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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당시 13세였던 방광범군
사망당시 13세였던 방광범군 ⓒ 오마이뉴스 강성관
사망 당시 방광범군은 저수지에서 멱을 감고 있었고 전재수군은 마을 동산에서 친구들과 놀고 있었다. 총상을 입은 방군의 위쪽 머리는 완전히 없어졌으며, 전군은 허벅지에서 배 사이에 무려 6발 이상의 총탄세례를 받았다.

동네사람들은 처참하게 죽은 방군의 시신을 못 보게 하려고 뛰쳐나가는 어머니 박씨를 완강히 말렸다. 이웃들이 부모들을 못나가게 하는 동안 방광범군은 친척들에 의해 죽은 당일 동네 뒷산에 묻혔다.

동사무소에서 부검을 하라는 연락이 와서 6월 5일 매장된 방군을 전대병원으로 옮겨 부검을 했는데 아들의 처참한 모습을 본 아버지 방씨는 이후 3년간 정신병을 앓아야 했다.

전재수군의 부모 역시 전군의 죽음 이후 갖은 고통에 시달렸다. 넋을 잃고 매일 아들의 사진을 붙잡고 오열하는 전군 부모의 건강을 염려한 가족들은 전군의 사진과 유물을 모조리 없애버렸다.

그래서 전재수군은 5·18국립묘지에서 아직도 영정이 없다. 그 후 전군의 어머니인 장계복씨는 어린 아들이 죽은 지 4년만인 1984년 '홧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방광범군과 전재수군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처절했던 5·18항쟁은 어른들의 목숨만 앗아간 것은 아니다. 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5·18항쟁 기간 동안 15세 이하 어린이 8명이 총탄에 의해 사망했으며 그중 사망 당시 10세 미만이었던 어린이는 2명이었다.

5·18항쟁때 어린 자식들을 잃은 부모들은 한결같이 "차라리 데모라도 하고 죽었으면 이토록 한스럽지는 않을 것"이라는 말을 할 정도로 어린 희생자들은 시위와는 무관하게 목숨을 잃었다.

미군 장갑차에 의해 목숨을 잃은 효순이(왼쪽)와 미선이(오른쪽)
미군 장갑차에 의해 목숨을 잃은 효순이(왼쪽)와 미선이(오른쪽)
그런데 80년 5월 어린 생명들이 억울하게 죽은 22년만인 2002년 6월 두 여중생이 미군의 장갑차에 치어 죽는 사고가 발생했다. 조양중학교 1학년에 재학중이던 신효순과 김미선이 그들이다. 사망 당시 두 여중생의 나이는 14살.

세계가 놀랄 정도로 전 국민적 추모열기를 불러일으킨 두 여중생에 대한 세세한 설명은 새삼 소개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5·18항쟁때 스러진 어린 생명들과 22년 후 불귀의 객이 된 두 여중생들의 죽음에는 공통점이 있다. 아무 죄도 없이 어린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는 점, 죽은 사람은 있지만 죽인 사람이 없다는 점이다.

5·18항쟁 당시 광범이의 죽음으로 대변되는 억울한 희생의 역사는 결국 23년이 흐른 2002년 효순이와 미선이의 죽음으로 재연됐다. 5월 정신을 계승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거대한 투쟁이 일어났듯이, 효순이와 미선이의 죽음은 전국민적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청산하지 못한 역사는 되풀이된다. 5·18항쟁이 승리한 역사를 가졌다면,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이뤄져 왜곡된 역사가 바로잡혔다면 지난해 꽃다운 생명이 어이없이 짓밟히는 원통함은 당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민족사에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많은 5월이다. 다시는 이런 아픔을 겪지 않도록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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