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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처용이 있는 풍경>
책 <처용이 있는 풍경> ⓒ 대원사
"깃털 같은 가벼움의 시대에, 다시 <삼국유사>를 들게 되면서 예전에 거부 반응을 보였던 신기한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느끼고 나는 적이 놀랐다. <삼국유사>가 역사책이라기보다 이야기책쯤으로 받아들여지면서 그 속에서 사랑도 읽고, 이별도 읽고, 의리도 읽고 심지어는 엽기까지도 읽었던 것이다."

"나는 모르는 사이에 시간을 거슬러 천 몇 백 년 전의 시대로 빠져 들어가고 있었고, 거기에서 어머니의 탯속이기나 하듯 아늑함과 포근함을 느끼곤 했다. 우리가 <삼국유사>를 읽음으로써 가 닿게 되는 그곳. 그곳은 연어들이 수만 리 바닷길을 헤어 가서 회귀하는 모천(母川) 같은 데가 아닐까?"


우리 모두의 마음 속에는 자신이 탄생하기 이전 세계에 대한 궁금증이 자리잡고 있다. '내가 태어나기 이전의 세상은 어떠했을까? 천 년 전에는? 더 오래 전 내 할머니 할아버지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하는 의문은 자기가 속한 공동체의 근원에 대한 의문이다.

이러한 의문들을 제기함으로써 우리는 자신이 포함된 공동체의 과거 역사에 대한 탐구를 시작한다. 그리고 그 역사적 가설들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판명하고, 상상력을 동원하여 추정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이 속한 뿌리의 삶을 기억하려고 노력한다.

<삼국유사>는 그런 측면에서 천 몇 백 년 전 우리네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책이다. 이 책이 이와 같은 소중한 가치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해하기 어렵다거나 말도 안 되는 환상적 이야기가 많다는 이유로 대중들로부터 외면을 당해 왔다.

이 책 <처용이 있는 풍경>은 <삼국유사>를 이야기하면서 경주에 산재한 유적지들을 함께 이야기한다. 그러함으로써 옛날 옛적 이야기를 실제 존재하는 유적에 연결시켜 그 사실성을 증명하는 것이다. 마치 전설이 그 증거물을 통해 실제 있었던 일이라는 사실성을 부각시키려고 노력하듯이….

저자는 폐허가 된 황룡사 터, 부서진 삼층 석탑 등을 보면서, 신라 시대의 문화를 거슬러 올라간다. 그의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는 탐험에 있어 힌트 역할을 하는 것은 바로 <삼국유사>에 실린 이야기들이다. 실제 유물과 이야기를 조화롭게 엮어서 신라의 모습을 재현해 낸다는 점이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이다.

장항리 절터 동탑 탑신부에 새겨진 도깨비 모양의 문고리를 보면서, 저자는 <삼국유사>에 실린 '도화녀 비형랑' 이야기를 언급한다.

"비형은 밤마다 서천가에 나가서 도깨비들과 놀아, 진평왕이 비형에게 귀신들을 부려 다리를 놓으라 하니 도깨비들을 불러 하룻밤만에 다리를 놓았다. 왕이 또 도깨비 중에 쓸만한 놈을 추천하라 하여 길달이라는 도깨비를 데려와서 쓰다가 그를 임종이라는 신하에게 주었다. 임종이 길달을 부려서 흥륜사의 다락문을 짓고 길달은 밤마다 그 위에 올라가서 잤다고 한다."

도깨비에 대한 설화적 믿음이 불교 신앙과 혼재되어 있었던 신라 시대 모습을 잘 보여주는 구절이다. 그래서 부처의 몸을 상징하는 탑의 문에도 도깨비 모양이 장식되어 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도깨비 이야기는 서양의 요정 이야기처럼 신비스러운 존재로서 짓궂은 장난도 치지만 한편으로는 좋은 일도 하는 마법의 대상으로 존재한다.

저자는 경주 안강읍 육통리 능골 마을의 흥덕왕릉을 찾아가서는 흥덕왕의 지극했던 왕비 사랑이 담긴 <삼국유사>의 이야기를 떠올린다.

"제 42대 흥덕대왕이 보력 2년 병오(826)에 즉위하자 얼마 안 되어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신하가 앵무새 한 쌍을 가져 왔는데 오래지 않아 암놈은 죽고 홀로 된 수놈이 늘 구슬프게 울어댔다. 왕이 사람을 시켜 거울을 그 앞에 걸도록 했더니 새가 거울 속 그림자를 보고 제 짝을 만난 줄 알고 거울을 쪼아보았다가 제 그림자인 줄을 알고는 슬프게 울다가 죽었다. 왕이 노래를 지었다 하나 사설을 알 수가 없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흥덕왕은 자신보다 일찍 죽은 왕비를 잊지 못하고 슬퍼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신하들이 글을 올려 왕비를 새로 맞을 것을 청하였으나 "외짝새도 짝을 잃은 슬픔이 있거늘 하물며 좋은 배필을 잃고서 어찌 차마 무정하게 재취를 할까 보냐"라고 말하며 거절했다고 한다.

이처럼 애절한 사연을 담고 있는 흥덕왕릉은 현재 존재하는 경주의 수많은 왕릉 중에서 몇 안 되는 그 주인이 밝혀진 능이라고 한다. 왕릉 주변에 서 있는 석상들의 모습은 과거 흥덕왕의 아름다운 사랑을 담고 세월을 견뎌 내어 더더욱 애틋한 마음이 든다.

이처럼 애틋한 이야기가 담긴 <삼국유사> 책을 들고 경주를 꼼꼼히 살폈던 저자는 유적과 이야기를 조화롭게 잘 엮어 나갔다. 실제 유물들의 사진과 삼국유사에 실린 이야기, 그리고 저자의 견해가 잘 어우러져서, 삼국의 역사와 신라 역사가 새롭게 부각된다.

그 새로운 시각을 통해 우리 선조들의 삶을 가까이 살피고, 그 속에 담긴 의미를 밝힌다는 점에서 이 책은 가치가 있다. 과거의 역사는 단순히 땅 속에 묻혀 있는 진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끄집어 올려 내어져 우리 삶 속에 가까이 다가왔을 때에, 과거 역사는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더 많은 의미를 던져줄 것이다.

처용이 있는 풍경 - 삼국유사 사진기행

김대식 글, 사진, 대원사(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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