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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파선사비
백파선사비 ⓒ 이재성
빗물고인 돌확
빗물고인 돌확 ⓒ 이재성
암각여래상
암각여래상 ⓒ 이재성











떨어진 나뭇잎 사이로 드러난 커다란 나무의 뿌리를 밟고 부도밭을 나와 선운사 경내로 들어섰다. 대웅전 뒤로 낮게 펼쳐졌으리라 생각했는데 동백 숲은 선운사를 둘러싸고 있다. 맑은 초록색의 반짝거리는 속살거림에 이끌려 동백 숲으로 올라가 보지만 말라버린 꽃잎 한 장 발견할 수 없다.

대웅전 앞 돌확은 빗물을 가득 담고 있다. 어디서 왔는지 하얗고 엷은 꽃잎도 몇 개 떠 있다. 내려다 보는 내 얼굴도 담아준다. 손을 담가보다. 얼굴을 찡그린다.

경내를 둘러 본 후 우리는 귀로만 듣던 물소리를 직접 보게 되는데 그 물빛이라는 것이 걷히지 않는 안개와 비에 젖은 나무의 그림자를 안고 시퍼렇게 꿈틀거리는 것이다. 솜털이 모두 빳빳이 일어서는 긴장감을 갖게 되는 그 길은 기이하고도 괴이하다.

선운사 가는 길
선운사 가는 길 ⓒ 이재성
그 길을 빨리 빠져 나와 좀 더 걷다보면 진흥왕이 말년에 왕위를 버리고 아내 도솔과 딸 중애를 데리고 들어와 수도 생활을 했다던 진흥굴이 나온다. 죄가 많아서 그런지, 너무 이른 시간 탓인지, 흐린 날씨 탓인지 나는 또 다시 섬뜩해진다. 그 버리기 힘든 권력과 부귀영화를 버리고 백제의 산 속에 불자로 돌아온 신라의 왕 이야기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진흥굴을 지나 우리가 칠송대암각여래상에 도착할 무렵에 햇살이 내리기 시작한다. 유월에 그 고운 햇살은 칠송대암각여래상 이마위로 쏟아져 내린다. 그 섬뜩한 귀기가 확 사라지는 순간이다. 40미터가 넘는 깍아 지른 암벽에 거의 입체감이 느껴지지않을 정도로 얕게 조각된 여래상은 투박하면서도 아주 씩씩해 보인다.이 여래상에는 동학운동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진다.

배꼽 부위에 감실이 있는데, 그 속에 신기한 비결(秘潔)이 들어 있어 그것이 세상에 나오는 날 한양이 망할 것이라는 유언비어가 널리 퍼지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했지만 거기에 벼락살이 들어 있다고 하여 감히 열어 볼 엄두를 내지 못하며 세월만 흘렀다.

1820년 전라감사 이서구(李書九)가 마애불의 서랍을 열었다가 갑자기 벼락이 치는 바람에 '이서구가 열어보다'라는 대목만 얼핏 보고 도로 넣었다고 한다. 그후 1892년 동학운동이 일어나기전 손화중(孫和中)이 서랍을 열어본다. 그러나 비결은 손화중이 어디론가 가지고 갔다고 하는데, 이후 행방을 알 수 없다. 단지 그 비결책이 정약용의 <목민심서>와 <경세유표>였다는 소문과 그냥 평범한 불경이었을 것이란 추측만 전할뿐이다.

옆으로 난 가파른 돌계단을 올라 도솔암에 이르렀다. 칠송대암각여래상의 뒤통수를 마주본다. 햇살이 따뜻하다. 잠깐 생각에 잠겨본다.

선운사, 이 절은 걷는 내내 물음표를 만들어 내는 절이다. 그 버리기 힘든 권력을 버리고 백제의 땅에 불자로 들어와 살았다는 신라 진흥왕 이야기가 그렇고, 백제에 땅에 태어나 <신라초>를 쓴 시인이 시에서 모든 것을 얻고도 정치적인 권력을 꿈꾸었다는 것이 그렇다. 그리고 꽃과 잎이 나뉘어 핀다는 석산화를 보는 가슴 또한 무심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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