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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남아있는 진달래가 가는 봄을 아쉬워하고 있다
아직 남아있는 진달래가 가는 봄을 아쉬워하고 있다 ⓒ 최성수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맘때면 눈길을 휘어잡는 조팝나무 꽃이 골짜기에 가득했습니다. 차창을 열면 조팝나무의 달콤하고 향긋한 내음이 콧속으로 마구 밀려와 저절로 차를 내리게 만들었습니다. 아무 데나 잘 자라고, 아무렇게나 심어도 철이 되면 꽃을 피우는 조팝나무의 강인한 생명력과 향기로움은 늘 경이롭습니다. 나도 저 조팝나무 꽃잎처럼 세상의 어느 한 곳을 향해 흩날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바라보는 봄 골짜기는 더욱 싱그러웠습니다.

“여기는 봄이 짧아. 봄하고 여름이 한꺼번에 오는 곳이지.”

한 낮에는 찌는 듯한 더위가 밭을 달구고 있었습니다. 그 더위 속에서 고추 밭을 일구던 아버지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며 땀을 닦으셨습니다.

일요일 오전에 콩을 심었습니다. 한 구덩이에 세 알씩 콩을 심고, 흙을 덮으며 ‘올해도 무성하게 잎을 피워 한 여름 땡볕 잘 견뎌내고, 가을에는 주렁주렁 이 열리기를’ 기원했습니다.

한창 콩을 심느라 허리를 펴고 굽히고 하는데 갑자기 자동차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좀체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는 골짜기기는 하지만, 때로는 영월로 넘어가는 임간 도로를 찾는 사람들이 잘못들어 이 골짜기로 오기도 하니, 나는 또 그런 사람들이려니 심드렁한 마음으로 차를 바라보았습니다.

차는 모두 두 대였습니다. 큰 봉고형 차와 일반 승용차였는데, 길을 잘못 든 사람들은 우리 집을 지나쳐 조금 더 가다가 막힌 골짜기라는 것을 알고 되 내려오는 법인데, 이 차들은 우리 마당 가에 멈춰 섰습니다.

조팝나무꽃-나도 세상에 저 조팝나무 꽃잎 하나처럼 날리고 싶다
조팝나무꽃-나도 세상에 저 조팝나무 꽃잎 하나처럼 날리고 싶다 ⓒ 최성수
그러더니 차에서 열 명 남짓한 사람들이 내렸습니다. 울긋불긋한 등산복 차림에 남녀가 어우러진 그 사람들은 나를 못 본 것인지, 아니면 보고도 못본 체 하는 것인지, 서로 큰 소리로 떠들면서 산으로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요즘은 산불 조심 강조 기간이라 원래는 산속 출입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면에서는 입산 금지 팻말과 함께 나무에 길게 줄을 연결해 산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해 놓았지만, 사실 지키는 사람들도 별반 없습니다. 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힐끗 금지 선을 보기만 하고는 그냥 우리 집 마당가를 돌아 산을 향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집 마당가를 돌던 한 사람이 집 옆 언덕으로 올라가더니 두릅나무에 다가가 채 자라지도 않은 두릅을 똑 따버렸습니다.

콩 밭에 있던 나도, 마당가에서 빨래를 널던 아내도 깜짝 놀랐습니다. 자전거를 끌던 늦둥이 녀석도 놀랐는지, 나를 향해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빠, 저 사람들이 두릅 따요.”

그 두릅나무는 아버지께서 산속에 들어가 캐다 심으신 것입니다. 집 뒤에 심어두고, 봄철이면 두릅 맛이라도 보게 하려고 일부러 기른 나무이니, 우리 늦둥이도 무척 섭섭한 마음이 든 것 같습니다.

“남의 집 두릅을 따면 어떡해요?”

다른 나무에 다가가 또 두릅을 따려던 그 사람들은 내가 소리를 지르자 그만 무르춤해져서 산속으로 가버렸는데, 딴 두릅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습니다. 정작 두릅을 딴 사람은 아님보살 사라지고, 오히려 뒤에 따라가던 다른 사람이 나를 향해 ‘아, 미안합니다’하며 고개를 숙이고는 가버렸습니다.

나는 다시 콩밭에 엎드려 콩알을 심었는데,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습니다. 하루 종일 골짜기에는 자동차들이 들락날락하며 조용하던 골짜기를 시끌벅적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모두들 산나물을 뜯으러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홑잎나무의 잎을 모조리 훑어가는 사람도 있었고, 산으로 들어간다고 남이 심어놓은 도라지밭을 마구 짓밟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점심을 먹는다고 이곳저곳에 주저앉아 떠드는 것까지는 좋은데, 그들이 떠난 자리에는 어김없이 쓰레기나 비닐 따위가 흩날리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미 다 패어버려 먹을 수도 없는 고비를 낫으로 베어가기까지 했습니다.

“아휴, 말도 마세요. 나물 뿌리까지 다 뽑아 가는 사람들 천진데요 뭐.”

골짜기 밭을 갈기 위해 트랙터를 몰고 온 친척 동생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습니다.

“나물도 정도껏 뜯어야지 저 정도 되면 너무 심하네.”
“나물 씨가 마르겠어요.”

내 말에 아내도 사람들이 사라진 산 속을 바라보며 한마디 했습니다.

“우리 같은 시골 사람들은 나물 먹어볼 틈도 없어요. 나물철이면 농사가 막 시작되는 판인데, 어느 겨를에 나물 뜯으러 가기나 하겠어요? 팔자 좋은 도시 사람들이나 나물 뜯어 먹는거지요.”

그런 말을 남기고 바쁘게 산비탈 밭으로 트랙터를 몰고 사라지는 친척 동생의 어깨가 유난히 지쳐 보였습니다.

나물 뜯는 처녀의 노래 소리에 봄이 오던 그 시절로부터 이제 우리는 너무 먼 길을 걸어왔는지도 모릅니다. 나물 뜯는 처녀가 아름다웠던 것은, 겨우내 먹을 것 변변치 않은 곤궁의 계절을 견뎌내고, 마침내는 생명이 살아나는 봄이 왔다는 기쁨 속에서 가능했던 일인지도 모릅니다.

나물도 생명인데, 뿌리째 뽑거나 다시는 움이 돋지 못하도록 줄기까지 잘라가는 것도 못할 짓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저 재미 삼아 한 입 거리 정도 뜯고, 봄 하루의 햇볕과 싱그러운 초록빛 세상을 즐길 줄 아는 여유를 가진 사람들을 보고 싶은 것은 이 봄날 내가 꾸는 한바탕 꿈일 뿐일까요?

나는 콩을 다 심고 난 휴일 내내 제 순을 빼앗기고 앙상한 가시만 매단채 다시 겨울로 돌아가버린 마른 두릅나무 가지를 바라보며 그런 생각에 잠겨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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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장다리꽃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랑은>, <천년 전 같은 하루>, <꽃,꽃잎>, <물골, 그 집>, <람풍>등의 시집과 <비에 젖은 종이 비행기>, <꽃비> , <무지개 너머 1,230마일> 등의 소설, 여행기 <구름의 성, 운남>, <일생에 한 번은 몽골을 만나라> 등의 책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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