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엇! 경찰이 노숙자들을 두고 그냥 지나갑니다. 몇 번 흔들어 깨우더니 휘적휘적 자기 길을 갑니다.
엇! 경찰이 노숙자들을 두고 그냥 지나갑니다. 몇 번 흔들어 깨우더니 휘적휘적 자기 길을 갑니다. ⓒ 오마이뉴스 김영균
"돈!"
"…?"
"돈!"
"…?"


깡마르고 지저분한 손 하나가 내 눈앞에 불쑥 나타났습니다. 18일 오전 서울역. 기차 시간을 기다리며 역사 밖 광장 벤치에 앉아 있던 저는 느긋한 마음으로 담배를 꺼내들었습니다.

그날 아침 저는 대전으로 출장을 가던 길이었죠. 초여름 같은 날씨, 따가운 햇살을 피하려 나무그늘 벤치를 골라 앉아 막 여유를 즐기던 참이었습니다.

제 앞에 나타난 그 사람은 얇은 반팔 티셔츠 한 장에 헐렁한 푸른색 바지를 입고 있었습니다. 하늘을 향해 삐죽삐죽 솟은 머리카락은 언제 물을 만났는지도 모르게 이리저리 뭉쳐져 있고, 한쪽 뺨에는 검은 얼룩이 묻어 있었습니다. 행색으로 봐 한 눈에도 노숙자 같았습니다. 그런데 인상이 무척 험악합니다.

"돈!"
"…?"
"돈!"
"…?"

그와 저의 알 수 없는 선문답(?)이 한동안 계속됐습니다. 그는 몇 번 제 앞에서 단호한 어투로 "돈!"이라고 외치고는 휘적휘적 자기 길로 가더군요.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저는 제 머리를 쳤습니다.

그는 제게 일종의 구걸 행위를 했던 거였죠. 그런데 너무나 당당하게 손을 불쑥 내밀고는 "돈!"을 외치는 바람에 저는 미처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씁쓸하게 웃으며 막 담배를 입에 무는 순간, 이번에는 손 두 개가 코앞에 디밀어집니다. 고개를 들어보니, 이번에는 두 명입니다. 막 지나간 첫 번째 사람과 거의 다르지 않은 차림입니다.

"담배!"
"…?"
"담배!"
"…!"

그 중 한 사람이 짧게 끊어서 말하더군요. 이번 두 사람은 담배가 필요했던 모양입니다. 앞서 지나간 첫 번째 사람을 생각하면서, 저는 담배를 통째로 내밀었습니다. 그런데, 한 손은 거둬가는데 다른 손이 그대로 남아 있더라고요.

"돈!"

이쯤 되면 지갑을 꺼내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게 담배와 돈을 받은 두 사람은 '고맙다'는 말도 없이 너무 당당하게 다른 목표를 향해 이동했습니다.

경찰이 왔는데…, 깨우지도 않고 그냥 가네?

18일 오전, 출장길에 서울역에서 노숙자들을 만났습니다. 서울역광장 곳곳에는 잠을 청하거나 아침부터 소주잔을 기울이는 노숙자들이 있었습니다.
18일 오전, 출장길에 서울역에서 노숙자들을 만났습니다. 서울역광장 곳곳에는 잠을 청하거나 아침부터 소주잔을 기울이는 노숙자들이 있었습니다. ⓒ 오마이뉴스 김영균
약 5분 사이, 같은 경험을 두 번 겪고 나니 주변을 한 번 돌아볼 마음이 생겼습니다. 벤치에서 일어나 서울역 광장을 한바퀴 훑어보았죠. 여기저기 제가 만난 노숙자들과 같은 사람들이 비로소 눈에 띄었습니다.

2명의 노숙자는 나무그늘에서 햇살을 피하며 길게 늘어져 잠을 자고 있고, 다른 쪽 벤치에는 4명의 노숙자들이 아침부터 소주잔을 권커니 작커니 하고 있었습니다. 처음 광장에 들어설 땐 몰랐는데 주의 깊게 살펴보니 주위 사람들이 대부분 노숙자들입니다.

잠시 뒤, 경찰 한 명이 저쪽에서 걸어왔습니다. 그는 곧바로 제 왼쪽에 누워 있는 노숙자에게 다가갔습니다. 잠깐 흔들고, 이리저리 깨워보더니 그냥 버려두고 지나가더군요. 제 앞을 지나 다시 오른쪽에 누워 있는 이에게로 가서 고개를 숙이면서, 그이도 몇 번 흔들어보더니 멋쩍은 웃음을 지어보이고는 그냥 갔습니다.

'엇, 경찰이 깨우지도 않고 그냥 가네?'

저는 왜 경찰이 노숙자들을 그냥 내버려두고 가는지 잘 몰랐습니다. 그러나 미처 물어보기도 전에 그는 저만큼 멀어져버렸습니다. 노숙자들은 그대로 길거리를 점거하고는 단잠에 빠져 있고, 행인들은 그들을 멀찌감치 피해 종종 걸음을 치더군요.

이들이 일어난 건 서울역 직원들이 나타난 뒤였습니다. 모자에 정복을 차려입은 서울역사 직원들은 차례차례 노숙자들을 깨웠습니다. 단잠을 방해당한 한 노숙자는 험악한 소리도 해대지만, 직원들은 익숙한 듯 그들을 다독거려 보냈습니다.

'엇, 경찰도 어쩌지 못하는 사람들을 서울역사 직원들이 깨워?'

문득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경찰은 왜 노숙자들을 그냥 버려두는지, 최소한 노숙자들을 깨워서 밥 먹을 장소로라도 보내야 되는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직무유기가 아닌가? 마침 기차시간도 남았길래 서울역 직원 한 사람을 붙들고 그 연유를 물어봤습니다.

"구청직원들도 이발비, 목욕비만 줄 뿐…"
정부가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설 수 없나


서울역 직원들이 나타나야 비로소 노숙자들은 일어납니다.
서울역 직원들이 나타나야 비로소 노숙자들은 일어납니다. ⓒ 오마이뉴스 김영균
"경찰요? 경찰은 이 사람들을 어쩌지 못하죠. 이 사람들은 그냥 '노숙자'일 뿐이지 '범법자'는 아니거든요."

서울역 영업과에서 근무하는 장현문(46)씨는 3년째 서울역 앞에서 노숙자들을 만나고 있었습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노숙자들은 단지 '노숙'만 할 뿐 범법을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경찰로서는 어쩔 수가 없다는 말이었죠. 일단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이따금씩 구청에서 봉고차를 타고 와서 노숙자들을 깨우죠. 만약 본인이 원하는 경우에는 노숙자 관련 시설로 데려갑니다. 그러나 대부분 거부하는 경우가 많죠. 이 때문에 구청직원들도 이발비나 목욕값만 조금 주고는 돌아갈 뿐입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강제로 노숙자들을 통제해 보세요. 그러면 인권단체들이 몰려와서 항의합니다."

말하자면, 노숙자 본인이 원하지 않는다면 국가기관조차 어쩔 수 없다는 얘기죠. 당연한 얘깁니다. 노숙자들에게도 기본적인 인권은 보장돼야 합니다. 국가가 이를 침해할 때, 인권단체들이 나서는 것도 당연한 이치지요.

그러나 저는 노숙자들을 만난 그날 내내 정부가 '직무유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습니다. '정부는 비록 노숙자라 할지라도 인권을 보장한다'는, 무슨 거창한 민주주의적 가치를 지키는 듯하면서 이들을 그냥 내버려두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공무원인 경찰은 '인권 보장' 차원에서 이들을 못 본 체 지나치고, 또 다른 공무원인 구청직원들도 '인권 보장'을 명목으로 기껏 이발비, 목욕비를 던져 주고 갈 뿐입니다.

2003년 3월, 서울시가 발표한 노숙자 숫자는 모두 3062명이랍니다.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대표 주영수)가 지난 5월 발표한 결과에 따르면 2001년 한 해 동안 서울지역에서 사망한 노숙자의 사망 당시 평균 연령은 48.3세였습니다. 국민 전체 평균인 66.3세보다 18세나 낮은 수치입니다.

가난구제는 '나랏님'도 못한다는 옛말이 있습니다만, 우리는 지금 '나랏님'이 다스리는 왕조시대를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회구성원 서로에 대한 책임이 갈수록 커지는 현대사회를 살고 있는 것이죠. 노숙자 문제의 절반은 사회와 정부에 책임이 있습니다. 인권도 지키고 사회적 구휼에도 적극적으로 나서는 정부는 과연 볼 수 없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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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오마이뉴스 입사 후 사회부, 정치부, 경제부, 편집부를 거쳐 정치팀장, 사회 2팀장으로 일했다. 지난 2006년 군 의료체계 문제점을 고발한 고 노충국 병장 사망 사건 연속 보도로 언론인권재단이 주는 언론인권상 본상, 인터넷기자협회 올해의 보도 대상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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