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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골반일전적지' 기념비
'봉오골반일전적지' 기념비 ⓒ 박도
봉오골 반일전적지

두만강에서 도문으로 돌아오는 길에 봉오동 항일 전적지를 찾았다. 봉오동은 도문에서 불과 30리 정도 떨어진, 우리나라와 중국 국경에서 무척 가까운 곳에 있었다.

봉오동으로 가는 들머리에서 총소리가 들렸다. 웬일인가 싶어 그 언저리를 살폈더니 사격장이 있어 민병대인 듯한 수십 명이 사선에서 표적물을 향하여 사격 연습을 하고 있었다.

군인 제복을 입지 않은 일반인 복장이었다. 요란한 총소리는 지난날 치열했던 봉오동 전적지 분위기를 더욱 느끼게 했다. 큰길에서 비포장 좁은 길로 10여 분 달리자 봉오동 저수지 관리사무소가 나왔다.

봉오동 저수지 관리사무소 어귀에 새겨진 '봉오동반일전적지' 표지석
봉오동 저수지 관리사무소 어귀에 새겨진 '봉오동반일전적지' 표지석 ⓒ 박도
봉오동 전적지 일대 계곡은 들머리가 좁고 깊은, 항아리 모양이라서 산등성이에 매복하면 들어오는 적을 포위해서 쳐부수기에는 아주 기가 막힌 천연 요새였다.

지금은 이 일대가 봉오동 저수지로 변해서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다. 다행히 관리 사무소 안에는 '봉오골반일전적지'라는 돌비석을 세워둬서 참배객의 아쉬움을 달래게 했다. 전적비 참배 입장료를 달라고 했다. 외국인에게는 몇 곱절 더 받았다.

이곳은 1920년 6월 7일 항일 명장 홍범도(洪範圖)를 사령으로 한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 :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안무의 대한국민군, 최진동의 군무도독부가 연합부대를 결성한 군단임) 부대가, 우리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하여 두만강을 넘어온 일본군 제19사단 야스가와 소좌가 거느린 부대를 참패시킨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 길이 빛나는 최초 승첩지(勝捷地)이다.

봉오동전투는 사흘 전인 1920년 6월 4일에 있었던, 화룡현 삼둔자(三屯子) 전투에서 비롯되었다. 그날 새벽 30명 가량의 독립군 소부대는 국내 진공작전으로 삼둔자를 출발하여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종성 강양동으로 가서 일제 헌병 순찰소대를 격파하고 돌아왔다.

우리나라  파르티잔의 비조(鼻祖), 백두산 호랑이 홍범도 장군
우리나라 파르티잔의 비조(鼻祖), 백두산 호랑이 홍범도 장군
그러자 일본군 2개 중대는 이를 보복하려고 독립군 추격에 나섰다. 이들은 두만강을 건너 삼둔자에 이르렀으나, 독립군을 발견치 못하자 그 분풀이로 애꿎은 조선족 양민을 무차별 살육했다.

이 소식을 접한 독립군은 삼둔자 서남쪽 산기슭에 잠복하고 있다가 돌아가는 일본군을 섬멸시켜 버렸다. 이에 함경북도 종성군 나남에 주둔했던 일본군 제19사단은 독이 바짝 올랐다. 그들은 삼둔자 전투 참패를 설욕하고,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월강 추격대대’(越江追擊大隊)를 대대적으로 편성했다.

이들 추격대대는 야스가와 소좌 인솔로 6월 6일 밤 9시부터 두만강을 건너 이튿날 새벽 3시 30분에 독립군의 근거지인 봉오동으로 진격해 왔다. 이런 낌새를 미리 알아 차렸던 홍범도 장군은 그들과 교전에 앞서 주민들을 산중으로 미리 대피시켜 마을을 비우게 했다. 그러고는 봉오동 상동 험준한 사방 고지에 독립군 각 중대를 매복시켜 놓은 다음, 추격대대를 이곳으로 유인하여 포위망 속에 가둬두고 일망타진한다는 작전을 세웠다.

봉오동 들머리, 항아리의 주둥이 모양으로 몹시 좁았다. 독립군이 적을 이곳으로 유인하였다.
봉오동 들머리, 항아리의 주둥이 모양으로 몹시 좁았다. 독립군이 적을 이곳으로 유인하였다. ⓒ 박도
홍범도 장군은 독립군 1개 분대를 월강 추격대대가 쳐들어오는 길목에 내보내 교전하는 척하면서 봉오동 골짜기로 후퇴케 하여 그들을 유인했다.

그날 아침 8시 30분 무렵에 월강 추격대 첨병이 독립군 분대의 뒤를 쫓아 봉오동 들머리에 이르렀다. 여기까지 온 일본군 추격대 첨병은 독립군 분대를 놓치고는 봉오동 하동을 정찰한 결과, 독립군이 이미 겁을 먹고 죄다 북으로 도주한 것으로 여겼다.

그들은 추격대 본대를 불러서 하동 마을을 뒤지면서 미처 대피하지 못한 노약자를 살육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들 월강 추격대는 봉오동 하동을 실컷 유린한 다음, 오전 11시 30분에 다시 대오를 정돈하여 중동, 상동을 향하여 진군했다.

그날 오후 1시 무렵에는 일본군 전위부대가 사방 고지로 둘러싸인 상동 남쪽 300m 지점까지 진출하여 완전히 독립군 포위망 속에 걸려들었다. 하지만 홍범도 장군은 곧장 사격 명령을 내리지 않고 주력부대를 묵묵히 기다렸다.

잠시 후, 전위부대에 이어 주력부대도 기관총을 앞세우고 독립군 포위망 속으로 깊숙이 들어왔다. 그제야 홍범도 장군은 일제 공격을 알리는 신호탄을 발사했다. 이에 삼면 고지에 매복하고 있었던 독립군은 일제히 불을 뿜었다. 뜻밖에 기습 공격을 받은 일본군은 필사적으로 돌격해 왔다.

하지만 유리한 지형을 미리 차지한 독립군의 맹렬한 집중 사격과 수류탄 투척으로 일본군 추격대는 사상자만 속출할 뿐이었다. 그들은 독립군 포위망 속에서 3시간 이상 끈질기게 버텼으나 이미 작전상 허를 찔려 시간이 흐를수록 사상자만 늘어날 뿐이었다.

그들은 더 이상 전투는 무모했음을 알아차리고는 후퇴하기 시작했다. 독립군 제2중대장 강상모는 부하들을 이끌고 도주하는 적을 추격, 월강 추격대를 혼비백산케 했다. 통쾌한 승전이었다.

봉오동전투에 대한 전상자(戰傷者) 피해는 독립군 일본군 양측의 주장이 엇갈린다. 비교적 객관적 자료인 당시 중국〈상해시보〉에 따르면 독립군이 일본군 월강 추격대를 150명이나 사살하여 크게 이겼다고 보도했다.

봉오동 전적비는 봉오동 저수지 사무실에서 조금 떨어진 산기슭 아래 조촐하게 세워져 있었다. 나는 이 전적비 제단에다 서울에서 준비해 온 소주를 드린 후, 땅바닥에 엎드려 두 번 큰절을 하고 남은 술은 전적비 언저리에다 뿌렸다. 이 깊은 계곡에서 이름 없이 순국한 무명용사와 무고히 죽어간 양민들의 영령을 진혼하고자 하는 자그마한 정성이었다.

봉오동 들머리 저수지 관리사무소 안에 '봉오골반일전적지' 기념비가 조촐하게 세워져 있었다.
봉오동 들머리 저수지 관리사무소 안에 '봉오골반일전적지' 기념비가 조촐하게 세워져 있었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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