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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아니스트 김정원
ⓒ 김정원 홈페이지
피아니스트 김정원의 연주를 두고 머라이 페라이어는 그의 따뜻한 감성을, 폴 바두라 스코다는 논리적인 해석을, 아담 하라셰비치는 다양한 음색을 이야기했다.

2000년 쇼팽 콩쿨 때 폴란드 음악협회 자문 평론가 얀 포피스에게 '진정한 우승자'로 찍혀, 역대 우승자만 설 수 있는 초청 연주회 무대에 섰던 '이변'의 주인공. 화제와 찬사와 인기가 늘 그를 따라다닌다.

국문과 교수 아버지도, 유명 드라마 작가인 어머니도, 그 누구도 음악을 시킨 적이 없었다. 그에게 다가온 최초의 음악은 TV 만화영화 주제가.

"말도 트이기 전부터 음악만 나오면 그 앞에 붙어 앉아 몇 시간이나, 밥 안 줘도 아무 소리 없이 그렇게 잘 놀 수가 없더래요. 5살 때 피아노 학원과 붙어 있는 유치원엘 들어갔는데 1주일에 1번, 10분씩 맛보기로 '도레도레'를 배우게 됐어요. 재밌는 건 그것뿐인데 너무 목이 말랐어요. 매일 피아노만 치고 있는 애들이 부러워서 유치원 중퇴하고 학원으로 옮겼지요."

혼자 남아 연습하길 좋아하는 사내아이의 별난 구석은 당시 원장 선생님의 눈에 띄어, 막 독일 유학에서 돌아온 조치호 교수(중앙대)와의 만남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후 한국일보 콩쿨, 아시아 국제 청소년 음악 콩쿨 등에서의 우승으로 재능을 입증하던 김정원은 예원학교 3학년(15살)때 혼자 오스트리아 유학을 떠났다. 그리고 빈 국립음대 최연소 수석 합격자가 된다.

92년 엘레나 롬브로 슈테파노프 국제 피아노 콩쿨, 93년 동아음악콩쿨, 97년 뵈젠도르퍼 국제 피아노 콩쿨, 그밖에 여러 수상 경력에서도 짐작되듯 그는 타고난 '무대 체질'이다.

무대 위에서의 긴장감과 스트레스를 '쾌감'으로 여길 수 있다는 말. 어려서부터 잘 나섰고, 중심에 있는 걸 즐기고, '나'를 내보이면서 튀어야만 했던 성격이다. 학생 시절부터 유럽 주요 무대에서 입지를 다져온 김정원의 데뷔 무대는 빈 악우협회 황금홀에서 쇼팽 피아노 협주곡 1번(빈 아카데미 심포니 오케스트라 협연).

빈 국립음대 최우수 졸업 후엔 파리 고등 국립 음악원 최고 연주자 과정에 들어간 최초의 한국인으로, 이번엔 거장 자끄 뤼비에에게 찍혀서 제자가 됐던 그였다.

"빈 국립음대 학부 졸업시험이었는데 시대별로 프로그램을 짜서 1시간 리사이틀을 하는 거였어요. 속된 말로 미스터치 하나 없이, 할만큼 다하고 내려와 스스로도 흡족했고 사람들 반응도 좋았지요. 백 명 넘는 학생 가운데 하나 나올까 말까하다는 디스팅션(최우수 타이틀)도 받았는데 저의 선생님(미카엘 크리스트)만 기쁜 기색이 아니셨어요. 실망했다고 하시더군요.

우리가 5년간 공부하며 같이 만들어온 게 저건가 싶으셨다고.

'네 연주엔 바흐도, 모차르트도, 베토벤도 없었다. 오직 김정원만 있더라. 나는 이런 음색을 가졌다, 나는 이렇게도 할 수 있다…경우에 따라서 네 연주를 아름답다고 느낄 수도 있다. 나는 생머리 소녀 같은 음악의 순수함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데 너의 음악은 향수냄새 진동하는 40대 여인처럼 아름다웠다'고 하셨어요.

그땐 역시 훌륭한 우리 선생님, 괜히 딴지 거신다 정도로 넘겼었는데, 나이를 쪼금 먹으니까 그 말씀에 고개가 숙여집니다."

어깨에 힘 빼기, '나'를 빼기가 그는 참 힘이 들다. 맥아리가 없고 맛이 없어지는 것 같아 불안하기도 하고. 연습 때 아무리 노력해도 무대 위에서 순간적으로 다 다시 들어가기도 한단다.

"음악의 순수함은...지금도 싸우고 있는 부분이어요. 정말 마음을 비우고 연주하는 게 쉽지가 않아요. 이번에 연주하는 라흐마니노프는 그나마 괜찮지만, 브람스 협주곡은 힘들었어요. 향수냄새 나게 해버리면 음악 자체가 망가지니까요."

무대체질로서의 장점이 또한 '힘빼는' 각별한 노력이 필요한 단점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피터 프랭크의 베토벤 소나타 연주회에 갔었어요. 미동 하나 없이 가만히 앉아서 연주를 해요. 코고는 소리도 들리고, 끝나고 '지루했다', '앉아 있기 힘들었다'는 사람도 있었는데 저는 그 연주 듣고 울었어요.

무용담 늘어놓는 말재주꾼이 있고, 조용조용 별로 그 얘기에 끌리지 않게 말하는 사람도 있죠. 그런데 귀기울여 듣다 보면 그 얘기 자체에 감동을 받게 되는… 내가 저런 연주를 할 수 있다면, 몇몇 사람을 재울지언정 진솔하게 연주하고 그 연주에 귀기울인 사람들은 듣는 그런 연주, 자신의 눈물 연기로 관객을 사로잡는 게 아니라 영화 자체의 슬픔으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상황 그 자체로 관객을 울리는 배우처럼, 음악 뒤로 빠져 있는 연주자가 되고 싶습니다. 자신이 울고 웃기보다 담담하게 얘기하는데 그로 인해 청중이 울고 웃는, 그런 연주자요."

5월 22, 23일 KBS교향악단과 라흐마니노프 2번 협연

김정원은 현재 오스트리아 빈에 살면서 유럽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올해는 1월 영국, 3월 오스트리아, 4월 헝가리와 폴란드에서 연주했다. 5월 22, 23일 KBS교향악단과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2번을 협연한 후에는 바로 독일 연주회가 잡혀 있다.

"구조에 강한 오스트리아·독일의 전통과 프랑스 음악의 탐미적 감성을 두루 갖춘, 신체 조건까지 완벽한 준비된 피아니스트"로 각종 매체에 소개되며 귀국 독주회를 가진 2001년 가을 이후 국내 활동도 활발했다.

내년부터는 유럽, 미국, 일본 공연이 많아지겠지만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은 곳이기 때문에' 1년에 한 번은 꼭 들어올 생각이라고. 재작년 첫 번째 음반(쇼팽 스케르쪼 외 수록)이 나왔고 올 8월엔 브람스 소나타, 9월엔 NDR 하노버 라디오 심포니와 차이코프스키와 라흐마니노프의 협주곡을 녹음할 예정이다.

여행, 사람, 책, 영화, 먹는 것, 느끼는 것, 피아노 이외에 좋아하는 게 너무 많아 전에는 피아니스트라고 말하기 민망할 정도였는데 요즘은 정말 짬이 없다. 그럼에도 건조해지지 않을 수 있는 근원적인 힘, 상상력 같은 것은 어쩌면 그런 경험들 덕분이라는 생각도 한다.

"음악엔 다양성과 취향이 인정되지요. 어느 수준 이상 도달하면 그 다음부터는 옳고 그름이 아니잖아요. 같은 작곡가, 같은 음악도 어떤 각도로 보느냐에 따라 이 음악도 나오고 저 음악도 나온다는 생각을 이제는 합니다. 중요한 건 연주자가 우선 음악을 솔직하게 느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걸 무대에서 청중에게 전한다는 거지요. 어떻게 전하느냐에 따라 또 완전히 다른 스타일이 나오기 때문예요.

무대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연주자가 있고, 그저 책 읽어주는 것 같은 서술형 연주자도 있어요. 간혹 놀라운 테크닉, 충격적인 플레잉에 청중들이 속는 경우도 봅니다. 1시간 30분 연주회 동안은 익사이팅할 지 모르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 뒤끝처럼 남는 게 없다면 음악은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잠자리에 들어서까지 멍하게, 며칠 갈 만큼 가슴속에 남는 것이 있어야 하는 거라구요."

내일 모레 서른인데 아직도 그런 감동이 있냐는 물음에 그는 "저는 아직 어린가봐요"라며 웃는다. 95년 쇼팽 콩쿨 우승자인 피아니스트 필립 귀지아노가 '카리스마와 진실함과 자연스러움이 함께 살아있다'고 평한 청년 피아니스트의 매력, 그 중에서도 결정적인 것은 음악을 대하는, 그리고 사람을 대하는 그의 자세에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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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기 기자만들기 과제 수행을 위해 가입함. 일기체, 수필체로 할 수 있는 잡다한 이야기. 주관심사는 사람과 문화. 근성이나 사명감은 거의 맹물 수준. 훈련을 통해 오마이뉴스의 다양성과 열린 진보 사회를 위한 실뿌리로서 역할을 다하며 의미있게 살다죽길 희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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