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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군 남일 대장과 미군 해리슨 중장이 멀찌감치 떨어진 각자의 탁자에서 휴전협정에 서명했다.

지루한 비였다. 부쩍 격해져만 가는 포격으로 목적지 없는 총탄이 뜨거운 비에 녹아 전장의 군인들 머리 위로 떨어졌다.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정전협정이 조인되기 직전까지도 위도 38도 언저리에서는 서로간에 국경을 더 깊숙이 들이밀고자 격전을 벌였다. 정전협정 조인식이 열리는 동안에도 쩌렁쩌렁한 포성이 들렸음은 물론이고, 조인식이 끝나고도 밤 10시가 될 때까지 격렬한 전투는 계속되었다.

27일 오전 10시가 되자 판문점에 들어선 UN군측 대표 윌리엄 페이 해리슨 미군 중장과 북한군 남일 대장이 들어섰고, 뚝 떨어진 각자의 탁자에서 휴전협정 문서에 서명을 했다. 3년여를 끌어온 전쟁이지만 협정문에 서명하는 데 들어간 시간은 고작 10분여.

국가에서 인간으로의 관심 전환, 그러나...

▲ 막막한 하늘 아래 북쪽을 보고 도열한 무덤과 표지목들.
ⓒ 권기봉
오는 27일(일)은 남과 북, 정확히 말하면 유엔과 북한-중국이 정전협정을 체결한 지 꼭 50년째 되는 날이다.

이후 냉전 체제가 계속됨으로써 전쟁 아닌 전쟁 상황을 거쳐온 한국. 그러나 시대가 변하면서 한국전쟁이라는 20세기말 역사 사건을 고찰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들이 있었다.

과연 누가 먼저 38도선을 넘었으며, 한국전쟁이 일어나게 된 근본 원인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한국전쟁으로 인해 남과 북이 서로 잃고 또 얻은 것은 무엇인지. 정작 직접적인 전쟁 당사자인 남과 북만이 아니라 해외에서도 한국전쟁을 이해하고 해석하기 위한 다양한 접근을 해왔다.

그런데 일련의 과정과 시도를 꼼꼼히 들여다 보면 한 가지 빠진 것이 있었다. 인간. 바로 인간 개인이다.

그동안 한국전쟁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대상과 주체는 남한과 북한, 미국·중국·러시아 등 거대한 국가 체제 혹은 사회 체제에 상당 부분 할애되는 양상을 띠었다. 그 어디에서도 직접 전투를 치르고 그 결과 고통을 받은 인간, 또 아무 것도 모르고 전쟁에 휘말릴 수밖에 없었던 대다수의 한 연약한 개인들에 대한 이야기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렇게 반 세기가 흘러갔다.

한국전쟁이 휴지기로 접어든지 50년. 요즘 들어서야 알 수 없는 이유로 전쟁에 휘말려 쓰라린 상흔을 떠안게 된 인간 개인에 대한 이야기가 보이기 시작한다.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다. 그동안은 거창한 담론의 그늘에 묻혀 보이지 않았고, 누구 하나 나서서 바로 보려 하지 않았던 존재들에 대해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 군경에 의해 숨져간 사람들이나 전쟁 이후에 희생되어 간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조사 작업을 민간 단체들이 나서서 수행하고 있고, 정부도 당시 어머니 얼굴 한번 다시 보지 못하고 쓰러져 간 수많은 젊은이들의 유해 복구 작업을 꾸준히 해오고 있다. '전쟁'과 '국가'라는 거대 담론에서 벗어나, 그동안 홀대 받아왔던 인간을 다시 보게 되는 희망적인 변화다.

ⓒ 권기봉
이러한 움직임의 영향일까? 좀더 여유를 갖고 한국전쟁이라는 역사 사건을 접하게 되면서 자칫 '전쟁은 끝났다'고 오해할 수도 여지도 함께 커져가고 있는 듯하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전쟁을 잊었는지도 모른다. 전쟁이라는 것은 그저 할머니 무릎을 베고 듣는 옛날 이야기나 용산 전쟁기념관에나 가야 어렴풋하게나마 접할 수 있는 흘러간 역사에 지나지 않다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는 얘기다. 그러나 천만부당한 말씀이다. 그 명확한 증거를 경기도 파주에 가면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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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전쟁, 북한군-중국군 묘지에 가다

햇살이 따갑다. 곧게 뻗은 자유로를 내달리는 차창 밖으로 임진강이 보인다. 인간의 접근이 제한되어 오히려 깨끗한 임진강. 임진강과 함께 달리는 철책과 경계의 눈을 떼지 않는 초소 경계병을 지나친 차는 경기도 파평면에 닿는다.

ⓒ 권기봉
어디서 많이 본 듯한 길이며 가로수, 길가의 상점들이다. 그랬다. 불과 두세 달 전까지만 해도 지루한 육군 병장 6개월을 채우고 있을 무렵, 육중한 전차의 포탑에 올라 무수히 지나 다녔던 길이었다. 그땐 그렇게 지겹도록 길고 지루했던 길을, 지금은 창문을 열고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달리고 있는 것이다.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답곡리 산 56번지. 조성 당시 '적군 묘지'로 불리다가 '북괴군-중공군 묘지'를 거쳐, 1999년부터 '북한군-중국군 묘지'로 불리게 된 한 묘지 앞에 섰다. 지난 1996년 5월 조성된 옛 묘지와 2000년 만들어진 새 묘지가 가깝게 조성되어 있는 이 묘지는, 3200여 평의 규모에 173묘, 201구의 시신이 묻혀 있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여기 묻혀 있는 이들은 북한 군인과 중국 군인으로, 이 묘지 자체가 군사 시설에 해당되어 무단 출입과 사진 촬영이 금지된, 아직 일반에게는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시설이다.

누가 묻혀 있는지 자세히 살펴볼 일이다. 대부분 '무명인'이라는 표지목이 꽂혀 있지만, 간혹 계급과 이름이 쓰여 있는 경우도 볼 수 있다. 한국전쟁 당시 사망한 북한 군인과 중국 군인도 있지만, 이후에 사망한 이들도 여기 묻혀 있다.

한국전쟁 때 죽은 북한 군인이나 중국 군인이라면 모를까 그 이후에 사망한 이들도 묻혀 있다? 이것이 바로 그 지루했던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명확한 증거다.

지난 1968년 김신조 등 일단의 무장 군인들이 청와대를 습격하려 휴전선을 넘었던 1.21사태가 있다. 당시 사살된 30명과 1987년 11월 29일 대한항공 858편 707기를 폭파했던 북한인 1명, 1998년 12월 17일 여수 앞바다로 침투하다 격침된 북한 반 잠수정 사건으로 여기 묻힌 북한 군인이 6명, 동해안 무장 군인 1명 등 한국전쟁 이후에도 적잖은 북한 군인들이 남한 땅에 뼈를 묻었다.

▲ 더 이상 이곳이 묘지로 채워지지 않기를.
ⓒ 권기봉
그런데 특이하게도 모든 무덤들이 북쪽을 보고 있다. 비룡부대 공보장교 김형규 중위는 이렇게 설명한다.

"그들의 고향이 북한이니 인도적인 차원에서 북쪽으로 바라보게 한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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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북쪽을 바라보고 있는 묘지들, 이들은 왜 여기에 묻혔나

한국전쟁 당시 온 한반도가 전쟁터였던 만큼 원래 북한군을 묻어둔 묘지는 전국에 널려 있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후 북한과 미국간에 유해 송환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되면서 우리나라도 제네바 협약 정신에 따라 한 곳에 이장했다. 나중에 남북간에 유해 인도 협정이 맺어지면 빨리 인도할 수 있게끔 준비하는 차원에서 파주시 적성면 일대에 묘지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 인도 협정이라는 것은 왜 아직까지 맺어지지 못한 것이고, 시도는 없었을까?

▲ 더 이상 이 구덩이가 메워질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 권기봉
"제네바 협정에 따라 여러 차례 송환해 가라고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남한 땅에 북한 군인을 침투시켰다는 것 자체를 북에서는 인정을 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인정하게 되면 정치적으로 문제가 커질 수 있을 테니까요. 그래서 인도할 수 없었던 겁니다."

옛 묘역을 살펴보고 새 묘역에 올랐다. 옛 묘역에 비해 면적은 넓어 보이지만 실제 무덤은 몇 되지 않아 보인다. 그런데 놀랍게도 봉분들 옆에 마치 더 묻을 시신이 있는 것처럼 여러 개의 구덩이가 파여 있었다. 근래에 더 묻힐 군인들이 있냐고 물었다.

"아, 그거요? 더 묻을 시신이 있는 것은 아니고, 이전에 다른 시신들을 묻을 때 유골 분리가 안 되는 경우 합장을 하는 바람에 남게 된 구덩이입니다."

그래, 바로 이 상태에서 더 묻힐 북한 군인이 없는 상황이었으면 좋겠다. 휴전선을 넘을 때 서로의 환대까지는 받지 않더라도, 지극히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국경을 넘지 않아도 되는 상황, 그런 상황이 어서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던 순간이었다.

전쟁이 끝나지 않았음을 말하는 곳에서 찾는 역설적 희망

1953년 당시 사실 양측이 맺었던 것은 '종전(終戰)' 협정이 아닌 '정전(停戰)' 협정이었다. 즉 끝나지 않은 전쟁, 그리고 잠깐의 휴지기. 헤이그 '육전 규칙(陸戰規則)'에서는 이를 두고 부분적인 혹은 일시적인 평화 상황이 아닌 당사자간의 합의에 의한 잠시 동안의 군사 행위 정지 상태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지금은, 말 그대로 길었던 싸움에 지친 두 아이가 서로간의 합의 하에 잠시나마 싸움을 중단했지만, 계속 노려보며 언제라도 주먹을 날릴 준비를 하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어느 한 녀석이 잽을 날리는 즉시 다른 녀석이 어퍼컷을 올려 부침으로써 다시 싸움이 시작될 수 있는 상황, 그 이상 이하도 아닌 아주 '뭣 같은 상황' 말이다.

▲ 살육과 파괴. 그러나 꽃과 희망!
ⓒ 권기봉
북한군-중국군 묘지를 둘러보면서 아직 한국전쟁이 끝나지 않았음을 보았지만, 일견 희망 섞인 기대도 발견할 수 있었다.

'북괴' 혹은 '괴뢰 도당'이라고 불렀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북한과 북한군을 부르는 명칭 면에서도 이성을 찾아가고 있는 동시에, 국가나 체제를 떠나 한 인간 개인에 대한 인도적인 배려가 가능한 시대가 오고 있다는 것. 그것은 적잖은 희망 아닐까? 전쟁이 끝나지 않았음을 증명하고 있는 곳에서 찾는 역설적인 희망 말이다.

그동안 "잊지 말자, 6.25!"는 있었지만 "기억하자, 7.27!"은 없던 터. 정전협정이 비록 평화협정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지언정 서로 잠시 떨어져 이성을 찾을 수 있었다는 면에서 그 의의를 찾고 싶다.

북한군-중국군 묘지가 비록 한국전쟁과 그 이후의 북한 군인 및 중국 군인을 묻은 곳이라고는 하나, 그 속에서 인간 사랑에 대한 보편적인 감정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 면에 그 중요성이 있다.

한때는 서로에 대한 거스를 수 없는 증오 때문에, 잠시나마 야만의 상황을 종식시키자는 정전협정을 맺는 당일까지도 포격과 총격을 멈추지 않았던 우리. 비극은 3년간의 피비린내 진동하는 전쟁 그리고 이후 전쟁도 아니고 평화라고도 할 수 없는 50년이면 족하지 않을까.

이제 서로에 대한 배타와 멸시보다는 인간에 대한 보편적인 사랑에서 출발하는 관용과 이해를 갖고 경쟁하자고 말하고 싶다.

초토(焦土)의 시8 – <적군 묘지 앞에서>
구상 作

오호, 여기 줄지어 누웠는 넋들은
눈도 감지 못하였겠고나.

어제까지 너희의 목숨을 겨눠
방아쇠를 당기던 우리의 그 손으로
썩어 문드러진 살덩이와 뼈를 추려
그래도 양지바른 드메를 골라
고이 파묻어 떼마저 입혔거니

죽음은 이렇듯 미움보다, 사랑보다도
더 너그러운 것이로다.

이 곳서 나와 너희의 넋들이
돌아가야 할 고향 땅은 삼십(三十) 리면
가루 막히고
무주 공산(無主空山)의 적막만이
천만 근 나의 가슴을 억누르는데

살아서는 너희가 나와
미움으로 맺혔건만
이제는 오히려 너희의
풀지 못한 원한이 나의
바램 속에 깃들여 있도다.

손에 닿을 듯한 봄 하늘에
구름은 무심히도
북(北)으로 흘러 가고

어디서 울려 오는 포성 몇 발
나는 그만 이 은원(恩怨)의 무덤 앞에
목놓아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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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기억 저편에 존재하는 근현대 문화유산을 찾아 발걸음을 떼고 있습니다. 저서로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알마, 2008), <다시, 서울을 걷다>(알마, 2012), <권기봉의 도시산책>(알마, 2015)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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