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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대중음악계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어느 뮤지션에게서 자그마한 재능이라도 보일라치면 언론에서 앞다퉈 '천재'라는 수식을 부여한다는 점이다.

천재가 넘쳐나고 하루가 다르게 기가막힌 음악이 쏟아져나오던 좋았던 시절에는 이렇지 않았다. 너도 천재이고 쟤도 천재인데 딱히 누굴 찍어 천재라 부를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음악적 샘물은 고갈되고 평범한 재능만이 넘쳐나는 시대이다. 에이브릴 라빈이나 노라 존스 정도에 다들 침을 질질 흘린다면 이것은 '옛날이 좋았다'는 반증에 다름 아니다.

물론 프랭클린 아담스의 "좋았던 과거에 가장 큰 기여를 하는 것은 나쁜 기억력"이라는 말을 들먹이며 반론할 사람도 있겠지만….

미셸 브란치가 'Everywhere'를 들고 나타났을 때 역시 찬사와 칭송은 개구리 비처럼 쏟아져내렸다. 필자는 그녀에 대한 찬양이 상당부분 '미모'에 기인한 것이라는 생각도 하지만, 능력있는 여성 가수인 것만큼은 틀림없다.

간간히 셰릴 크로우나 몇몇 선배 여가수들의 자취가 스쳐가긴 하지만, 아무튼 상당히 감각있는 작곡 능력과 능글맞을 정도의 보컬 능력을 지닌 인물이 미셸 브란치다.

다만 지나치게 과다한 찬사가 쏟아지고 기대를 한 몸에 받는 관계로, 두 번째 음반 작업이 몹시 부담스럽겠다는 생각은 해볼만 했다. 또한 능력있는 여가수인 것은 인정해도 매스컴이 저렇게 떠들어댈 만큼 절대적인 능력의 소유자인가 하는 의문 역시 가질 법 했다.

좋다. 문제는 두 번째 음반이다. 데뷔작에서 펼쳐놓은 가능성과 재능을 어떤 방식으로 다듬어냈는가 하는 것이다. 혹시 감각적인 송 앤 라이팅과 보컬 역량을 최대한 살리면서, 실험적이고 선험적인 새로운 음악의 영역을 구축해냈다면 나역시도 당장에 무릎꿇고 '오, 미셸'하고 매달릴 것이다.

물론 데뷔작에서 대박을 터뜨린 미모의 여가수가 그 따위 모험을 하지는 않는다. 이 음반 'Hotel Paper'는 몹시 점잖고, 적은 보폭으로 움직인다. 쉬이 말해, 안전빵 전략을 노리는 음반이란 얘기다.

앨라니스 모리셋이 '요즘 이런 곡이 왜 안 써질까'하고 땅을 칠 법한 'Are You Happy Now?'로 음반은 시작된다. 제인스 어딕션의 데이브 나바로가 기타 세션을 맡았지만 그 특유의 연주는 팝-록 성향의 곡에 묻혀 버린 듯하고, 다만 미셸 브란치의 능란한 보컬이 두드러진다.

버스(Verse)에서의 섬세함, 상대적으로 후렴에서의 거침없이 내지르는 창법이 고저장단이 분명한 멜로디와 어우러져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도 한다.

인간관계에 대한 상념을 담은 노랫말에 대해서는 아마도 '미셸 브란치의 성숙을 드러낸다'고 평하면 될 듯하다. 물론 그 성숙이란 것은 다른 말로 하면 '답보'를 의미하기도 하겠지만.

이어지는 'Find My Way Back' 역시 잘 계산된 멜로디라인이 부각되며, 'Empty Handed'는 통기타를 잡은 미셸 브란치의 데뷔작 커버를 떠올리게 한다. 어쿠스틱 기타 연주는 안정감을 대변하며, 그만큼 능수능란한 보컬의 표현력 역시 모난 곳 없다. 특히 후반부에 수면 위로 올라오는 오케스트레이션은 점강법이랄까, 곡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수놓는다.

이것은 전형적인 미국 팝의 제작 공식이며, 'Hotel Paper'의 노래들 대부분이 이 공식에 자연스럽게 순응한다. 중간 템포에 정형화된 리듬, 간간히 현악 등이 삽입되는 안전 제일주의 편곡. 매끈한 프로듀싱은 음반이 팝 음반임을 보여주려는 듯 보컬 파트를 도드라지게 강조했고, 한편 음반이 록 음반임도 보여주려는 듯 기타 사운드도 그만치 강조해 놓았다.

미셸의 작곡 역시 훅이 분명하고 미국 팝 음악의 공식을 충실히 따른다. 그럼에도 곡들이 클리셰하게 보이지 않는 것은 그녀의 능구렁이 같은 보컬 때문일 것이다. 때론 날카롭게 내지르며, 또 때론 부드럽게 속삭이며, 탁성과 미성을 자유로이 오가는 보컬 능력은 뛰어나다.

이런 장점은 'Breathe'나, 섬세한 표현력이 요구되는 발라드 'One Of These Days', 음표가 살갑게 붙어있어 숨찰 듯한 'Love Me Like That' 등에서 잘 드러난다.

물론 이런 장점은 음반 후반부로 갈수록 힘이 부치는 듯한 인상을 주는데, 곡들이 대개 비슷비슷하고 완성도도 고만고만한 것이 이유라면 이유이겠다.

호의적인 평자라면 이것 역시 '성숙'이란 단어로 치장할테지만, 그 성숙이란 것은 너무도 조심스럽고 소심한, 고작 한발짝 내딛은 것에 불과한 정도이다. 게다가 새로울 것도 없으니 '숙성'이 더 어울리는 표현 아닐까.

때문에 음반 뒷부분에 보너스처럼 삽입된 'Everywhere'와 'Game of Love'가 평범하게 들리는 것은, 개별 싱글의 완성도는 출중하되 음반으로서의 밀도는 떨어지는 '주류 팝'의 문제와도 밀접한 사안이다.

1집 최고의 히트송과 그래미 수상곡이 2집 음반에서는 B-side 곡처럼 들린다? 미셸 브란치가 일군 발전의 폭이 얼마나 작고 좁다란 것인지 확인시켜주는 부분이다.

그녀는 좀 더 대담하게 걸음을 내딛어야 한다. 안전한 주류의 공식에 몸을 맡기기보다는, 하고 싶은 대로 나가고 싶은 대로 움직여야 한다. 밍밍하고 새로울 것 없는 성숙보다는 혁신과 진보를 선택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녀만큼의 재능을 지닌 여성을 수 없이 보아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들이 안전하고 평탄한 길을 택했다가 소리소문없이 잊혀지는 모습 또한 봐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옛날이 좋았다는 말이 나오지 않게. "좋았던 과거에 가장 큰 기여를 하는 것은 나쁜 기억력"이라는 말이 '참'이 되게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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