61cm. 캔파스에 유채. 1992
73×61cm. 캔파스에 유채. 1992 ⓒ 김용님
우스개 소리로 ‘악성난시를 가진 자가 그림 평하듯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야기의 배경인즉 이렇습니다. 안경이 그리 흔하지 않았던 시절, 어느 유명한 여류화가의 그림이 자신의 집에서는 언제나 찬밥이었습니다.

아무리 큰상을 받은 그림도 언제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나중에 자신의 남편의 눈이 악성난시라는 사실을 알고 난 후에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의 눈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불투명하고, 조화롭지 못하게 보였던 것입니다.

‘바로 볼 수 있을 때, 올바르게 행동할 수 있다’는 말은 언제나 옳습니다. 자신의 눈으로 옳게 판단하며 구별하며 분명하게 보려면 눈에 왜곡됨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바르고 분명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린시절 나무칼싸움 때에 번번이 지곤 하였던 이유는 두려움에 지레 눈을 감아버린 데에 있습니다. 실로 바르고 분명하게 보는 것은 곧 분명하고 바르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눈을 감아버리거나 비딱하게 본다면 그 것 자체로 불행입니다. 안보이거나 안본다고 해서 일이 해결되거나 하지 않습니다. 우리들 주위에서 일어나는 어떠한 일이라도 그것의 허상이 아니라 실체를 바르게 바라보아야 합니다. 무심한 눈으로 스쳐 지나거나 허약한 시력으로 보거나 한다면 그릇된 평가를 내리거나 터무니없는 결론을 내리기 쉽습니다.

현실에 당면한 어떠한 사건을 바라본다 해도 허약하거나 굴절된 시각으로 본다면, 그 안에 담겨 있는 의미들을 미처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에, 현실의 외적인 조건에 최상의 기분에 젖어들다가도 또한 조그마한 현실적인 어려움에 봉착하여도 꺼질듯이 주저앉아 일어나지 못하는 나약함을 보이기 일쑤인 것입니다.

위협을 느끼면 재빠르게 머리만을 모래 속에 묻는 타조의 모습을 이러한 모습 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눈에 안보이기만 하면 위험을 피한 것으로 여기는 모양이지만 머리만 땅에 묻는 것은 전혀 해결책이 되지 못합니다. 문제의 실체를 바라보며 그것과 맞닥뜨려야 합니다. 그것을 생생하게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언제나 “문제풀이 행보”의 시작입니다.

일찍이 예수와 함께했던 제자들은 가장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예수를 헤아리지 못하는 내적 맹인의 경험을 하였습니다. 제자들을 향한 ‘눈멀음’에 대한 지적은 복음서에 계속되는 주제였습니다. 수시로 예수는 이 고질적인 제자들의 눈멀음을 경고하면서, 문제를 회피하거나 실체를 파악하지 못하며 왜곡되게 보는 일을 지적하셨습니다. 이러한 일들을 기억하면서 베드로는 그의 편지에 형제들의 눈멀음을 역시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를 극복하는 방법은 ‘열성을 다하여 믿음에 덕을 더하고, 그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지식은 가질 수 있으나, 그 지식에 걸 맞는 영향력을 겸하여 소유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성숙한 확신은 이를 통하여 더욱 분명해 지는 것입니다.

성경책과 안경
성경책과 안경 ⓒ 느릿느릿 박철
도식적이지 않은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앎은, 구름 낀 현실에 실제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법입니다. 여기에 어디에서 뛰어나올지 모르는 이기적 성향을 막아 세우는 절제의 용기를 덧붙여야 합니다. 또한 어떠한 일이 채 진행되거나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쉽사리 포기하거나 무너지는 일은 어처구니 없고 당황스러운 일입니다. 끝까지 땀 흘리며 단련하며 끝내 창조적인 결과를 만나는 인내의 덕목이 여기에 뒤따라야 합니다. 여기에서 참된 참(眞實)이 싹틉니다. 참은 꾸밀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실로 자연스럽게 정의로운 삶과 행동으로 드러나는 깊이 있는 영향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 나아가 일을 함께 풀어가는 것은 더없이 신명나는 일입니다. 함께하는 일은 사랑으로 더욱 여물어집니다. 이러한 것들을 갖추지 못하면 ‘앞을 못 보는 맹인이며 근시안(近視眼)’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바라보는 일은 어떠합니까? 우리의 눈은 건강합니까?

우리가 우리 자신과 공동체에 대해 어떠한 일을 꿈꾸며 희망한다면, 그것은 언제나 바르게 바라보는 일을 전제하여야 합니다. 허약하거나 왜곡된 눈길로는 아무것도 이루어낼 수 없습니다.
지금 당신은 눈을 잘 보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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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 기자는 부산 샘터교회 원로목사. 부산 예수살기 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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