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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조선 시위모습. <조선일보>는 '이데올로기 전쟁'에서 승리하고 있는가? 노 대통령이 정확하게 그 답을 알고 있을 것이다.
안티조선 시위모습. <조선일보>는 '이데올로기 전쟁'에서 승리하고 있는가? 노 대통령이 정확하게 그 답을 알고 있을 것이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그러나 노 대통령의 취임 3달이 채 지나지 않아 이 땅의 '영원한 주류'는 이런 소박한 정치적 희망마저 뿌리뽑으려 하고 있다. 서울대 정치학 교수 박효종은 chosun.com의 시론(2003년 5월 23일자)을 통해 갈피를 못잡고 있는 노 대통령에 대한 마지막 이데올로기 공세를 퍼붓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노대통령의 리더십은 굳이 따지자면 저항적 리더십이다. 대통령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비주류로 있었을 때의 서러움과 회한이 복받치고 있음이 느껴진다. 대통령이 되면 주류가 되는 것인데 대통령 자신이 비주류의 정체성을 고수하고 있으니 장관들도 저항세력이나 시민운동할 때의 정체성을 좀처럼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놀랍지 않은가? "대통령이 되면 주류가 되는 것"이라는 말의 뜻이 뭔가? 세상은 언제나 주류와 비주류로 구분돼 있는데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누가 봐도 주류자리가 아니냐는 속물스런 시각의 표출이다. 즉 그가 보기에 비주류 대통령은 비주류를 대표하여 비주류의 정책(저항)을 실천(개혁)하는 자리가 아니라 그 출신이 무엇이든 이제 주류(우리 편)가 되었으니 "서러움과 회한"을 접고 즐겁게 주류의 하수인 노릇을 해야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이런 해석이 믿어지지 않겠지만 계속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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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병이 장교가 된후 '쫄병'의 티를 벗지 못하고 있으면 정체성의 혼란이며 인지부조화 현상일 터이다. '동업자'나 '코드' 혹은 '약자' 이야기는 모두 비주류 저항세력일 때의 흘러간 이야기로 접어두고, 지금은 국정을 책임진 조타수로서 통합과 포용 그리고 경륜과 전문성을 말해야 한다."

그는 노 대통령을 장교가 된 '쫄병'으로 보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 쫄병 즉 '약자'이야기는 잊어버리라고 선전·선동하고 있다. '당신은 이제 지배계급이 되었다. 약자를 위한 공약을 잊어라!' 이것이 그의 메시지다. 이런 그가 만약 이회창 후보가 대통령이 되었다면 약자를 위한 "통합과 포용"을 이렇게 진지하게 말하고 있을까? '약자' 이야기가 모두 비주류 저항세력일 때의 흘러간 이야기라니! 갈수록 태산이다.

"특히 무정부 상황에 가까운 이번의 혼란사태는 노 대통령의 지지세력 혹은 지지세력으로 생각해왔던 사람들이 대통령의 감성주의와 온정주의를 이용하여 큰 목소리를 내고 큰 몫을 챙기려는 데서 기인한 것이다."

그는 이 땅이 아닌 어디 별세계에서 살다왔는가? 무정부 상황에 가까운 혼란사태? 최근의 화물연대파업이나 공무원노조 등의 정치사회적 분규가 어디 지금까지와는 다른 특별히 유난스런 데라도 있었는가? 전교조의 NEIS반대나 한총련의 5·18행사장의 항의가 큰 몫 챙기려는 투쟁인가? 그는 지금 "노 대통령의 지지세력 혹은 지지세력으로 생각해왔던 사람들"이 노 대통령을 상대로 이렇게 압박할 수밖에 없는 절박한 심정을 이해하기나 하는가? 그의 결론은 정치적 배반을 부추기는 마지막 일격이다.

"진정한 리더십은 과거의 친구들에게 의존하기보다 새로운 친구를 만들 수 있느냐에서 가늠된다. 대통령은 왜 과거의 지지자들에 대해서만 연연하고 새로운 친구와 동반자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가. 과거의 친구를 친구로 유지하는 것은 '프렌드 십'에 불과하고 과거의 반대자들을 친구로 만들 때 진정한 '리더십'이 발휘된다고 할 것이다."

한마디로 노 대통령에게 정치적 기반으로서의 지지층을 바꾸라고 선동하고 있다. 왜 내친 김에 한나라당에 입당하라고 충고하지는 않는지 그것이 알고 싶다. 그의 말대로라면 올바른 리더십을 가진 정치가는 반대자들을 위해 집권해야 한다. 이것이 배반의 정치가 아니라면 도대체 뭐가 배반의 정치인가? 이것이 정치 사기극이 아니라면 도대체 뭐가 정치 사기극인가?

노사모 시위모습. 노 대통령이 기대하는 '배반하지 않는 지지자들의 모습'이 바로 이런 것인가?
노사모 시위모습. 노 대통령이 기대하는 '배반하지 않는 지지자들의 모습'이 바로 이런 것인가? ⓒ 오마이뉴스 강성관
그런데 더욱 가관인 것은 최근의 노 대통령의 어지러운 발언들이다.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은 23일 "지금까지 남을 위해 열심히 도와줬는데 보람을 느끼지 못할 경우, 또 그 사람이 고마워하지 않고 트집을 잡고 배신할 경우 어떻게 이겨나가야 할지 궁금하다"(<연합뉴스>, 2003년 5월 23일자)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문제는 이러한 발언이 언론에 의해 "지난 대선 당시 자신의 지지기반이었던 일부 노조와 시민단체, 개혁성향 인사들이 방미 외교활동을 '굴욕외교'로 폄하하고 공권력을 무력화하는데 앞장서는 등 집단이기주의 양상을 보이고 있는데 대한 강한 불만의 표시로 해석"(<연합뉴스>, 상동)되고 있다는 점이다.

기자는 노 대통령의 발언의도를 도저히 알지 못하겠다. "배신"이란 용어 때문이다. 유권자는 결코 배신의 주체가 될 수 없다. 배신의 주체는 정치인일 뿐이다. 정치인이 유권자를 상대로 이해를 구하지 못해 낙담을 할 수는 있겠지만 정치인이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유권자에게 배신이란 용어를 사용할 수는 없다. 이것은 대의민주주의의 원칙상 불가피하다.

만약 노 대통령이 언론의 해석 그대로 자신이 유권자의 공복이 아니라 유권자가 자신의 공복이라고 착각하고 있다면 그것은 박효종식의 논리에 중독돼 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자신의 지지자들은 언제나 자신이 무슨 정책을 실현하든 '프렌드십'의 관계로 남아 있어야 하고(그렇지 않으면 '프렌드십'의 배반이다!) 오직 자신이 신경써야 할 정치적 '리더십'의 대상은 반대자('프렌드십'의 관계가 아닌 그들에게 어떤 선물을 해야만 하는지 상상해보라!)일 뿐이라는 허황된 이데올로기에의 중독이다.

아니기를 바란다. 이런 식의 허황된 이데올로기에 빠져 이 땅의 '영원한 주류'에게 농락당하지 않기를 바란다. 제발 생각해 보시라! 당신의 임기가 끝나는 5년 뒤 그들이 지지자들을 뒷전에 물리친 당신에게 훌륭한 리더십을 가진 정치인이라고 상찬의 말을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정치가 뭔지도 모르고 자신들의 뜻대로 농락당한 얼간이라고 조롱할 것으로 생각하는가? 여전히 '노무현의 배반'이 아닌 '옛친구의 배반'이 문제라면 이제 더 이상 옛친구로서는 할 말이 없다.

[시론] 저항적 리더십 결별할 때
5월23일자 조선일보

박빙의 승부끝에 승리한 노대통령이 ‘절반의 대통령’ ‘반(半)통령’으로 자조하더니 급기야 “대통령 못해 먹겠다”는 푸념을 하기에 이르렀다. 무릇 모든 직무에는 수습기간이란 것이 있는 법이지만, 국정은 너무나 중차대하다. 예로부터 국가는 배로 비유되어 왔는데, 배라는 은유는 중세라틴어의 ‘키’를 의미하는 ‘gubernaculum’에서 나왔고 영어의 ‘government’도 그 파생어다. 대통령은 국가라는 배의 조타수이다. 갈 길 바쁜 배의 조타수가 조타수 노릇을 못해먹겠다고 하는 것은 리더십 피로감 때문인가, 리더십 부적응 때문인가.

최근의 사태에는 사회의 각 집단들이 자신들의 요구를 너무나 자유분방하게 쏟아내놓고 있는 측면이 있으나, 실은 그것도 노대통령의 독특한 리더십에서 비롯된 결과일 것이다. 노대통령의 리더십 가운데 두드러진 것이 감성적 리더십이다. 감성적 리더십은 이성보다는 마음을 움직이며 감동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노 대통령의 눈물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만큼 힘이 있었지만, 흠이라면 이성적 정당화를 생략한다는 점이다.

“반미면 어떠냐”고 하던 대통령이 미국방문에서 그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그 이유를 정정당당하게 논리적으로 설명해주어야 옳다. 상황논리에 의한 잠깐 동안의 변신이며 속마음과는 다른 전략적 행동인지, 아니면 소신과 철학의 변화인지가 궁금하기 때문이다. 지지세력이 반발한다고 하여 “국익을 위해 일한 나를 이해해주지 못하여 섭섭하다”는 식으로 한탄하고 있다면, 이성적 호소력이 부족한 대응일 뿐이다.

또 노대통령의 리더십은 굳이 따지자면 저항적 리더십이다. 대통령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비주류로 있었을 때의 서러움과 회한이 복받치고 있음이 느껴진다. 대통령이 되면 주류가 되는 것인데 대통령 자신이 비주류의 정체성을 고수하고 있으니 장관들도 저항세력이나 시민운동할 때의 정체성을 좀처럼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분명 대통령의 리더십에서 과거와는 달리 소탈한 탈(脫)권위주의적 향기가 나는 것은 사실이나, 그것이 지나쳐 국정책임자로서의 주체의식이 실종되고 냉소적 비판을 일삼는 국외자의 모습이 투영되는 것은 당혹스럽다. 사병이 장교가 된후 ‘쫄병’의 티를 벗지 못하고 있으면 정체성의 혼란이며 인지부조화 현상일 터이다. ‘동업자’나 ‘코드’ 혹은 ‘약자’ 이야기는 모두 비주류 저항세력일 때의 흘러간 이야기로 접어두고, 지금은 국정을 책임진 조타수로서 통합과 포용 그리고 경륜과 전문성을 말해야 한다.

노대통령의 리더십에서 지나친 온정주의가 묻어난다는 것도 문제다. 온정주의는 나쁜 것이 아니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방울 나오지 않을 대통령이라면 국민에게 다가설 수 없다. 하지만 온정주의의 약점은 법과 원칙에 따라 안될 것은 안된다고 말할 수 없다는 점이다. 특히 무정부 상황에 가까운 이번의 혼란사태는 노대통령의 지지세력 혹은 지지세력으로 생각해왔던 사람들이 대통령의 감성주의와 온정주의를 이용하여 큰 목소리를 내고 큰 몫을 챙기려는 데서 기인한 것이다. 이들을 다스리기 보다 다독이기 위해 법과 원칙을 꺾고, 오락가락하다보니 리더십 피로감이 더 빨리 온 것이 아니겠는가.

진정한 리더십은 과거의 친구들에게 의존하기보다 새로운 친구를 만들 수 있느냐에서 가늠된다. 대통령은 왜 과거의 지지자들에 대해서만 연연하고 새로운 친구와 동반자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가. 과거의 친구를 친구로 유지하는 것은 ‘프렌드 십’에 불과하고 과거의 반대자들을 친구로 만들 때 진정한 ‘리더십’이 발휘된다고 할 것이다. / 박효종(서울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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