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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시 꽃은 추억의 향기이다.
아카시 꽃은 추억의 향기이다. ⓒ 황종원
방금 나를 스쳐 향기를 주며 떠난 이는 첫사랑 열여덟 순이었다. 아직도 나를 감싸며 내 허파 속에 순이가 있다. 내 눈 앞에 순이 대신 아카시아 꽃이 있다.

아카시아 꽃향기를 풍기던 동갑내기 순이는 지금 세검정 상명여대 다리 아래 개천가 판잣집에서 살았다.

가난은 슬프다기보다 불편하였으며 우리들은 그런 불편에 익숙했다. 1964년도 봄, 우리는 고2학년생이었다. 둘 다 상고 생들이었다. 함께 주산학원에 다니다 친해졌다. 불광동에서 세검정까지 가는 길은 불빛 하나 없이 어두운 길이었다.

길가에 아카시아가 은하수처럼 하늘 천정 노릇을 하며 하늘과 땅 사이에 아카시아 향기 가득 하였다.

순이에게서 꽃향기가 났다. 함께 걸으면 부딪치는 순이의 팔뚝에서도 향기를 풍겼다. 차가 지나갈 때야 어둠이 벗겨지던 세검 천에도 아카시기 꽃향기가 떠돌았다

나는 대학에 갔고, 순이는 제약회사 경리사원으로 취직을 하였다. 나는 순이의 퇴근 시간에 맞춰 회사가 있던 종로 4가의 길바닥에서 기다렸고, 순이가 직장을 바꾸었을 때는 출근 시간에 순이의 얼굴을 보려고 내 집 예관동에서 그 네가 새로 옮긴 성수동까지 가곤 했다.

그 때의 순이가 나를 살갑게 대해주지 않아도 나는 길바닥 장승같았다.

어느 때는 순이는 내 집의 길 건너에서 2층 창가 내 그림자를 찾아 하염없이 서있기도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만남이 때로는 설레고 때로는 멀어지는 날들 속에서 우리의 이별을 예감하였다.

대학을 졸업한 나는 학군 장교로 소위가 되었고. 그때 순이는 결혼 적령기였다. 순이의 청첩장을 받고 나는 군인 복장으로 순이네로 순이를 찾아갔다. 개천가 판잣집에서 길가 2층 양옥이 순이의 집이었다. 무슨 항의가 필요하랴. 내가 데리고 갈 수 없으면 남이 데리고 갈 순이. 신접살림 살이 가득하던 그 방에서 내가 했던 말은 “행복하라, 잘 살아라.” 오직 그 말뿐이었다.

순이의 결혼식 날에 나는 먼발치에서 순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웨딩드레스는 아카시아 꽃 색깔이였다. 진정, 순이의 행복을 빌어 주었다. 많은 세월 뒤, 어쩌다 들리는 말에 순이에게 아들·딸이 있고, 결혼을 시켰다는 말을 듣는다.

30여 년의 세월 속에 꽃은 피고 지고. 동네를 무심코 걸으니 아카시아 꽃향기가 가득 차있다.

가버린 세월, 가버린 사람이 바로 내 곁에 있다. 이제 60을 바라 볼 순이는 아직도 내 마음 속에서 18세 그대로이다.

꽂이 피는 동안, 꽃이 지는 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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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성본부 iso 심사원으로 오마이뉴스 창간 시 부터 글을 써왔다. 모아진 글로 "어머니,제가 당신을 죽였습니다."라는 수필집을 냈고, 혼불 최명희 찾기로 시간 여행을 떠난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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