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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비 서쪽 측면. 지는 해의 따뜻한 빛살이 측면 전면 창을 통해 들어온다.
로비 서쪽 측면. 지는 해의 따뜻한 빛살이 측면 전면 창을 통해 들어온다. ⓒ 박태신
조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된 조명은 규칙적으로 박혀 있는 전등이 아니라 하늘에서 선사된 태양광입니다. 오후 다섯 시쯤 태양이 서서히 기울어지는 시간, 동쪽 유리벽으로부터 태양광이 직진하여 들어옵니다. 대리석 바닥에 또 다른 태양이 생겨 빛을 더합니다.

또 다른 조명의 묘미가 있지요. 천장 기둥을 보면 약간씩 기울어진 채로 매달려 있는 원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원판 면의 수직인 곳에 어김없이 조명등이 있고요. 바로 반사판입니다. 하나에 200만 원 하는 이 반사경은 등에서 나온 빛을 반사하여 바닥에 두 세 배의 빛으로 늘려 보냅니다. 인공 조명의 양을 줄일 수 있는 아주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3층에서 자세히 보면 마치 벌집 모양으로 자잘한 거울이 연이어 붙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벽체 이외에는 기둥을 가능한 한 없앴다는 것이 이 미술관의 또 하나의 특징입니다. 파사드 안쪽의 기둥은 로비 벽 쪽으로 들어가 있습니다. 중심 기둥도 가장자리로 몰려 있어 로비 한가운데는 넓게 비어 있습니다. 2층으로 올라가는 중앙 계단는 뒤쪽으로 물러나 있습니다. 2층에서 3층으로 올라가는 간이 나무 계단은 벽에 박혀 있어 떠 있는 느낌이 듭니다.

미술관 입구의 안과 밖을 같이 돌아보고 가면, 거푸집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거푸집 겉모습은 투박하기 짝이 없어도 그 안은 순수한 조형물이 들어있지요. 시립미술관 파사드(건물 전면부)를 밖에서 보면 20년대 석조물이 전면을 감싸고 있어 옛날 건물 같지만, 안은 미래의 얼굴을 하고 있으니까요.

안쪽에서 창을 통해 밖을 내다봅니다. 미래에서 과거를 내다보는 것 같습니다. 또 밖에서 좀 떨어진 곳에서 창을 통해 안을 봅니다. 건물 안은 외부의 벽과 같은 고답적인 세상일 것 같군요. 안에서만 지내는 이는 밖의 세상도 안과 같으리라 여길 것입니다. 밖에서만 지내는 이는 안의 세상도 밖의 것과 같으리라 여길 것입니다. 아니면 이렇게도 말할 수 있겠네요. 안에서는 밖을 그러니까 과거를, 밖에서는 안을 그러니까 미래를 그리워 한다고요. 출입구 한가운데는 그러니까 현재가 되는군요.

파사드 안쪽 모습과 유리로 된 천장. 천장 기둥에 반사판이 있고, 그 아래 벽 기둥에 조명등이 있다. 조명등의 빛은 반사판을 거쳐 바닥으로 반사된다.  천장 밖으로 1920년대에 지어진 파사드의 일부가 보인다. 과거와 미래를 같이 보는 것 같다.
파사드 안쪽 모습과 유리로 된 천장. 천장 기둥에 반사판이 있고, 그 아래 벽 기둥에 조명등이 있다. 조명등의 빛은 반사판을 거쳐 바닥으로 반사된다. 천장 밖으로 1920년대에 지어진 파사드의 일부가 보인다. 과거와 미래를 같이 보는 것 같다. ⓒ 박태신
1층 갤러리를 들릅니다. 다양한 미술 상품들이 저마다의 품격을 지니고 자리잡고 있습니다. 요즘 책으로도 많이 소개되어 있는 클림프의 아름다운 그림들을 넘겨봅니다. 아름다운 여인상에 눈이 갑니다. 또 몇 십만 원 하는 보(예전에 식탁보나 받침으로 쓰이던 것)의 은은한 색의 배열을 봅니다. 기울어진 모양에다 다양한 크기의 사각형이 어슷어슷하게 배치된 아름다운 '작품'입니다.

조각가 최종태의 상품도 있습니다. 십자가, 예수상, 성모상, 소녀상은 성물이면서 작품이기도 합니다만, 이런 갤러리에 상품으로 꼭 비치되어 있습니다. 이 분의 소녀상의 약간 옆으로 고개 기울인 얼굴은 트레이드 마크라 할 수 있습니다. 겸손과 은은함과 여림을 나타내는 기울어짐이 이 미술관의 구조와 매치가 됩니다.

갤러리의 상품들은 미술이 동떨어진 세계의 것이 아니라 일상에 녹아 있는 것임을 증명합니다. 그 값이 비싼 이유는 재료와 수공업적인 측면에다, 하나의 작품으로 탄생하는 동안 작가의 열의가 녹아들어 갔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마도 창작품과 아류 작품의 차이가 이런 점에서 드러날 것입니다. 미술의 갖가지 기법을 형상화한 아름다운 '상품'들이 가득 들어 있는 이 곳은 돈의 개념과 무관할 수 있다면 온갖 아이디어의, 창의성의, 응용의 집합체입니다.

3층에는 카페테리아가 있습니다. 아담하고 예쁜 곳입니다. 몇 사람이 앉아 토론을 하고 있습니다. 문화 토론하기에 이만한 곳도 없겠지요. 창쪽으로는 간이 탁자와 의자를 일렬로 늘어 놓고 휴게실로 이용하게 했습니다. 간소하게 마련해 놓았지만 창의 분위기와 참 잘 어울립니다. 창 밖으로 멀리 덕수궁 안의 석조 건물들이 보입니다. 이 휴게실 안쪽의 난간 밑으로 1층이 내려다 보입니다. 지난번 소개한 제 5전시실 옆에 자리잡은 카페테리아와 휴게실 역시 공중에 떠 있는 느낌을 지울 수 없네요. 어떤 이에게는 약간 현기증이 들 수도 있고요.

3층의 휴게실. 소박한 분위기의 탁자와 의자가 창과 잘 어울린다. 창 밖으로 덕수궁 안 건물을 볼 수 있다. 난간 아래로 1층이 내려다보인다.
3층의 휴게실. 소박한 분위기의 탁자와 의자가 창과 잘 어울린다. 창 밖으로 덕수궁 안 건물을 볼 수 있다. 난간 아래로 1층이 내려다보인다. ⓒ 박태신
해가 질 무렵, 풍부한 창이 있어 행복한 건물, 시립미술관을 나옵니다. 내리막으로 된 입구 아래로 광장 같은 정동 사거리가 보입니다. 그 사거리 중앙에 작은 무대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곳에서 고등학생인 듯한 아이들이 스태프의 지시를 받으며 음악에 맞춰 댄스를 찍고 있습니다(이번 7월에 갔을 때는 음악 분수를 볼 수 있었습니다). 시립 미술관이 생기기 전에는 보기 쉽지 않은 모습이었습니다. 문화의 건물이, 시설물이 점점 삭막했던 곳을 점령해 나가는 듯합니다. 전에 말한 김화영 교수의 말이 실감납니다.

이들도 일종의 문화 게릴라일지도 모릅니다. 전선에 나서지는 못하더라도 아직도 척박한 문화 환경에서 게릴라처럼 행동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들은 자기들만이 누릴 수 있는 문화 공간과 환경을 위해서 싸우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사실은 우리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잠재되어 있는 자유로움과 표현의 욕구가 스스럼없이 발휘되는 세상을 위해 그렇게 분투하고 있는 것일 것입니다. 차도와 인도 사이에 턱이 없는 이곳 정동의 길거리처럼 문화와 현실 삶이 평등한 세상을 고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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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어 번역가이자, 산문 쓰기를 즐기는 자칭 낭만주의자입니다. ‘오마이뉴스’에 여행, 책 소개, 전시 평 등의 글을 썼습니다. 『보따니스트』 등 다섯 권의 번역서가 있고, 다음 ‘브런치’ 작가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https://brunch.co.kr/@brunoclou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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