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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머리 하나만큼 키가 줄었네. 그것도 우리 시대에 가장 뛰어난 머리 하나만큼.”

▲ 칼 마르크스, 1818-1883
ⓒ 김용태
칼 하인리히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 1818~1883)의 절친한 친구이자, 든든한 이론 동지였던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 1820~1895)가 던진 말이다.

마르크스는 1883년 3월 14일 수요일 오후 2시 30분에 숨을 거뒀고, 그 후 하이게이트 공동 묘지 외딴 구석에 조용히 묻혔다. 그런데 지금 왜 마르크스일까. 혹 그의 영혼이 되살아나기라도 한건가. 마르크스가 무덤에서 웃을 일이다. 그는 결코 영혼의 부활을 얘기하지 않았으니. 분명 그가 후세에게 물려준 유산은 철저히 경험에 근거한 사회과학적 삶의 자세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도대체 지금 왜 마르크스일까. 왜 다시 그의 삶과 사상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걸까. ‘냉전 시대 서구에서는 마르크스가 모든 악을 낳은 악마이자, 사악한 종교의 창시자’인 마르크스를 말이다.

마르크스 전기를 읽어야 했던 두 가지 이유

두 가지 이유에서다. 하나는 지금 내 고민이 마르크스의 온 생애에 걸쳐 품었던 고민과 일맥상통해서다. 하나님은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했다. 이 성경 구절을 ‘믿습니다’는 과거형이었고, 현재형은 ‘정말 그렇습니까’다. 우스운 질문이지만, 현재 내 신학적.종교적 고민은 여기서 출발하고 뒤엉키고 있다. 이때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충고한다.

“인간이 종교를 만들지 종교가 인간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 종교를 신이라는 변수로 대입하면, 인간이 신을 만들지 신이 인간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솔깃한 말이고, 그럴 듯한 답변이다. 그리고 심정적으로 기울어져 있다. 나 또한 마르크스처럼 그리스도인에서 정통 조직신학적인 의미에 견줘 무신론자로 가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다른 하나는 세속화(secularization)와 마르크스의 관계가 흥미롭기 때문이다. 근대화와 더불어 서구 근대적 기획을 떠받치는 두 기둥 가운데 하나가 세속화다. 세속화는 “종교-문화적 변화”다. 곧 세속화란 “정치, 경제, 교육, 철학, 문학, 예술 등 사회와 문화의 각 영역이 통합적인 종교적 이념과 상징의 관장에서 풀려 각기 독자적 길을 걷는 분화과정을 의미한다.” 이런 세속화와 마르크스의 관계는 무엇일까.

마르크스는 서구 근대 사회에서 세속화의 진행 속도에 가속도를 붙인 인물이다. 마르크스는 인간이 만든 종교에 인간 자신이 소외되는 현상을 ‘실천적 혁명’으로 ‘전도’시키려 했다. 실천적 혁명의 끝은 물론 종교의 자연스런 소멸로 이어진다. 이렇게 본다면 마르크스는 ‘급진적 세속화주의자’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어떻든 간에 이런 마르크스의 종교 비판은 매력적일 뿐더러 오늘날에 있어서도 뼈 있는 이론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마르크스에 대한 관심을 지금 여기서, 나는 놓을 수 없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선택적 관심에 따른, 곧 정치적.경제적 관심에 비해 소홀했던 종교를 바라보는 마르크스의 시각이 궁금해서다.

이젠 이러한 개인적 관심사를 만족시켜줄 책이 필요하다. 찾은 결과, 세 권의 책이 눈에 들어왔다. 마르크스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삶을 다룬 책 세 권. 우선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소에서 쓴 <칼 마르스스 전기>(소나무, 1989)가 손에 들어왔다.

이 책은 상하권 두 권으로 엮어져 있어 꽤 두툼하다. 두 번째로 손에 들어온 책은 프랜시스 원이 지은 <마르크스 평전>(푸른숲, 2000)이고, 마지막 세 번째 책은 이사야 벌린이 쓴 <칼 마르크스 : 그의 생애와 시대>(미다스북스, 2001)이다.

세 책 모두 풍부한 자료와 검증을 거친 후 나온 터라, 어느 책을 먼저 읽어야 할지 망설여진다. 그러나 각각의 저자들은 각 나름으로, 각기 다른 관점에서 마르크스를 되살렸다.

예컨대, 이사야 벌린의 경우 마르크스에게 직간접으로 영향으로 준 인물들의 사상을 중점으로 다뤘다면, 프랜시스 윈은 마르크스의 행적에 초점을 맞춰 전기를 기술한다. 반면 소련 공산당 연구소에서 나온 전기는 주로 그의 혁명적 행적에 초점을 맞춰 전기를 기술했다.

그러나 이렇듯 기술하는 관점은 다르지만 공통되는 사항이 있다. 이들 작가들은 마르크스의 온 삶을 크게 세 시기로 나누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청소년기에서 베를린 대학에 들어가 헤겔 정신철학을 접할 때, ≪라이니셰 자이퉁≫에 들어가 역사적 유물론 확립하고 파리에 건너갔을 때, 그리고 <공산당선언>을 하고 난 후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이끌고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다.

칼 마르크스의 삶

마르크스는 1818년 5월 5일 프로이센 제국에 딸린 트리에(현 독일의 라인란트 지방)에서 태어났다. 당시 트리에는 원래 대주교를 겸임한 제후의 땅이었으나, 마르크스가 태어나기 전 각각 프랑스와 프로이센 왕국에 강제로 넘겨졌던 지역이었다. 마르크스의 어린 시절은 지금까지도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마르크스는 1830년 트리에에 있던 지역 고등학교에 들어간다.

그러면서 그는 훗날 장인이 될 베스트팔렌(Freiherr Ludwig von Westphalen)을 통해 낭만주의 문학을 읽는다. 마르크스는 이 때 보낸 시간을 커서 즐겁게 회상해곤 했다. 마르크스는 이 시절이 가장 행복한 시기였다. 어떻든 간에 마르크스는 1835년 본대학 법학부에 들어가기까지 특별히 모난 것 없이 어린 시절을 보낸다. 물론 짙은 안개로 뒤덮였던 그의 사상이 조금씩 베일을 벗기면서 말이다.

트리에를 떠난 마르크스는 대학 시절을 도시에서 보낸다. 본대학과 베를린대학 시절(1835~1841) 마르크스는, 안개에 싸였던 자신의 사상을 말끔히 정리한다. 특히 베를린 대학에서 마르크스는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과 포이어바흐(Ludwig Andreas Feurbach, 1804~1872)를 접한다. 헤겔을 통해서는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의 진보라는 개념을 터득했고, 포이에르바하를 통해서는 전도된 종교의 본질을 터득한다. 그리고 난 뒤 마르크스의 생각은 관념론에서 유물론으로, 추상에서 현실로 옮겨간다.

한편, 마르크스는 베를린 대학을 졸업했지만 박사학위는 예나대학에서 받았다. 학위를 받은 다음 마르크스는 고향인 트리에에 잠시 돌아왔다가 본과 베를린을 오간다. 그러던 가운데 마르크스는 1842년 ≪라이니셰 차이퉁≫에서 언론인로서 첫발을 내 딛는다. 이후 마르크스는 파리에서 <독불연보>를 발행할 때까지 줄곧 신문사에서 근무한다.

이 당시 그의 논설 스타일은 스타일러스(철필)로서 ‘속물’ 사회를 향해 독설을 내 뿜었다. 신문사 재직 시절 마르크스는 두 번째 지적 변화 겪는다. 이 당시만 하더라도 마르크스는 “≪라이니셰 차이퉁≫ 편집장으로서 이른바 물질적 이해관계에 대한 논의에 참여해야 할 때 나는 처음으로 당혹감을 느꼈다”고 고백했다.

그의 고백대로 마르크스는 그동안 필요하다고 여긴 철학, 신학, 법은 모두 배웠지만, 정치와 경제에는 여전히 초보자였다. 어떻든 간에 마르크스는 이후 계급, 개인 소유, 국가의 문제를 심사숙고하게 된다. 그리고 1843년 ≪라이니셰 차이퉁≫이 폐간되면서 마르크스 자신도 프로이센을 떠나 좀 더 자유로운 분위기의 파리에 도착한다. 파리 생활과 함께 그의 지적 변화도 마침표를 찍는다.

1843-45년에 마르크스는 마지막 지적 변화를 겪는다. 이러한 변화를 겪고 나서 마르크스는 개인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자신의 사상적 입장을 분명하게 가다듬었다. 그의 남은 생애는 그러한 입장을 펼치고 실제로 실천하는 일에 바쳐졌다. 이사야 벌린은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종교, 계급, 국적에서 멀어짐으로써, 자본주의가 인간에게 내린 저주라고 생각했던 소외를 스스로 체현했다.”

▲ 마르크스와 엥겔스, 레닌, 스탈린, 그리고 마오쩌둥
ⓒ marx2mao

결코 순탄치 않은 마르크스의 인생길이지만, 그의 삶을 짧게 압축하면 이렇다.

“공식 신앙이 복음주의 신교인 나라 안에서 가톨릭이 지배적이던 도시 출신의 부르주아 유대인 … 무신론자이자 … 어른이 된 후 부르주아지의 멸망과 민족 국가의 소멸을 예측”하는 삶, 그것이 마르크스의 인생 역정이다.

정치․경제적인 분석 외에 그의 삶이 종교에 끼친 영향을 평가하자면? 간단하다. 마르크스는 필연적으로 ‘종교 비판을 모든 비판의 전제로 삼으며’ 혁명적 철학을 실천했다. 그래서일까. 마르크스는 오늘날 무신론을 대표하는 인물로 요주의 대상이다. 실제로 그는 종교 비판을 통해 격렬하고 신랄하게 종교를 비판했다.

마르크스는 분명 기존의 종교 비판을 통해 반종교적 인물로 입지를 굳혔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인간들에게 필요한 삶의 의미 문제까지 제쳐 놓진 않았다. 그는 세속주의적으로 보였지만, 그렇다고 철저한 세속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는 ‘소외와 착취’가 없는 이상 사회를 외쳤다. 그리고 ‘실천적 철학’을 통해, ‘휴머니즘적 유물론’을 통해 그런 사회가 가능하리라 믿었다.

따라서 그의 삶에서 다시 눈여겨 봐야 할 것은 그가 종교를 비판했을 지언정 대안없이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마르크스는 되레 새로운 종교를 열었다. 그는 새 종교의 창시자다. 그것은 바로 휴머니즘교 또는 인류교다. 오늘날 일부에서는 마르크스를 가리켜 ‘악덕 무신론자’로 평가를 하곤 하는데, 그러기엔 그의 휴머니즘적 유물론이 자꾸 걸린다.

결국 마르크스는 19세기에 떠오른 ‘인류교’를 통해 삶의 의미 문제를 다뤘고, 기존 종교 비판 이후의 대안을 제시했다. 다만 기존 종교 전통의 눈에 그 점이 거슬렸을 뿐이라는 점이다.

칼 마르크스 전기 1

마르크스 레닌주의연구소 지음, 소나무(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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