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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를 맞으며 성스러운 남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비를 맞으며 성스러운 남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 이종원
총책임을 맡고 있는 내 역할로 볼 때 가장 걱정되는 부분이 안전문제다. '혹시 회원 중 다치면 어떡하지? 무사히 행사를 마칠 수 있을까?' 내내 이런 걱정들이 마음 속에 도사리고 있었다. 그만큼 자리가 차지하는 부담이 크다.

몸이 불편한 '푸른잔디'(지체장애 3급)가 경주답사 신청했을 때 솔직히 걱정이 앞섰다. 일반인도 오르기 힘든 바위산을 장애인이 오른다는 것은 몇 배나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인이 강력히 원했고, 나 또한 그가 고귀한 남산 땅을 밟고 나름대로 용기를 얻어가는 모습을 보고 싶어 허락했다.

남산답사 3일 전, 푸른 잔디(닉네임)가 걱정이 되었는지 아래의 글을 게시판에 올렸다.

'경주 남산의 등산로가 어찌 되어 있는지 궁금하네요. 남해금산 같이 그렇게 넓은 길이 아니더라도 두세 사람 정도는 갈 수 있는 길이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언덕 같은 곳이 있는지도 알고 싶구요. 남해 팸투어 시간 동안 최대로 여러분과 함께 움직여 보았지만 저는 몸이 멀쩡합니다. 하하하'

그의 글을 보고 많은 회원들이 '푸른잔디는 꼭 할 수 있어' 등의 힘찬 격려 글을 올렸다. 그에 고무되었는지 푸른 잔디는 다음과 같은 출사표를 던졌다. 얼마나 비장한 각오인가?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되더라도 한번 해보겠습니다. 제발 비만 안 오기를 바라겠습니다.

폭우 속에서도 가이드의 설명에 귀를 기울입니다.
폭우 속에서도 가이드의 설명에 귀를 기울입니다. ⓒ 이종원
7월6일 남산 답사일.

그가 그토록 원치 않았던 비가 경주하늘에서 떨어졌다. 그것도 장대비다. 나는 그저 하늘을 바라보며 원망할 뿐이었다.

회원들이 통일전 주차장으로 속속 모여든다. 그 가운데 환한 미소를 머금고 나타난 '푸른잔디'가 누구보다 눈에 띈다. 쏟아지는 비를 무릅쓰고 나타난 푸른잔디가 대견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이 세찬 비에도 모습을 나타낸 그가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1조에 속했고, 그는 2조에 배정되었다. 회원인 반야낙조와 스파이크에게 무언의 도움을 요청하고 헤어졌다. 뚜벅뚜벅 걷는 그의 뒷모습을 향해 파이팅을 외쳤다. 이제 우린 5시간 후에나 만날 수 있다.

새로 복원된 신라석탑
새로 복원된 신라석탑 ⓒ 이종원
원래 경주 동남산 코스는 다른 코스보다 경사가 가파르다. 더구나 비까지 내려서 미끄럽고, 잘못하면 진흙탕에 빠지기 쉽다. 개울을 건너야 하고 잘못 바위를 디디면 그냥 미끄러진다. 여행을 자주 다니는 나에게도 힘겹게 느껴지는 산행이었다. 바위를 타면서 얼마나 엉덩방아를 찧었는지 모른다.

점심을 먹고 있는 푸른잔디님
점심을 먹고 있는 푸른잔디님 ⓒ 이종원
드디어 정상인 금호정에 도착했다. 회원들과 점심을 먹고, 바위턱에 자리잡고 앉아 운무가 빠진 남산을 감상하고 있었다. 그제서야 푸른잔디가 생각이 났다.

'이렇게 힘든 산행인데. 일찌감치 포기하고 나이 드신 어른들과 하산했겠지.'

내 마음은 벌써 이렇게 단정지어 버렸다.

애뜻한 전설을 지닌 남산 부석
애뜻한 전설을 지닌 남산 부석 ⓒ 이종원
계곡을 타고 내려오면서 마음이 혼란스럽다. 옆에 있는 청한 형님께 물어보았다.

"형님. 푸른잔디 그냥 하산했겠지요?"
"그럼 하산했겠지. 이런 폭우에 이 코스로 오르지 못했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진다. 폭우가 쏟아져 우린 일정을 중단하고 하산하기로 결정했다. 2조는 이미 하산하고 있는 중이란다.

드디어 그 많은 비를 맞으며 출발장소에 도착했다. 먼저 내려갔다는 2조가 아직까지 보이지 않았다. 중간에 내려온 사람이 있냐고 물었더니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한다. 세상에나, 그럼 푸른잔디는 지금 저 빗줄기 속에서 산행을 하고 있는 것이다.

걱정이 앞서 앉아 있을 수 없다. 이리저리 다니며 2조 일행을 초조히 기다렸다. 기다리기를 어언 30여분. 하나 둘씩 빗속을 가르며 도착했다. 오로지 나의 시선을 한 곳에 고정되었다. 유난히 굵은 장대비가 쏟아졌다. 그 사이로 뒤뚱뒤뚱 걸어오는 그를 발견했다. 그 옆에는 반야낙조와 스파이크가 금강역사처럼 호위하면서 말이다.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이 또 있을까?

가까이 다가가 따끈한 보리떡을 건네주었다. 퉁퉁 불어버린 그의 차가운 손이 그렇게 따뜻하게 느껴질 수 없었다. 바위에 긁힌 큰 상처가 손바닥에 훈장처럼 새겨져 있고, 나무가지에 긁힌 손등 자국이 내 가슴을 찔렀다.

캔 커피 하나 건네준다. '정말 수고했어. 그리고 고마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얼마나 힘든 사투를 벌였는지 상상할 수 있다.

힘차게 남산을 향해 포즈를 취해봅니다.
힘차게 남산을 향해 포즈를 취해봅니다. ⓒ 이종원
날씨 때문에 남산의 부처바위들을 보지 못해 아쉬울 수 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부처님과 함께 5시간을 넘게 산행을 하지 않았던가? 이보다 더 큰 축복이 또 있을까?

남산의 기암괴석 하나 하나가 이번 답사에 참여한 회원 얼굴이 아로 새겨져 있는 것이다. 그 중 가장 멋진 불상이 푸른 잔디인 것이고, 반야낙조와 스파이크인 것이다.

난 1조이기 때문에 그들이 얼마나 힘든 산행을 했는지 모른다. 서울 올라가는 버스 안에서 스파이크가 옆에 앉았다.

"푸른잔디와 함께 산행하느라고 힘들었지?"
"제 일생을 통해서 가장 짧은 코스를 가장 힘겹게 올랐던 것 같아요."

그 한마디에 더 이상 묻지 않았다. 5분 후 골아 떨어지는 스파이크 모습에 나는 또 한 분의 남산부처를 친견한 것이다.

앞으로 힘든 일이 내 앞에 가로막는다면 난 오늘 본 그림을 꺼내볼 것이다.

푸른잔디와 스파이크, 둘이 동갑입니다.'우리의 우정 변치 말자.'
푸른잔디와 스파이크, 둘이 동갑입니다.'우리의 우정 변치 말자.' ⓒ 이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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