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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에 있는 서원

김포 안내 책자를 살펴보다 저의 두 눈이 머문 곳은 '우저서원'이라는 네 글자였습니다. '조선 사림양반들의 정신적 고향이자 향촌사회 기반역할을 한 곳' '학문 연마와 성현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던 곳'
서원이란 곳에 대한 저의 짧은 지식을 정리해봅니다.

▲ 우저서원 앞
ⓒ 정왕룡
서원하면 안동이나 풍기를 자동적으로 떠올리며 고즈넉한 향촌의 분위기를 연상하는게 습관화되다시피한 저에게는 서울근교 김포에 있다는 서원 방문은 가슴이 설레이는 것이었습니다.

'우저서원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서원에 배향된 인물은 한 명일까? 여러 명일까?' '그 인물은 김포와 어떤 관련이 있을까?'

서원의 중심기능 중 하나가 유교성현에 대한 제사이고 보면 우저서원에 모신 인물은 분명 조선왕조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인물일 것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고향이 되었건 아니면 관직을 맡았건 그도 아니면 말년에 은거하며 학문연마와 후학 양성에 힘썼던 곳이건간에 연고가 있는 고을에 서원은 자리잡기에 온갖 궁금증을 가지며 주소에 표기된 감정동으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아! 중봉 조헌

그곳은 조선시대 온몸으로 선비정신을 실천한 중봉 조헌의 혼이 깃든 곳이었습니다. 기호학파 율곡 이이의 수제자로 임진왜란때 의병장이 되어 금산벌에서 장렬히 산화한 사람.

▲ 우저서원 현판
ⓒ 정왕룡
그 중봉 조헌이 태어나 어린시절을 보냈던 곳이 바로 이곳이었고 그는 훗날 다시 통진현감으로 김포와 인연을 맺었던 것입니다. 지금은 통진이 김포의 한 면에 불과하지만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한강하류 뱃길의 중심지 역할을 하면서 서해로 들고나는 핵심포구로 번성하던 곳입니다.

그러고 보면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도시나 마을도 그 번성함과 쇠락의 굴곡이 느껴져 씁쓸함이 밀려옵니다.

통진현감 조헌!
오늘날로 치면 김포시장격에 해당될 터인데 '형벌을 남발'한다는 죄목으로 탄핵을 받아 유배길에 올랐다는 기록을 보면 김포와 맺은 인연이 그리 따뜻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선비정신의 상징인 '강직함'과 현실정치에서 요구되는 '유연함'이 서로 충돌할 때 중봉 조헌은 전자쪽을 주저없이 택했나 봅니다.

▲ 담장너머로 본 우저서원 내부
ⓒ 정왕룡
그후로도 그는 스승 율곡 이이가 부당한 탄핵을 당하는 현실에 맞서 정면으로 항의하다가 또다시 파직과 유배생활을 되풀이 했으니 현실정치인으로서의 삶은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저서원 정문앞에 섰습니다.
굳게 닫혀있는 정문 옆 담너머로 안을 들여다보니 생각보다는 아담한 규모였습니다. 나즈막한 야산 경사진 언덕따라 쌓아올린 몇 칸 안되는 건축물은 숙종임금으로부터 현판을 하사받았다는 사액서원의 품격에 맞지않게 웬지 초라해보입니다.

하지만 규모에 연연해하는 나의 시각 자체가 외형적 화려함을 거부하는 선비정신의 본질을 훼손하는 부끄러운 생각일지 모를 일입니다. 우저서원 뒷산 중턱에 올라보니 김포의 너른 들녘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중봉 선생은 통진현감에 부임할 때 저 들녘을 가로질러 지나갔을 것입니다. 유배의 길에 올랐을 때도 역시 저 들판을 지나갔겠죠. 아니면 통진나루를 이용해 한강 뱃길을 타고 오갔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5월 한낮의 더위에도 아랑곳 않고 400여 년 전의 역사의 흔적을 상상해보는 한 소시민의 감상은 해질녘까지 이어집니다.

▲ 우저서원 뒷산에서 김포들녘을 바라보다
ⓒ 정왕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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