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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7월 31일, 우리는 스위스의 작은 마을 툰(Thun)에 도착했다. 거대한 툰 호수의 서쪽 끝에 위치한 이 마을에 도착하자, 유럽 그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었던 풍경들이 눈 앞에 펼쳐졌다. 아무데나 카메라를 들이대도 그대로 엽서가 될 만큼 아기자기하고 이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었고, 마을 한 복판을 흐르는 새파란 강물에는 동네 아이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뛰어들어 헤엄치고 있었다.

우리는 숙소에 짐을 풀고 이 아기자기한 마을 곳곳을 둘러보았다. 평화롭기 그지없는 마을 풍경 속에는 더없이 친절하고 착한 그곳 사람들이 있었다. 환전하러 들어간 은행에서 그곳 직원에게 길을 물으니, 그 사람 좋게 생긴 아저씨는 몸소 은행 건물 바깥으로 나와서 친절하게 길을 가르쳐 주는가 하면, 어떤 젊은 아가씨는 한 번 길을 가르쳐주고 제 갈 길을 가다가, 생각해보니 자기가 길을 잘못 가르쳐주었노라며 가던 길을 몇십 미터 되돌아와 다시 가르쳐주고는 미안하다며 어쩔 줄 몰라한다. 이렇게 이곳 스위스의 작은 마을 툰은 우리에게 처음부터 기분 좋은 첫인상을 안겨줬다.

유럽을 여행하면서 느낀 점 한 가지는 이곳 사람들이 의외로 영어를 못한다는 점이다. 기차역이나 은행 같은 공공기관에서는 웬만큼 영어가 통하다가도 숙소가 있는 마을에 도착해서 근처 슈퍼마켓에라도 가면 영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이다. 이곳 툰에서도 그런 경험을 몇 차례 했다. 식당에서 물을 달라고 "워터, 플리즈.(Water, please)"하면 종업원이 못 알아들어서 애를 먹었고, 슈퍼마켓에서 밀크(Milk)가 어디 있냐고 찾으면 또 못 알아들어서 손으로 우유를 꿀꺽꿀꺽 마시는 시늉을 해가며 겨우 바디랭귀지로 의사소통을 하곤 했다.

한 번은 머리를 깎으려고 미장원에 간 적이 있다. 꽤 규모가 있는 미장원이었는데, 나같이 배낭여행을 하는 동양인이 미장원에 들르는 것은 흔치 않은 경우인지라, 내가 문을 열고 들어가서 안 되는 영어로 "캔 아이 컷 마이 헤어?(Can I cut my hair?)" 하자, 그곳 직원들이 우왕좌왕 당황하며 영어를 할 줄 아는 미용사를 급히 찾는 것이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머리를 깎게 되었는데, 내가 머리를 자르는 동안 그곳 미용사들이 내 주변에 몰려들어 신기한 듯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스위스 물가가 비싸서 우리돈으로 2만4000원이나 주고 머리를 깎았지만, 스위스의 미장원에서 머리를 깎은 그때 기억은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그렇게 마을 이곳저곳을 둘러보는데 한 가지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길가에 있는 상점들마다 불꽃놀이를 잔뜩 쌓아놓고 파는 것이었다. 크기가 큰 것, 작은 것, 요란한 모양을 한 것까지 가지각색의 불꽃놀이를 사람들이 저마다 한 아름씩 사가는 것이 의아해서 상점 주인에게 물어봤더니, 내일(8월1일)이 스위스 최대의 국경일인 '스위스연방 독립기념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밤새 불꽃놀이를 하면서 축제를 즐기니까 꼭 구경하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 말에 우리는 잔뜩 흥분되어 내일 벌어질 불꽃놀이 광경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찼다.

날이 저물어 숙소로 돌아온 우리는 숙소 앞에 펼쳐진 거대한 툰 호수에 수영 팬티 하나만 걸치고 들어가 신나게 수영을 즐겼다. 하늘 위에는 맑고 투명한 달빛이 우리를 비추고 있었으니, 그야말로 달밤에 체조, 아니 수영을 했던 것이다. 물이 워낙 깨끗해서 이곳 사람들은 집 앞 냇물이나 호수에 그냥 들어가서 수영을 했다. 그게 어찌나 부럽던지….

다음 날 우리는 아침 일찍 일어나 부지런히 움직였다. 바로 스위스 여행의 백미인 융프라우요흐 등반을 위해서다. 융프라우요흐 등반은 인터라켄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툰 호수 서쪽 끝의 툰 마을에서 호수 동쪽 끝에 위치한 인터라켄에 가기 위해 기차를 탔다. 호수가 어찌나 큰 지, 호숫가를 따라 달리는 기차로 인터라켄까지 가는 데 30~40분이 걸렸다.

인터라켄에서 우리는 해발 3400m에 이르는 융프라우요흐까지 올라가는 산악열차를 탔다. 중간에 한 번 갈아타는 것을 제외하곤 두 시간을 꼬박 달려 열차는 정상에 도착했다. 정상에 이르자 사방에 보이는 것이라곤 온통 하얀 눈 뿐. 그렇다, 산소가 부족하여 숨까지 가쁘게 몰아쉬게 되는 해발 3400m의 이곳은 만년설 지대였던 것이다.

저 까마득히 밑으로 구름이 보이고, 눈 앞에는 끝없이 펼쳐진 빙하와 눈덮인 산봉우리들. 그 거대한 자연 앞에 우리는 벌어진 입을 다물 줄 몰랐다. 상상을 뛰어넘는 거대함으로 일시에 나를 압도하는 대자연의 웅장함에 숨이 턱 막히고 정신마저 아찔해졌던 그 순간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 스위스 융프라우요흐 꼭대기에 있는 스핑크스 전망대
ⓒ 김태환
융프라우요흐에는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전망대라 할 수 있는 '스핑크스 전망대'가 있다. 그곳에서 360도로 펼쳐지는 거대한 빙하와 눈덮인 준봉들의 파노라마를 감상한 우리들은 밖으로 나왔다. 눈밭으로 나온 우리들은 한여름에 해발 3400m의 만년설을 밟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아이들마냥 소리치며 신나게 뛰어놀았다. 그곳에서는 무료로 눈썰매를 빌려주었는데, 융프라우요흐 꼭대기의 끝없이 펼쳐진 눈밭 위에서 썰매를 타는 기분은 정말 일품이었다.

우리는 눈밭에서 원없이 뒹굴고, 사진 찍고, 그곳에 만들어놓은 '얼음궁전'도 구경하며 2~3시간을 보낸 후에 다시 거대한 만년설을 뒤로 하고 내려오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 내려오는 도중에는 하이킹을 했다. 산악열차는 인터라켄까지 내려오면서 중간중간에 여러 차례 정거하는데, 그 중에 한 역에서 내려서 다음 역까지 한 시간 정도를 걸어간 것이다.

해발 1000m ~2000m 정도 높이의 알프스 고원을 하이킹하는 기분은 정상에서 맛보았던 것과는 또다른 느낌이었다. 새하얀 만년설은 온데간데 없고, 그대신 푸르는 초원이 끝도 없이 펼쳐졌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선 거대한 폭포가 떨어지고, 저 멀리 보이는 산자락엔 그림 같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동화 속에나 나올 법한 아름다운 그 길을 걷던 우리는,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 스위스의 알프스 고봉에 올라 하이킹을 하다보면 보이는 알프스 산자락의 그림같은 풍경
ⓒ 김태환
아침 일찍 올라갔던 융프라우요흐에서 내려오자 어느덧 날이 저물어 가고 있었다. 이제 인터라켄에서 다시 숙소가 있는 툰 마을로 돌아갈 차례. 올 때와 달리 우리는 기차가 아닌 유람선을 타고 가기로 했다. 스위스에선 모든 유람선을 유레일 패스로 이용할 수가 있다. 그렇게 우리는 인터라켄에서 유람선을 타고 툰 호수를 가로질러 툰 마을로 향했다. 거대한 호수를 가로지르는 뱃머리에서 우리는 석양에 빛나는 호수와 호숫가에 자리 잡은 장난감 같은 집들을 바라보며, 붉게 물들어가는 아름다운 노을을 만끽할 수 있었다.

숙소로 돌아온 우리는, 하루종일 대자연 속에 파묻혀 지내면서 느꼈던 감격과 흥분이 채 가시기도 전에 또다른 환상적인 체험을 했다. 바로 어제부터 설레는 마음으로 기대했던 불꽃놀이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밤 10시가 되자 온 마을이 불꽃놀이로 들썩대기 시작했는데, 과연 스위스 최대의 국경일다웠다. 툰 호숫가에 나가자 그곳 젊은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모닥불을 피우고 술을 마시며 춤을 추거나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호수 저 멀리 건너편에서부터 이편 가까운 곳까지, 사방팔방에서 화려한 불꽃들이 솟아올라 밤하늘을 수놓았다. 자정이 다 되도록 끝날 줄도 모르고 터져오르는 가지각색의 불꽃놀이는 그야말로 장관이 아닐 수 없었다. 마을 전체가 화약 냄새로 진동을 할 정도였으니 얼마나 많은 양의 불꽃놀이를 일시에 터뜨린 것인가. 스위스연방 독립기념일인 8월 1일에 마침 그곳에 있을 수 있었던 건, 우리에겐 생각지도 못한 커다란 행운이었던 셈이다.

이런 곳에 살면 싸울 일이 없겠다 싶을 만큼 아름다운 자연 속에 푹 파묻혀 있던 나라, 그리고 그런 자연을 닮아 더없이 푸근하고 착했던 사람들. 대자연의 나라 스위스에서의 마지막 밤은 밤하늘을 수놓은 아름다운 불꽃놀이와 함께 그렇게 저물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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