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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온전치 않은 발목을 이끌고, 지난 21일 난생 처음 KBS 1T의 'TV, 책을 말하다' 방청을 위해 경희대를 가게 되었습니다. 사실 기대를 갖고 신청한 것은 아니었지만 평소 즐겨보던 프로그램이라 바람이 많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 방청 신청이 방청석에 머리수를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길 바란다.
하지만 방청 후 그 부푼 설렘이 무색해졌습니다. 다시는 이런 프로그램에 방청 신청을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아니 제가 '방송'을 안다고 섣불리 생각했던 것이 오히려 잘못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후 4시부터 8시까지 무려 세 시간 가까이 되는 방청 시간동안 허리 한번 꼿꼿하게 펴지 못했건만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은 어찌나 허탈하던지요. 저처럼 태어나서 처음으로 방청 신청을 했다는 올해 대학 신입생인 강양은 헛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방송이란 게 원래 이런 건가요? 출연자에게 그렇게 질문하는 법이 어딨어요?"

강양이 이렇게 말한 것은 이 프로그램의 MC(박명진교수)의 오프닝멘트 준비 때에 나온 말입니다.

" 선생님은 어떻게 보이고 싶으세요? "

이번 주 초대된 소설가 이청준님께 던져진 질문이었습니다. 물론 MC의 선생님에 대한 배려 차원 같은 질문이었을 지 모르지만, 방청을 하는 사람들에겐 얼마나 황당스러웠는지 모릅니다.

MC라면 최소한 녹화를 위해 모셔진 초청작가라면 사전에 이미 멘트를 만들어왔어야하지 않았을까요. 더군다나 소곤소곤 출연자끼리 하는 이야기도 아니고, 가슴에 마이크를 단 채로 울려퍼지게 했으니 얼마나 실망스럽겠습니까.

아마도 오프닝 멘트로 할 내용이 마땅치 않았나보다 라고 넘어갈 수도 있었지만 방청객으로서 이해할 수 없는 시작이었습니다.

게다가 녹화 전 제작진이 방청객에게 특별히 요구를 한 사항이 있었습니다. 그 날의 주인공이 소개받고 들어올 때 모두 일어나서 박수를 치라는 것이었습니다. 뭐, 그거야 평소 그 작가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왔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박수를 치고 난 후 앉을 때 의자를 끌지 말아달라는 부탁도 받았습니다.

방청객들은 그 요구를 존중해 주었고 당연 녹화장에는 숨소리조차 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뭡니까? 한참 녹화 중인데 궁시렁궁시렁 하는 소리가 났습니다. 알고보니 그 프로그램의 제작자 중 어떤 사람이 사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참 어처구니 없는 일이라 제 옆에 앉아있던 강양과 웃고 말았습니다.

또 있습니다. 그 뜨거운 햇살에 방청객에게 물 한 잔 나눠주는 배려는 찾아볼 수 없었음은 물론, 자유롭게 질문할 시간이 있다고 했는데도 준비한 질문을 할 수 있는 기회조차 없었습니다.

알고보니 녹화 전 별도에 마련된 질문석에는 제작진이 미리 수배(?)해 놓은 7명의 방청객들이 질문할 수 있도록 준비시켜 놓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당연히 방청석에도 질문의 기회가 주어질 줄 알았던 방청객들은 "이제 모두 끝났습니다"라는 제작진의 말을 듣고 당황할 수밖에요.

제 앞 좌석에 앉아있던 고3 여학생은 수첩에 빼곡이 적어놓은 질문을 한개도 하지 못했다며 무척이나 아쉬워하며 돌아갔습니다. 허탈한 마음으로 돌아갔을 그 여고생을 생각하니 은근히 화도 났습니다. 물론 이것을 방청객에서 질문이 나오지 않을 것을 대비한 제작진들의 노력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그와 별도로 정말 생생한 질문을 할 수 있는 방청객들의 질문을 소홀하게 대했던 것은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제작진의 의도를 먼저 설명해 주었다면 쓸데없이 질문 생각하느라 고생하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녹화가 끝난 시간은 8시. 경희대 캠퍼스를 빠져나오며 허탈한 마음이 아직은 덜 나은 발목으로 쏠렸습니다. 지하철을 향해 걸으며 강양과 이런 약속을 했습니다. 교양프로가 아닌 오락프로에 방청 신청을 해서 차라리 맘껏 자유롭게 소리라도 지르다 오자구 말입니다.

방송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이런 생각이 듭니다. 방송은 PD나 MC, 그 밖에 제작진만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프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방청객과 같은 시청자의 호흡이 함께 할 때 될 수 있다고 말입니다. 방송을 만드는 자들과 방송에 참여하는 자들이 함께 목소리를 낼 때 더욱더 값진 방송이 될테니까요.

비록 TV화면에 나오지 않는다해도 그 프로그램을 위해 참여한 방청객들에게 꼭두각시 노릇을 시킬 것이라면 아예 방청석을 만들지 않는 것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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