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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생가' 마을을 알리는 표지석
'윤동주 생가' 마을을 알리는 표지석 ⓒ 박도
명동촌

12시 30분, 항일 독립운동 요람지 용정(龍井) 시가를 벗어나 30여 분 비포장도로를 더 달린 끝에 마침내 윤동주(尹東柱) 시인이 태어난 명동 마을에 이르렀다.

동네 들머리에 ‘윤동주 생가’라고 새긴 큰 바위 덩어리가 세워져 있어서 쉽게 마을을 찾을 수 있었다.

이곳은 아직도 1930년대의 초가집들이 듬성듬성한 20여 호 정도의 자그마한 마을로, 시심이 저절로 우러나올 만큼 주변 산수가 빼어나게 아름다웠다.

명동촌 언저리 산수
명동촌 언저리 산수 ⓒ 박도
이 명동 마을은 사방이 산으로 병풍처럼 둘러싸인 분지로써 퍽 아늑했다. ‘인걸은 지령(地靈)이라’ 하더니, 이렇게 아름다운 고장이었기에 위대한 시인이 탄생했나 보다.

윤동주 시인의 생가는 큰 도로에서 좁은 길로 100여m 내려가자 명동 교회와 나란히 붙은 첫 집이었다.

교회 들머리에는 마을 주민 대여섯 분이 카세트테이프를 틀어놓은 채, 낯선 방문객을 호기심 어린 눈길로 바라보았다.

개가 하품을 할 정도로 무료하고 조용한 마을에 문명의 소리 -카세트에서 흘러나온 랩 음악-는 그곳을 찾은 나그네에게는 한낱 소음으로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마을 주민들로서는 방문객을 환영하기 위해 틀어놓은 음악인 지는 몰라도.

명동 교회 옆 종을 걸어두었다는 나무와 김약연 선생 송덕비
명동 교회 옆 종을 걸어두었다는 나무와 김약연 선생 송덕비 ⓒ 박도
생가로 가자면 교회 마당을 거쳐야 했다. 교회로 들어서자 두 젊은이가 불쑥 나타나서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두 사람 다 조선족 청년으로 우리말이 유창했다.

한 젊은이는 비치파라솔을 펴놓고 그곳 특산물인 삼베, 약재 따위를 좌판에 잔뜩 늘어놓았다. 나는 예의상 좌판의 상품을 설핏 훑고는 교회 한 쪽에 있는 비석에 눈길을 돌리자, 다른 한 젊은이가 얼른 앞장서면서 친절하게 안내했다.

그 비석은 명동 교회를 세웠던 목사요, 독립운동가이며, 명동소학교 교장이었던 김약연 선생 송덕비였다. 유감스럽게도 비석 머리 부분은 떨어져 나갔다.

비석 바로 뒤편에는 100여 년을 더 지났을 고목이 녹음을 잃지 않은 채, 우람하게 서 있었다. 젊은 날 윤동주가 이 교회에서 봉사할 때는 교회 종을 이 나무에 매어두고 종을 울렸다고 했다.

교회는 단층 한옥 건물로 벽은 회칠을 한 기와지붕이었다. 안내하는 청년이 건네준 ‘명동교회당 건물 소개’ 팸플릿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명동교회는 창립 당시인 1909년에 8간 집을 사서 예배당으로 사용하다가 1916년에 김약연 목사의 주선 아래 지금의 명동교회당 건물을 세우게 되었다.

명동 교회 예배당
명동 교회 예배당 ⓒ 박도
명동교회당 건물은 연변에서 가장 일찍이 세워진 건물 중의 하나로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1993년 4월, 룡정시 지산동 명동촌이 룡정시 관광점으로 된 후 룡정시 인민정부에서는 명동교회당 건물을 문물보호단위(문화재 보호)로 명명하였으며 지산향 인민정부에서는 한국해외민족연구소의 협찬으로 1994년 8월에 새롭게 수선하였다.

1994년 8월 29일
룡정시 지산향 인민 정부

【시인 김규동 선생의 김약연(金躍淵) 선생에 대한 회고담】

비석 머리가 잘린 김약연 선생 송덕비
비석 머리가 잘린 김약연 선생 송덕비 ⓒ 박도
김약연 선생은 너그럽게 생기신, 머리가 하얀 노인으로 일 년에 두어 번 종성 우리 집에 오셨지요.

병원을 경영하시던 아버님이 김약연 선생님 오실 때는 그때 돈 200원 혹은 300원을 독립자금으로 내놓곤 하시는 걸 저는 어릴 때 보고 자랐습니다.

제 아버님은 문익환 목사의 선친 문재린 목사와 명동학교 동창이었다고 합니다.

이런 일 때문에 아무 것도 모르시는 우리 어머니는
“너희 아버지는 돈 없는 사람한테는 약값도 받지 않고 치료하고, 겨우 겨우 먹고살 만큼 돈푼이나 모아놓았는가 하면 감약연 선생님 오시면 지전으로 곱게 인두로 다려서 그것을 흰 수건에 곱게 싸서 무릎을 꿇으시고 선생님한테 내놓으셨단다.

그리고는 너희들한테는 된장국이나 좁쌀 밥만 먹였단다.

규동아, 너는 입쌀밥이 그토록 먹고 싶다하지만 아버지가 좁쌀 밥하라는 데 너만 입쌀밥 어떻게 먹일 수 있겠느냐?”

어머니는 이와 같은 하소연 같기도 하고, 탄식 같기도 한 이야기를 더러 하셨지요.

지금 생각하면 어머니는 독립운동이 어느 만큼이나 중하고 급한 것인지를 모르시는 탓으로 하신 말씀으로 생각합니다.
- 2000년 11월 7일 김규동. 필자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김규동 선생님의 편지
김규동 선생님의 편지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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