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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볕이 좋은 지난 4월 중순 토요일, 가회동 어머니를 찾아뵈었다. 요즘 가회동 어머니는 인천 신흥동 현대 아이파크 아파트에 사신다.

초인종을 누르자 반가운 음성이 들렸다. 음성은 옛 그대로였으나 세월의 흐름은 어쩔 수 없는 듯, 내외 분 -원순식(77), 김호열(82)- 은 그새 백발 노인이 되셨다. 내가 가회동 어머니를 처음 뵌 지는 헤어보니 꼭 42년의 세월이 흘렀다.

나는 중학교까지 고향에서 다녔다. 중학교 졸업식 다음날인 1961년 3월 3일, 이불 봇짐을 짊어지고 구미역에서 서울행 완행열차에 올랐다.

아버지가 편지에 이르기를 서울역에서 택시를 타고 기사에게 가회동파출소까지 데려다 달라고 한 후, 순경에게 주소를 보이면 집을 자세히 알려줄 거라고 했다.

서울역에서 택시기사에게 신신 당부했다. 하지만 그가 내려준 곳은 가회동파출소가 아니라 재동파출소였다. “서울에서는 눈을 감으면 코 베어간다”라는 고약한 인심을 첫날부터 단단히 맛본 셈이었다.

나는 이불 봇짐을 지고 한참 헤맨 끝에 가회동 파출소를 찾았다. 그때 아버지는 가회동 산 1번지 한옥 문간방에 혼자 세 들어 살고 있었다.

이튿날 새벽, 밥을 짓고자 수돗가에서 쌀을 일고 있는데 대청 문이 열리면서 주인아주머니가 뜰로 나오며 인사를 했다.

“어머, 학생이 밥도 다 할 줄 알아?”
나는 너무나 수줍어 고개도 들지 못했다.

전기 고등학교에서 낙방을 한 후, 다행히 후기 고등학교에서는 합격했다. 그 무렵 서울의 명문고교에서는 동일 중학교 출신 지원자는 대부분 다 입학시키고 타교 출신은 한두 반 정도만 뽑았다.

▲ 중년의 가회동 어머니 원순식 님(1981년)
그뿐 아니라 학교마다 정원 외로 보결생을 받아 잇속까지 챙겼다. 하지만 나는 입학금을 내지 못해 입학식 날에는 등교도 못한 채 방문을 닫고 지냈다.

며칠을 그렇게 보내자 낌새를 알아차린 주인아주머니가 입학금을 마련해 주었다. 다음 날 학교에 갔더니 이미 입학이 취소돼 있었다. 사정 끝에 등록을 했다. 교실에 가 보니 60명 정원인데 80명이나 몰려 있었다.

서울에서 고교 생활이 여간 힘들지 않았다. 등록금 독촉, 각종 잡부금, 자질한 교재 준비에 드는 돈 때문에 학교에서 도시 기를 펼 수가 없었다. 그런 중, 친정살이에 지친 어머니가 동생을 데리고 서울로 왔다. 밥하는 일은 면했지만 식구가 늘자 집안 형편은 더 어려웠다.

그해 5월 16일 쿠데타가 일어났다. 어느 날 새벽 형사가 들이닥쳐 아버지를 연행해 갔다. 어머니와 나는 낯선 거리를 헤매며 수소문한 끝에 아버지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것을 알았지만, 무섭던 그 시대에는 뾰족한 방도도 없었다. 암담한 현실에 학업을 중단했다.

우리 식구는 그댁 문간방에서 살았는데, 다섯 살 난 철부지 동생은 끼니때마다 “주인집에서는 찬밥(쌀밥)을 먹는데, 우리 집은 왜 밤낮 보리밥이나 수제비만 먹느냐? 나도 찬밥 먹을 테야”라고 울음을 터트렸다.

그 울음소리에 주인아주머니는 쌀밥 한 그릇과 반찬 한 접시를 문간방으로 보냈다. 그런 일도 한두 번이지 매끼마다 그럴 수 없어서 어머니는 주인집 식사시간이면 동생을 업고서 삼청공원을 한바퀴 돌고 왔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의 눈자위는 벌겋게 부어 있었다.

그때 우리는 신문을 구독하다가 신문 값이 여러 달 밀려서 끊어버렸다. 석간배달시간이면 배달원으로부터 밀린 구독료를 독촉 받았다. 매번 “다음에 오라”라는 말을 하면 그는 몹시 짜증을 부렸다.

하지만 여러 날 반복되다보니 그만 그와 친해져 버렸다. 어느 날 그가 자기는 사정이 있어 신문배달을 그만 두려고 하니 내가 대신 맡으라고 했다. 이튿날 나는 그를 따라 신문 보급소로 갔다. 그날부터 발로 뛰던 3년이 시작되었다.

그해 겨울까지 우리 식구는 가회동에서 살았는데 말이 아니었다. 내 입학금을 빌린 것을 갚지 못해 전세금에서 공제한 후, 사글세로 돌렸지만 다달이 방세를 한 번도 못 줬다.

신문배달을 하던 중, 마침 계동 중앙학교 옆 허름한 함석집에 싼 셋방이 있어서 이사를 하고 난 후 그날 밤 가회동으로 인사를 갔다.

“내가 학생네를 내쫓은 것 같아서 떠난 후 내내 마음이 아팠는데, 일부러 찾아와서 인사를 하니 이제 내 마음이 편해요. 우리 속담에 '말 한 마디로 천냥 빚 갚는다'고 했어요. 지난 일 섭섭해 하지 말고 자주 놀러 와요.”

계동으로 이사 온 뒤 곧 아버지는 서울생활에 지쳤는지 나만 서울에 남겨두고 가족을 데리고 당신의 생활 근거지였던 부산으로 내려갔다.

이듬해 봄, 복학하려고 학교를 찾았다. 지난해 담임선생님이 무척 반갑게 맞아주시면서 내 사정을 물었다.

“어때 내 집에서 나와 같이 지낼까? 내 숙식은 무료로 제공할 테니 배달수입으로 학비나 하고.”

내 사정을 다 듣고 난 선생님은 뜻밖의 제의를 했다. 너무나 고맙고 놀랐다. 눈물이 핑 돌았다.

“저 혼자 충분히 꾸려갈 수 있습니다.”
“오늘 당장 결정 못 하겠거든 내일 우리 집에 와서 결정해.”

이튿날 나는 홍은동 선생님 댁을 찾았다. 선생님과 사모님은 같이 지내자고 했지만, 나는 고마운 제의를 끝내 사양하면서 사실은 가회동 집에서도 같이 지내자고 한 것을 거절했다는 얘기를 했다.

“학교 다닐 때는 남의 신세를 질 수도 있는 거야.”
다음날 선생님은 내 손을 잡고 가회동으로 가서 학생을 부탁한다고 인사를 드렸다.

“선생님, 염려마세요. 저도 학생을 잘 알아요.”

그 이후 나는 가회동 그 문간방에 그댁 아들과 함께 지내면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한번은 내가 고향에 갔을 때, 가회동 아주머니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그 편지에 아들을 하나 더 둔 셈치겠다는 사연이었다.
내가 서울에 정착할 때까지 그댁을 무시로 드나들면서 많은 신세를 졌다.

“42년 전, 제가 학교도 못 가고 두문불출할 때, 입학금을 마련해 주셔서 얼마나 고마웠던지.”
“나는 그때 일을 까마득히 잊었는 데도 여태 기억해 주고, 수십 년이 지났는 데도 늘 잊지 않고 이렇게 찾아줘서 너무 고마워요.”

“회심곡에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선심공덕 하마더니 무슨 공덕 하였느냐 배고픈 이 밥을 주어 기사구제 하였느냐 헐벗은 이 옷을 주어 구난선심 하였느냐 좋은 터에 원을 지어 행인구제 하였느냐 깊은 물에 다리 놓아 월천공덕 하였느냐 목마른 이 물을 주어 급수공덕 하였느냐 병든 사람 약을 주어 활인공덕 하였느냐…’

어머니는 기사 구제를 하고, 입학금이 없어서 학교에 못 간 학생을 학교 가게 하셨으니 분명 염라대왕이 좋은 곳으로 인도할 겁니다.”

“내가 뭘 했다고, … 오히려 부끄러워요. 학교 선생님에 작가까지 되셨으니, 지난날 한솥 밥 먹은 보람을 느껴요.”

카메라를 꺼내 사진을 찍으려 하자 끝내 자리를 피했다.
“내가 봐도 늙은 모습이 싫어요.”

딸 아들 삼남매는 벌써 결혼하여 모두 살림 났고, 이제는 두 분만이 오순도순 살고 계셨다.

해방 전 해인 1944년 함경도 흥원군 삼호면으로 시집갔던 얘기와 6 ·25 전쟁 때, 영감이 의용군으로 붙들려 간 후 포로 교환 때 고향의 부모 형제보다 끝내 서울에 있는 처자식을 찾아준 걸 평생 고맙게 여긴다고 했다.

나이가 들수록 고향이 더 그리워져서 벌써 적십자사에다 이산 가족 면회 신청은 해뒀다고 했다. 앨범에서 젊은 날 사진을 하나 찾은 뒤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밥 한 끼 대접도 못하고….”
“아닙니다. 지난날 많이 얻어 먹었습니다.”
“바쁜데 먼길 오시지 말고 가끔 전화로 안부나 알려 줘요.”

따뜻한 음성을 뒤로 한 채 막 도착한 승강기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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