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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신용철
1년 가량 한반도를 휩쓸었던 한국전쟁은 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 미국 중심의 자본주의 진영과 북한과 중국간의 휴전회담을 개최해 군사분계선 설정, 휴전감시기구 구성, 관련 국가에 대한 권고사항 등 3가지 잠정합의사항를 도출하게 된다.

이로써 군인 사망자 150여만명, 부상자 360여만명에 달했던 민족의 비극사는 운명을 다하는 듯 보였다. 그런데 휴전협정이 진행되던 1952년 2월 22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박헌영 외교부장이 '미국의 세균전 범죄에 대해 UN에 항의하고 미국의 불법행위를 조사할 것을' 호소했고 이틀 뒤 중국 저우언라이 총리도 '평화를 사랑하는 전 세계인민이 미국정부의 범죄행위를 중단시켜야 한다'며 미국의 세균전 실험을 강력히 비난하고 나섰다.

만약 북한과 중국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전쟁에서 세균전이 자행된 첫 사례가 한국전쟁이 되는 것이고 미국은 한국전쟁 참전 명분으로 내세운 '정의의 전쟁'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비난을 피할 길이 없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정부는 북한과 중국의 세균전 주장에 대해 공산주의자들의 선전선동일 뿐이라고 응수했고 이런 입장은 2003년 현재에도 진행형으로 남아있다.

<한국전쟁과 미국의 세균전>은 선교사 부모 밑에서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나 1980년대까지 중국에서 교수직을 역임했고 요크대학에서 동아시아 역사를 가르치는 스티븐 엔티콧과, 현대전과 현재 전면전의 기원에 관한 많은 논물을 발표한 요크대학 역사학과 에드워크 해거먼 교수가 미국·캐나다·영국·중국 등의 기밀해체문서를 통해 미국이 세균전에 뛰어든 배경과 한국전쟁 당시인 1950년 한반도 북부에 제한적인 세균전을 시행했고 1952년 북한지역과 중국 동북부지역으로 점차 세균전을 확대했다는 자료와 근거를 통해 미국의 한국전쟁 당시 세균전 시행이 사실일 가능성이 높음을 과학적으로 밝히고 있다.

또한 미국이 인간을 마루타로 사용해 생체실험을 했던 일본 761부대 대장 이시이 시로를 전범에서 제외시켜주는 조건으로 일본의 생체실험 자료를 얻은, 일본과 벌인 추악한 계약사실을 폭로하고 있다.

"1952년 1월 28일 아침 적기(미군 비행기-필자 주)가 이천 지역 상공에 나타나 2~3차례 선회하더니 남쪽 방향으로 날아갔다. …정오가 가까워지면서 안개가 걷혔고 중국군은 적기가 나타난 지역의 여러곳 눈 위에서 파리, 벼룩, 진드기, 거미 등과 같은 곤충을 발견했다. 14시간동안 이 지역에서 벼룩, 파리, 거미가 발견됐다." (1952년 1월 29일 북한 인민군 의무본부위원회 문건 중에서)

1952년 1월~2월 중국군과 북한군은 한반도 이북지역인 이천, 철원, 금화, 평양 등지에서 미군기가 나뭇잎, 깃털, 면화 솜, 마분지, 콩 줄기와 꼬투리, 여러 종류의 살아있는 곤충, 썩은 생선과 돼지고기, 개구리, 설치류 등을 채운 폭탄을 떨어뜨리는 것을 발견했다.

1952년 1월까지만 해도 전염병이 발견되지 않았는데 미군기가 이상한 물건들을 떨어뜨리고 지나간 뒤 평균 영하 10도였던 강추위에 파리, 모기, 진드기, 거미 등이 발견되었다. 영하의 강추위 속에서 생존이 불가능한 곤충들이 대량으로 발견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비정상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들 곤충들을 채집해 실험실에서 조사한 결과 파리에서 콜레라 양성반응이 검출되었고 중국군과 북한군 주둔 지역에 '페스트 또는 이와 유사한 질병'이 퍼졌는데 1946년 당시 콜레라가 발병한 것을 제외하면 지난 60년 동안 한반도에서 콜레라는 보고된 적이 없었으며 페스트는 중국 동북부지역의 풍토병이었지만 1912년 이후 한반도에서는 한번도 보고된 적이 없어 미국의 세균전에 초점이 맞춰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중국과 북한은 쥐잡기, 곤충박멸, 수자원 보호, 주거지역 소독 등 보건 캠페인을 대대적으로 벌이는 동시에 병사들에게 예방접종을 진행하는 등 세균전과 관련된 역학조사에 나서게 된다.

미국이 세균전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2차 세계대전 중 1939년 일본과 독일이 생물학전을 개발하고 있다는 첩보를 접하고부터, 당시 미국 전쟁부 장관의 명령으로 '민간세균전위원회'가 구성하고 영국·캐나다 세균전 프로그램과 연락체계를 구축하면서 본격화된다.

미국은 수많은 세균전 관련 민간학자들을 각종 위원회에 참가시켰으며 메릴랜드 주 디트릭 기지 내에서 광범위한 세균전 프로그램을 진행했고 영국의 실험을 바탕으로 연합군은 세균전 폭탄(탄저균)을 개발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막대한 재원과 노력을 투입했던 세균전 프로그램은 1945년 8월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일본군국주의가 전격적으로 항복함으로써 전쟁에 실제 사용되지는 못하게 된다.

그러나 2차세계대전 후 미국은 소련의 생물학무기 개발을 빌미로 2차세계대전 때 진행해왔던 세균전 프로그램을 지속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게 되었고 생물학무기가 원자폭탄 개발비용보다 저렴할 뿐 아니라 공중에서 투하되는 생물학무기는 원자폭탄과 효과적으로 결합될 수 있다는 정치권과 군부의 견해가 힘을 실어주었다.

이런 과정에서 미국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이 자행한 인체실험에 주목하고 1947년 일본 731부대 이시이 시로 중장과 생물학정보를 미국에 넘기는 대신 전범 기소 면제를 보장해주는 뒷거래를 맺었다. 이것은 소련이 인체실험을 했던 일본인 세균전 연루자를 전범으로 공개재판에 회부한 것과는 대조되는 대목이다.

1950년 6월 25일 전면전 양성으로 치닫게 된 한국전쟁은 북한군의 일방적인 실력생사로 낙동강까지 밀렸다가 1950년 9월 맥아더 유엔총사령관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38도선 이북지역까지 진격하게 된다. 이때 맥아더 유엔군총사령관은 압록강을 향해 진군하면서 '집에서 크리스마스를 맞게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갑작스런 중국군의 참전으로 대패를 거듭하게 되자 미국군부와 정치지도자들은 원자폭탄 사용을 고려하기 시작했고 1950년 11월 30일경 당시 미국 대통령 트루먼은 기자회견을 통해 'UN이 중국에 대한 군사행동을 승인한다면 맥아더 장군에게 원자폭탄 사용에 대한 재량권을 부여할 수 있다'고 말했다.

미국 합동참모본부도 원자폭탄 사용에 대한 트루먼의 입장을 지지했으나 한국전쟁에서 원자폭탄이 사용될 경우 중국 뿐 아니라 소련까지 참전하는 확대전면전으로 치닫게 될 것을 우려해 세균전 사용을 대안으로 채택하게 된다.

그동안 미국은 생물학 무기 개발을 위해 예산을 급격히 증액해왔고 일본 731부대로부터 넘겨받은 정보와 일본 극동의무사령부 산하에 406부대 창설을 통해 생물학무기 개발에 몰두해 상용화를 목전에 두고 있던 실정이었다.

예상치 못했던 중국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기울어지자 맥아더는 북한에서 후퇴할 때 '압록강 남쪽부터 전선사이에 있는 모든 통신 수단, 시설, 공장, 도시와 마을을 파괴하라'고 명령했고 중국과 북한은 후일 '1950년 12월~1951년 1월 사이에 미군이 38선 이남으로 퇴각하면서 평양, 강원도, 함경남도, 황해도와 여타 지역에 천연두 바이러스를 살포했다'며 처음으로 미군의 세균전 사용을 주장했다.

한반도의 38도선을 두고 밀고 밀리는 전투가 진행되었으나 양측 모두 별다른 진전을 보이지 않자 1951년 6월 소련의 제안으로 휴전협상이 진행되었지만 '포로교환방식'을 놓고 양측이 팽팽한 의견차이를 보였다. 중국과 북한측은 1949년 제네바협약에 의거 '전원 본국송환'을 주장한 반면 미국은 '자발적 송환의사'를 주장했던 것이다.

한국전쟁 휴전협상을 벌이는 중에도 '교살작전'이라는 이름으로 북한의 인구밀집지역과 압록강 일대 관개용 댐까지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했던 미국은 휴전협상의 우위를 점하기 위해 1952년부터 한반도 북부와 중국 동북부 지역에 두 번째 세균전을 감행했다고 하는 것이 저자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페스트, 탄저병, 뇌염, 콜레라 등의 질병이 북한과 중국 동북부 지역에 발생했지만 중국군과 북한군의 대대적인 공중보건 정책으로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1953년 가을 중단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것은 기밀해제되고 있는 문서들을 통한 추론과 자료조사에 의존하고 있어 한계를 가지고 있지만 미국이 한국전쟁 당시 한반도에서 세균전을 시행했을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미국의 세균전 시행이 공산주의 진영의 선전선동에 불과하다고 믿었던 하버드대학 생물학연구소 소장을 역임했던 생물학 분야 노벨수상자였던 고 조지왈드 교수는 저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미국이 한국전쟁에서 세균전을 펼쳤다는 주장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당혹스럽고 수치스러운 마음으로 당시 내가 믿을 수 없다고 여겼던 것이 지금은 매우 신빙성이 잇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고 한 대목에 한국전쟁 세균전을 푸는 열쇠가 숨겨 있다.

한국전쟁과 미국의 세균전

스티븐 엔디콧·에드워드 해거먼 지음, 안치용·박성휴 옮김, 중심(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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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2002년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위원 2002년 3월~12월 인터넷시민의신문 편집위원 겸 객원기자 2003년 1월~9월 장애인인터넷신문 위드뉴스 창립멤버 및 취재기자 2003년 9월~2006년 8월 시민의신문 취재기자 2005년초록정치연대 초대 운영위원회 (간사) 역임. 2004년~ 현재 문화유산연대 비상근 정책팀장 2006년 용산기지 생태공원화 시민연대 정책위원 2006년 반환 미군기지 환경정화 재협상 촉구를 위한 긴급행동 2004년~현재 열린우리당 정청래의원(문화관광위) 정책특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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