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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산 아래 지석강변에 있는 영벽정.
연주산 아래 지석강변에 있는 영벽정.
영산강 상류인 화순군 지석강변에는 아름다운 강줄기를 따라 많은 정자가 있다.

영벽정, 송석정, 현학정, 부춘정 등 이들 정자는 주변 경치가 빼어나 소풍객의 발길이 잦은 곳이다.

영벽정을 찾은 관광객들.
영벽정을 찾은 관광객들.
능주면 관영리 연주산 아래에 있는 영벽정(映碧亭)은 규모도 큰데다 철따라 바뀌는 연주산의 운치를 즐기려는 사람들로 늘 북적거린다.

봄이 오면 연주산의 진달래가 지석강을 붉게 물들이고, 여름에는 강변을 따라 가지를 늘어뜨린 물버들의 녹음이 강물과 함께 흐른다.

영벽정의 봄놀이(映碧賞春)와 연주산의 풀피리(珠山樵笛)가 바로 능주팔경(綾州八景) 중 2경. 영벽정과 어우러진 연주산의 경치가 옛부터 능주의 절경으로 손꼽히는 곳이다.

강줄기를 따라 가지를 늘어뜨린 물버들.
강줄기를 따라 가지를 늘어뜨린 물버들.
강물에 드리워진 연주산의 봉우리와 정자의 그림자가 한 폭의 수채화를 연상케 한다. 강변에는 아름드리 물버들이 숱한 세월을 정자와 함께 한 듯 나뭇가지마다 파릇한 이끼가 끼었다.

물버들을 따라 강변을 걷다보면 끝자락에 정자가 자리하고 있다. 나무 계단을 타고 오르니 널찍한 마루를 만난다. 사방을 두른 난간에 걸터앉았다. 강 건너 연주산의 둥그런 능선들이 마치 구슬을 꿰놓은 듯 부드럽다.

영벽정 안 모습. 건너편에 철길이 보인다.
영벽정 안 모습. 건너편에 철길이 보인다.
정자 뒤로는 대나무 숲이 정자를 감싸 안으며 운치를 더한다. 남북을 가로지르는 철길은 정자와 어울릴 것 같지 않으면서도 색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시인묵객들이 이 곳에 올라 시를 읊고 시절을 노래하는 소리가 귓전에 들려오는 듯.

손영길(孫永吉)의 영벽정 중수운(重修韻)을 감상해 보자.

지석강에 드리워진 정자와 연주산의 그림자가 한폭의 수채화 같다.
지석강에 드리워진 정자와 연주산의 그림자가 한폭의 수채화 같다.
산빛과 잠긴 물이 층난(層欄)에 비치니
상쾌한 기운 황연히 노반(露盤)을 받음 같구려
남국에 연운(煙雲)은 기관(奇觀)을 이룬 것이요
서호에 보인 경물을 붓으로 그렸어라
병을 던진 그날에 활기운이 장하고
술을 들고 바람 임하니 술맛이 너그러워라
현판에 시문은 옛적 그대로 있는가
선적을 추모하니 배나 기쁘도다


1988년 영벽정 복원 모습.
1988년 영벽정 복원 모습.
영벽정은 팔작지붕에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된 2층 누각으로 화려함과 웅장함이 배어 있다. 문중이나 개인이 관리한 정자는 대개 단청을 하지 않은 것에 비해 영벽정은 화려하게 단청돼 있다. 건립의 주체가 관(官)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건립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김종직(1431~1492)과 양팽손(1488~1545)의 시문이 있어 조선 초기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1632년(인조 10년)에 능주 목사 정연(鄭沇)이 고쳤고 1872년(고종 9년) 불에 타버리자 이듬해인 1873년 능주 목사 한치조(韓致肇)가 다시 지었다.

도리에 새겨진 용의 화려하고 섬세한 문양.
도리에 새겨진 용의 화려하고 섬세한 문양.
그 뒤 중건과 보수를 거듭하다 1988년 해체 복원했다. 지금의 영벽정 현판은 능주 목사 한치조의 작품. 정자 옆에는 한치조의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와 중수기념비 등 3개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밑층은 원래 나무 기둥을 사용했으나 복원할 때 오랫동안 보존하기 위해 화강석 기둥으로 바꿨다.

향토사학자 오정섭(76·능주면 석고리)씨는 "영벽정은 능주의 문화와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중요한 문화유적입니다. 보호 관리를 지속적으로 해 후손에게 온전하게 물려주는 게 우리의 의무"라고 말한다.

능주면사무소 옆에 세워진 봉서루. 영벽정과 쌍벽을 이뤘다.
능주면사무소 옆에 세워진 봉서루. 영벽정과 쌍벽을 이뤘다.
정자 안에는 시인묵객들의 시문을 적은 8개의 편액이 걸려 있다. 기둥과 기둥을 이어주는 도리에는 용틀임을 하는 용의 화려하고 섬세한 문양을 새겼고 천정에는 연꽃 문양과 우물(井)장식으로 멋을 부렸다. 하지만 불가(佛家)의 상징인 연꽃이 어쩐지 정자에는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능주목사 한치조가 썼다는 '영벽정' 현판.
능주목사 한치조가 썼다는 '영벽정' 현판.
영벽정은 능주 면사무소 옆에 있는 봉서루(樓鳳棲)와 함께 빼어난 경관으로 쌍벽을 이뤘다. 봉서루의 달 구경(鳳棲翫月)은 능주 8경 중 제 1경이었다고 한다. 건물 규모나 모양새도 비슷하다. 봉서루도 96년 복원된 2층 누각으로 영벽정과 함께 밑층은 화강석 기둥을 사용했다.

영벽정은 정자(亭子)라기보다 누각(樓閣)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계단을 타고 오를 수 있도록 높은 곳에 세워져 있는데다 양반들의 연회장소로 이용되면서 비교적 규모가 크기 때문이다. 정자는 강변이나 빼어난 경치 주변에서 시인묵객들이 휴식을 취하는 장소로 사용돼 차이를 보인다.

1632년(인조 10)년 능주는 능성현이 인조(仁祖)의 어머니인 인헌왕후(仁獻王后) 능성구씨의 성향(姓鄕)이라 하여 능주목(綾州牧)으로 승격, 목사골이 됐다고 전한다. 능주가 주변 지역을 아우를 수 있는 지리적, 행정적 중심 지역이었음은 물론이다.

구슬을 꿰놓은 듯 부드러운 능선으로 이어진 연주산.
구슬을 꿰놓은 듯 부드러운 능선으로 이어진 연주산.
능주는 봉황, 대나무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주산(主山)도 비봉산(飛鳳山)이다. 봉황은 전설에 따르면, 대나무 열매(竹實)를 먹고산다고 알려졌는데 능주의 옛 이름도 죽수부리(竹樹夫里)라 불리기도 했다.

비봉산성을 비롯해 봉란대, 봉서루, 죽수서원, 죽수절제아문 등 능주 지명이나 문화유적에 봉(鳳)자나 죽(竹)자가 유난히 많은 것도 이런 연유다. 대나무에서 따온 죽수(竹樹)라는 별칭도 절의(節義)를 상징한다. 조선 전기이래 조광조 양팽손 최경회 등으로 이어지며 능주는 남도의 명향(名鄕)으로 이름을 떨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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