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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빈이가 3등으로 결승점을 통과하는 순간. 자랑스러운 3등이다.
은빈이가 3등으로 결승점을 통과하는 순간. 자랑스러운 3등이다. ⓒ 박철
지난주 금요일(2일), 우리 집 병아리 은빈이가 다니는 지석초등학교에서 어린이날을 맞아 “사랑의 의형제 맺기 체육대회”가 있었습니다. 공식적으로 학부모가 초대되지 않은 학교 자체 행사였지만, 나는 아이들 사진을 찍어주기 위해 참석했습니다.

지석초등학교는 전교생이 40명인 작은 시골학교입니다. 달리기 경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각 학년별로 두 명 아니면 세 명이 달리기를 하는데, 아무리 못 뛰어도 이등 아니면 삼등은 따 놓은 당상입니다. 참으로 좋은 학교이지요. 우리 집 은빈이가 달릴 차례가 되었습니다. 강렬한 태양 빛이 정면에서 비치기에 나는 옆 방향에서 카메라를 들고 서 있었습니다.

선생님의 딱총소리와 함께 1학년 세 아이가 동시에 튀어나왔습니다. 중간 지점까지는 은빈이가 2등이었는데, 거의 결승점에 와서 뒤따라오던 예진이에게 추월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은빈이는 3등이었습니다. 언니 오빠들이 1, 2, 3등을 한 아이들 팔뚝에 도장을 찍어 주었습니다.

그 순간, 불현듯 나의 유년시절이 떠올랐습니다. 나는 어려서부터 달리기에는 소질이 없었습니다. 체육을 아주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는데, 유독 달리기와 줄넘기는 내 적성에 맞지 않았습니다. 6년 동안 가을 운동회를 치루면서 제발 나의 어머니가 내가 달리는 모습을 보지 않았으면 그게 나의 바램이었습니다.

우리 집 4 남매 중, 누나와 밑에 동생들은 달리기에서 꼭 1등을 하는데, 나만 매번 꼴찌였습니다. 나는 꼴찌라는 상처를 극복하기가 매우 힘들었습니다. 어머니는 봄 소풍에는 따라오지 않으셨지만 가을 운동회에는 꼭 오셨습니다. 어머니가 가을 운동회에 오시는 이유는 내가 달리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나가 달리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나의 누나는 릴레이 대표 선수였습니다. 달리기에는 늘 1등이었고, 가을 운동회의 꽃인 1200미터 릴레이 마지막 주자였습니다. 남자보다도 달리기를 더 잘했습니다. 아무리 상대편 선수가 앞선 상태에서 바톤을 이어 받아도 악착같이 뛰어 역전을 하고 맙니다. 운동장이 떠나갈 것 같은 함성소리와 박수소리가 지축을 울립니다. 청백전 마지막 승부가 1200미터 릴레이로 결정될 때가 많기 때문에 나의 누나는 모든 아이들의 우상 같은 존재였습니다.

나는 사람들 틈바구니에 서 계신 어머니를 보았습니다. 나의 어머니는 누나가 자랑스러운 듯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고 두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하신 채 한참동안 서 계셨습니다.

누나는 가을 운동회만 되면 공책이 쏟아져 들어왔지만 나는 달랑 공책을 한두 권을 받아 오는 게 전부였습니다. 나도 1, 2, 3등 깃발 뒤에 서고 싶었고, 내 팔뚝에도 1, 2, 3등 도장을 받고 싶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꿈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에게로 기회가 왔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가을 운동회였습니다. 100미터 달리기 출발선에 아홉 명의 아이들이 서 있었습니다. ‘탕’ 하는 딱총소리가 울려 퍼졌고, 아홉 명 아이들이 앞을 향하여 총알처럼 튀어나갔습니다. 앞을 향하여 젖 먹던 힘을 다하여 질주하는데 내 앞에 여덟 명의 아이가 달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짧은 순간에
‘아, 오늘도 꼴찌구나! 집에 가서 엄마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생각이 얼핏 들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내 앞에 네 다섯 명의 아이들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속으로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결승점을 통과했는데 나는 당당히 3등이었습니다. 선생님들이 내 팔뚝에 3등 도장을 꽉 찍더니 나를 노란색 깃발 뒤에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가을 운동회를 다섯 번 하는 동안 달리기에서 최고의 성적이었습니다.

박아딧줄의 초등학교5학년 가을운동회 줄다리기 장면. 달리기는 소질이 없어도 힘은 장사다.
박아딧줄의 초등학교5학년 가을운동회 줄다리기 장면. 달리기는 소질이 없어도 힘은 장사다. ⓒ 박철
나중에 들어온 아이들이 툴툴거리면서 하는 말을 들었는데 네 다섯 명이 넘어지는 바람에 꼴찌로 달리던 내가 3등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찌 되었던 나는 100미터 달리기에서 3등을 했지만 나의 어머니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도시락만 챙겨 주시고 가을 운동회에 오시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내 팔뚝에 찍힌 3등 도장자국을 수십 번을 넘게 보았고, 땀에 그 도장자국이 지워지지 않도록 조심했습니다. 가을 운동회가 끝나고 나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어머니에게 내 팔뚝을 내 자랑스럽게 내보이면서

“엄마, 나 오늘 달리기에서 3등 했어요!”
“.....?”
“엄마, 진짜예요! 자 보세요. 내 팔뚝에 3등 도장 찍힌 거!”

어머니는 내 팔뚝을 보면서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지으셨습니다.
“그래, 잘했다!”

우리 집 병아리 3등 도장을 받고 노란 깃발에 서 있었습니다. 내가 다가가자 3등이 쑥스러운지 고개를 떨구고 있었습니다.

“괜찮아! 은빈아! 3등이면 잘 한거야!”

대갈통을 왜 앞뒤로 흔드느냐?
당당한 꼴찌

달리기를 지지리도 못하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형제가 4남매 중, 딸 하나 아들 셋 중, 유독 큰 아들만 달리기에 소질이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툭하면 아이들을 데리고 신작로로 끌고가 형제끼리 달리기 시합을 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나이 차이가 나기 때문에 큰 아들이 꼴찌를 하는 건 아니었지만 아버지가 보기에는 영 마음에 안 들어 하는 눈치셨습니다.

딸은 롱 다리인데다 속도가 붙으면 아무리 앞서가는 사람도 금방 추월할 정도로 달리기에 소질이 있었고, 둘째 셋째 아들도 남에게 뒤지지 않을 정도로 달리기를 잘했습니다. 아버지는 달리기를 못하는 큰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야, 이놈아 달리기를 못하는 건 다, 네 엄마 닮아서 그렇다.”
“그리고 왜 달릴 때 대갈통은 앞뒤로 흔드느냐!”


아버지는 아들이 한심하다는 듯 말씀하셨습니다. 소년은 할말이 없었습니다. 자기 딴에 최선을 다해 뛰어 보지만, 남들이 볼 때에는 머리를 심하게 흔들어 우스꽝스럽게 보였던 모양입니다. 해마다 운동회 달리기 시합에서 공책을 받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주눅이 들어 가을 운동회 때 엄마가 오지 말았으면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김밥을 싸갖고 릴레이 최종 주자인 누나를 응원하기 위해 꼭 오셨습니다. 소년은 국민학교 6년동안, 딱 한번 달리기 시합에서 공책 한권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5학년 가을운동회 때 앞서 달린 아이들이 다 넘어져서 간신히 3등을 해본 적이 있었습니다. 3등을 했는데 얼마나 자랑스럽던지.

소년이 자라 어른이 되었습니다. 달리기와 마찬가지로 장가도 남들보다 늦게 갔습니다. 아이들이 주렁주렁 생겼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큰 기대를 걸었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인 아들은 릴레이 대표선수가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한없이 기뻤습니다. 아버지가 이루지 못한 꿈을 아들대신 보상해 주는 듯 했습니다.

아버지는 카메라를 챙겨서 서둘러 남보다 일찍 운동회에 참석했습니다. 아버지는 소리를 지르며 아들을 응원합니다. 카메라를 들이대고 초점을 맞춥니다. 아, 그런데 사랑하는 아들이 길들이지 않은 야생마가 자기 등에 탄 사람을 떨어뜨리려 하는 것처럼 아들은 고개를 앞뒤로 흔들며 겅중겅중 뛰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 저걸 어쩌나 하면서 지켜보는데 눈물이 났습니다. 속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영락없는 내 새끼구나!’

아들이 이를 악물고 뛰는데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달렸습니다. 가을 햇살에 흙먼지 바람이 불었습니다. 아들은 꼴찌로 골인지점에 도착했습니다. 이마에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혔습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보자 미안하다는 듯이 고개를 떨구었습니다. 아버지는 달려가 와락 아들을 안아주면서 말했습니다.

“장하다, 내 아들아!” / 박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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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 기자는 부산 샘터교회 원로목사. 부산 예수살기 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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