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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
노무현 대통령 ⓒ 청와대 제공
기자는 정치개혁을 바라는 노 대통령의 충정을 십분 이해한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에서 이 편지를 읽는다면 크게 문제삼을 만한 내용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다. 어쩌면 편지의 주제가 되고 있는 노 대통령의 정치개혁 의지를 국민의 처지에서 격려해야 할 필요성까지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 개혁이란 것도 궁극적으로 민주주의 원칙에 접근하려는 우리들의 노력이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이 편지에는 도저히 간과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다.

기자는 이 편지형식의 글이 왜 이처럼 미묘한 시기에 나왔는지는 관심을 쏟지 않겠다. 다만 기자는 위 인용구에 함축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메시지가 민주주의의 본질과 충돌할 수도 있는 위험한 이데올로기라는 사실을 지적하고자 한다.

자본주의는 사적인 이익과 사적인 욕망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노 대통령과 같은 처지에서 공익(노 대통령은 '국익'이라는 표현을 더 좋아하는 것 같다)이 바로 이 '사리사욕'의 대립을 통해서 드러나고 형성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부인할 경우 중대한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이러한 견해의 결론은 공익은 사리사욕과 무관한 신성한 이념의 실천이라는 독단적 결론으로 향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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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들은 이 결론이 위험하지 않다고 생각하는가? 우리가 만약 이 결론을 맞다고 하는 순간 이제 우리는 민주주의 원칙을 토대부터 무너뜨릴 수밖에 없다. 우리는 아마도 '보상없이' 개인에 대한 사리사욕을 포기하라고 강요하기 시작할 것이다. 박정희 시대 그린벨트 성공사례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해관계가 맞서 있는 모든 사안(혐오시설물을 상기하기 바란다)에 대해 사리사욕을 '보상없이' 탄압하기 시작할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우리는 이제 계급적 이해관계에 뿌리를 둔 계급정당을 사리사욕의 이름으로 규탄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아마도 '노무현의 국익'이 사리사욕의 너머 어딘가에 신성한 모습으로 존재할 것이라는 환상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만약 실제로 그것이 존재하지만 인식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라면 그래도 위안이라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역사는 그보다 훨씬 가혹했다. 모든 파시즘의 논리가 사리사욕 너머의 국익을 선전했지만 그런 것은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도대체 노 대통령은 어디서 배움을 얻고 있기에 "집단과 집단의 힘겨루기 양상"과 단절된 어떤 신성한 곳에 국익이 존재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는 것일까?!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는 인권변호사"는 자신의 과거를 자랑할 때만 등장하는 경력이고 "대통령으로서 국정을 할 때는 그 누구에게 어느 한 쪽으로 기울 수 없습니다"하고 말해야 하는 것일까?

노무현 대통령의 이라크파병 관련 4월 2일 국회연설. 그는 이 국회가 '잡초들의 사리사욕' 너머에 존재하는 '신성한 국익'으로 가득 차기를 바라고 있는 듯하다.
노무현 대통령의 이라크파병 관련 4월 2일 국회연설. 그는 이 국회가 '잡초들의 사리사욕' 너머에 존재하는 '신성한 국익'으로 가득 차기를 바라고 있는 듯하다. ⓒ 오마이뉴스
모든 대통령이 이런 태도를 보여야 한다면 우리가 굳이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는 인권변호사"를 대통령으로 뽑아야 하는 이유가 뭐란 말인가? 모든 정당이 사리사욕 너머의 신성한 곳에 국익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굳이 여러 개의 정당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가 뭐란 말인가?

기자는 노 대통령이 파시스트라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자는 많은 우리 국민들이 그렇듯이 "정치와 통치는 다릅니다"하고 말하고 있는 노 대통령도 파시즘의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흔적이 있다고 생각한다.

다음으로 사리사욕의 잡초 정치인을 대하는 노 대통령의 태도이다. 노 대통령은 사리사욕을 국익과 무관한 대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 사리사욕의 담지자들이 국민의 대표임에도 불구하고 잡초로 비유하며 뽑아버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즉 노 대통령은 사리사욕이 대립 속에서 타협해야 할 대상이 아닌 국익을 침해하는 대상이라고 전제하고, 그 사리사욕을 담지하는 잡초정치인 역시 대립 속에서 타협을 통해 지양해야 할 담지자로서가 아니라 뽑아버려야 할 악이라고 본 것이다.

여기서 잠깐! 기자는 놀랍게도 노 대통령과 문제의 수구세력 사이에 공통점을 발견한 셈이다. 노 대통령도 그리고 수구세력도 역시 극단적으로 사리사욕 없는 국익(대립없는 화합)이라는 용어를 좋아한다. 그래서 노 대통령과 그들 모두 사리사욕을 대립 속에서 지양해야 할 무엇으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사리사욕'에 딱지를 붙여 정치의 바깥으로 배제하려 한다. 한쪽에서는 붉은 딱지를 붙이고 한쪽에서는 잡초의 딱지를 붙이고.

기자 역시 자격 없는 정치인들이 이 땅에서 사라져 줬으면 좋겠다. 그러나 기자가 타협을 고려치 않고 우선적으로 사라지기를 바라는 정치인들은 노 대통령의 주장처럼 사리사욕의 정치인들이 아니라 사리사욕의 정치 그 자체를 인정치 않고 그들을 국민(정치) 바깥으로 배제시키려는 수구세력들이다. 이러한 태도는 헌법정신을 파괴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타협없는 투쟁으로 사라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리사욕 그 자체인 '잡초 정치인'들은 이런 식으로 딱지를 붙여 제거해야 한다고 선언할 수도 없고 또 그렇게 제거될 수 있는 대상도 아니라고 본다. 왜냐하면 그들을 만들어낸 원인이 바로 우리들 자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이 정치과정 속에서 사리사욕을 추구하고 있다면 그것은 개인적 사리사욕일 뿐만 아니라 지역구 유권자의 사리사욕을 반영하는 측면도 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우리의 정치과정 속에서 면면을 바꿔 끊임없이 사라지지 않고 존재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그들은 배제의 대상이 아닌 투쟁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들이 정치인으로서의 개인적 타락 때문에 비난받아야 한다면 당연히 선거과정을 통해 지역구 유권자들이 판단하고 결정할 일이다. 한마디로 그들에게 딱지를 붙이는 일보다 그들이 이 땅의 정치를 혼탁하게 만들지 않도록 합리적인 제도를 만드는 일이 더 시급하다.

노무현 대통령의 '잡초정치인' 발언을 반박하고 있는 한나라당의 박종희 대변인 등. (정치가 계속되는 한 결코 사라지지 않을) '잡초정치인'은 배제의 대상이 아니라 투쟁의 대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잡초정치인' 발언을 반박하고 있는 한나라당의 박종희 대변인 등. (정치가 계속되는 한 결코 사라지지 않을) '잡초정치인'은 배제의 대상이 아니라 투쟁의 대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 오마이뉴스 최경준
노 대통령은 헌법 제1조를 강조했다. 헌법 제1조는 '대의민주주의'에 의해 실현된다. 즉 선량들은 자유위임의 논리에 의해 의사결정을 하면서도 동시에 유권자들의 구체적 이해관계를 반영해야 한다. 우리가 지금 고민할 것은 그들을 뽑는 선거과정이다.

상향식 공천절차와 평등선거가 필수조건이다. 평등선거는 동일표수의 투표권, 지역구간의 인구편차의 동등, 정당의 득표율과 의석점유율의 비례라는 세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만 한다.

만약 이런 조건이 갖추어질 수만 있다면 어떤 선량들을 뽑을 것인가는 지역구의 주민들이 '사리사욕'을 통해 결정해 나갈 것이다. 노 대통령이 싫어하는 그 사리사욕이 곧 정책공약이다. 노 대통령은 "이익집단은 있지만 집단이기주의가 없는 대한민국"을 꿈꾼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집단이기주의를 실현하지 않으려면 왜 이익집단이 필요한가?

노 대통령은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지만 국가와 민족 앞에서는 한 발 물러서는 대한민국"이라는 희망을 말한다. 기자는 '각자의 이익과 국가와 민족이 분리되어 언제나 각자의 사리사욕에 희생을 강요하는 대한민국'이 결코 희망이 아니다. 기자의 희망은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대립과 타협의 결과물이 곧 국가와 민족'인 그런 대한민국을 원한다.

노 대통령은 대통령이 되자마자 국가주의의 화신이 되어 있는 듯하다. 사리사욕과 별개인 국익! 사리사욕에 우월한 국가! 국내정치에서조차 국익을 말하는 대통령! 노 대통령은 바로 이런 정치인들로 국회가 가득 차기를 바라는 것인가? 기자는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기자는 이런 대한민국에서 벗어나기만을 바라고 있었건만 우리의 대통령은 이런 대한민국만을 꿈꾸고 있었다니.

기자는 노 대통령이 국민에게 보낸 편지의 주제가 정치개혁에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지지한다. 그렇지만 편지는 온통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문장과 '전' 인권변호사의 국가주의적 결심으로 가득 차 있다. 이러한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수십년 파시즘의 영향으로 간단히 넘겨버리기에는 불안하고 실망스런 마음을 감출 수가 없다.

노 대통령 임기가 끝난 다음에도 우리의 삶은 계속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을 민주적인 표현과 민주적인 제도를 통해 보장받아야 한다. 이것이 어쩌면 이벤트처럼 잡초정치인들을 뽑아내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일 수 있다. 정치개혁도 좋지만 두 번 다시 이런 스팸메일은 받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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