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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터목산장에서 턱수염이 텁수룩한 분으로부터 쌀과 부식을 주고 감사의 표시로 얻은 당귀뿌리가 10년 이상이나 됨직한 데 뿌리에서 나는 하얀 액이 고무풀처럼 끈적거린다.

당귀뿌리와 은행 오미자를 넣고 끓였는데 한 모금 머금으니 입안이 싸-아 하고 막힌 코가 뚫리는 듯 하다. 찻잔에서 퍼져 나는 향이 집안을 가득 메운다.

5월 18일, 부산에서 오전 6시에 출발하여 충무-대전간 고속도로를 달려 백무동 산장 앞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9시. 한산한 고속도로를 3시간 달려 온 셈이다. 산장주인 박00씨에게 거림까지 가는 차편을 부탁하고 지리산과 백무동에 얽힌 이야기를 듣는다.

박씨는 얼마 전 고향 사람이 지인들과 함께 휴식년제를 모르고 칠선계곡에 들어섰다가 2백만원 과태료를 물었다며 휴식년제 구간 출입을 삼가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10여분을 기다리니 RV형 개인택시가 도착했다. RV형 차량을 사용하는 것은 산간지역의 지리적 특수성 때문일까?

함양의 백무동에서 산청 거림까지 7만원이 비싸다고 생각되었지만 짜여진 일정 때문에 어쩔 수 없다. 백무동에서 태어나 한번도 이곳을 떠난 적이 없다는 택시기사 이씨는 거림까지 1시간 30여분 이동하는 동안 자신의 아버지가 빨치산 친구를 사살하지 못했다며 매를 맞아 혼수상태에서 똥물을 먹고 정신을 차린 이야기, 마지막 빨치산 정순덕과 짝을 이뤄 6.25 전쟁이 끝난 후에도 홀로 칠선계곡에 남아 빨치산 활동을 했던 박00씨 이야기로 아픈 역사를 전해 준다.

“지리산 철쭉이 흐드러지게 필 때 슬퍼하려 해도 슬퍼할 겨를이 없었다”는 어느 시인은 이념의 갈등에다가 보리고개까지 겹친 암울했던 시대적 상황을 잘 전해 주는 대목이 아닌가 싶다.

언제부터인가 가슴 한켠에 지리산 세석고원의 흐드러지게 핀 철쭉을 보고 싶었다. 예년보다 일주일 정도 빨리 철쭉이 필 거라는 정보를 얻어 만개시기에 맞춰 휴가를 얻었다. 거림계곡을 3시간 넘게 타고 올라 왔으나 세석평전을 가득 메운 철쭉나무는 연분홍빛 머리들만 빼곡하다. 양지바른 바위 옆에는 띄엄띄엄 분 바르고 분홍 연지 찍은 누님의 화사한 얼굴처럼 꽃잎을 터트리고 있을 뿐.

▲ 5월 18일 세석평전 철쭉
ⓒ 강석인
세석고원의 철쭉은 예년과 마찬가지로 이번 주말이 절정을 이룰 듯 하다.

장터목산장은 우리 일행 6명을 제외하고 20여명 남짓하다. 몇 차례 이곳에서 숙박을 한 경험으로 항상 만원이었고, 추운 겨울에도 칼잠을 자야 했는데 조용한 게 왠지 이상하다. 일요일 밤이라서 그런가? 구름이 점점 두텁게 하얀 달을 가려 빛을 잃어가는 걸 보아 내일 아침 일출을 보기가 어려울 것 같다. 어떻게 올라 온 길인데... 그래도 천왕봉에 올라 보자며 일찍 잠자리에 든다.

장터목 대피소에서 천왕봉까지 1.7킬로 구간에는 일출 시간(05:20)에 맞춰 오르는 등산객들의 랜턴 불빛이 줄을 잇는다. 상봉식을 마치며 오늘도 일출은 못볼 것 같다며 천왕봉 표지석을 들러싸고 기념 촬영을 하는데 동녘이 서서히 붉어지기 시작하더니 동전잎 크기의 발그란 해가 운평선을 뚫고 서서히 솟는다.

▲ 5월19일 지리산 일출
ⓒ 강석인
구름 속에 숨기를 몇 번 거듭하더니 이내 햇살을 뿜는다. 천왕봉 표지석을 비추고 지리산 능선을 비추고 다시 우리들의 얼굴을 비춘다. 삼대가 적선을 해야 볼 수 있다던 지리산 일출을 맞는 순간이다.

천왕봉에는 지리산을 상징하는 성모석상이 70년대까지 천년의 세월을 지켜왔으나 무슨 곡절인지 모르지만 현재는 중산리 천왕사란 암자 뒤뜰에 안치되어 있다고 한다. 수많은 민중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던 성모석상이 있던 자리에 서서 건강을 지켜 달라며 소망 한 가지를 빈다.

▲ 지리산 고사목
ⓒ 강석인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라는 주목의 고사목이 지리산의 역사를 말해주고 털진달래는 계절도 잊은 채 피고 지고 촛대봉을 넘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주능 끝에는 반야봉이 희미하다.

▲ 연하선경의 초원
ⓒ 강석인
장터목에서 연하선경을 거쳐 세석평전까지 능선 곳곳에 녹색 풀들을 비집고 핀 야생화가 유난히 곱다.

▲ 장터목 오름
ⓒ 강석인
귀룽나무의 하얀 꽃 향은 여인의 기분 좋은 향기로 코끝에 와 닿는다.

▲ 백무동 폭포수
ⓒ 강석인
계곡이 깊고 험난하며 물이 차다고 해서 붙여졌다는 한신 계곡. 세석고원에서 시작되어 졸졸거리던 물줄기는 아래로 갈수록 콸콸거리더니 싸-아 하며 물안개를 뿜으며 시퍼런 폭포수를 이룬다.

▲ 백무동 야생화
ⓒ 강석인
폭포 옆 벼랑에 가지 끝에 매달린 진분홍의 이름 모를 야생화는 고개를 떨구고 있다. 흐르는 땀을 씻으며 일상에서 얻은 시름과 욕망을 던져버리고 텅 빈 마음으로 돌아가고 싶다. 점심때를 훌쩍 넘긴 후에야 어제 차를 주차한 백무산장에 도착했다.

함양이 고향인 일행의 안내로 함양읍에 있는 00횟집을 찾았다. “어탕국수”의 담백하고 구수한 맛을 즐기며 맛내는 비법을 은근슬쩍 물어 보았다.

“산자락에서 흘러내린 냇가에서 시동생이 잡아주는 피리, 땡아리 등 민물고기로 국물을 내고 국수 넣고 산나물, 양념 넣으면 되지 별끼 아이라요”라며 20년 넘게 이 장사했는데 남는 게 없다면서도 곱빼기 그릇에 어탕국수를 듬뿍 내 놓는다.

한 그릇 3천원인데 덤으로 주고 남는 게 뭐 있느냐고 하니 남는 것 보다 손님이 맛있게 먹는 걸로 만족한다고 했다. 그곳에는 지리산이 있기에 훈훈한 정도 남아있는 듯하다.

땀 흘린 만큼 건강을 지켜주고 마음의 고요를 찾게 하는 지리산을 언제 또 찾을려나.

▲ 천왕봉에서 바라본 주능선 멀리 반야봉이...
ⓒ 강석인
▲ 지리산 야생화 1
ⓒ 강석인
▲ 백무동 계곡
ⓒ 강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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