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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고에 길이 살아남아 있어라.
천고에 길이 살아남아 있어라.
당시 뤼순(旅順) 감옥의 간수였던 일본인 치바도시치씨는 감옥에서 본 안중근 의사 인품에 감화된 나머지 종전 후, 자기 집에 안 의사의 영정을 모시고 매일 아침저녁으로 절을 올렸다.

그가 죽은 후 그의 부인도 남편을 따라서 안 의사를 모셨다. 안 의사는 우리 겨레만의 사표일 뿐 아니라, 당신을 형장의 이슬로 보낸 그네들의 눈에조차도 살아서는 신의 모습으로 비쳤고, 또 죽어서는 가신(家神)으로 모셔지는 인물이 되었다.

또 일제 시대 동북 일대 소학교에서는 중국인이 작사 작곡한 〈안중근을 추모하며〉라는 노래를 아이들에게 가르쳤다.

진실로 공경할 만하다.
이토 히로부미를 죽이고 자신도 용감히 죽었다.
마음속으로 비로소 나라의 한을 풀었다.
역사 속에 충의 혼을 우러르지 않을 자가 없었다.
천고에 길이 살아남아 있어라.
누가 그의 뒤를 따르랴.
누가 그의 뒤를 따르랴.


이러한 안 의사의 추모 열기는 국내외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막 불붙으려는 항일 독립운동 불길에 기름을 부운 셈이었다. 우리나라와 중국의 많은 젊은이들이 이 의거에 감화되어 비 온 뒤에 죽순이 돋아나듯이 항일 투쟁에 나섰다.

안 의사는 사형 집행 전에 유언을 남겼다.

“내가 죽은 뒤에 내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나라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返葬 : 고향으로 옮겨 장사지냄)해 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백성이 된 의무를 다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서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거사 전날 안 의사는 하얼빈 남쪽 쑹화강 강둑을 거닐며 계획을 가다듬고 마음의 평정을 얻었다. 멀리 보이는 것이 쑹화강 철교다.
거사 전날 안 의사는 하얼빈 남쪽 쑹화강 강둑을 거닐며 계획을 가다듬고 마음의 평정을 얻었다. 멀리 보이는 것이 쑹화강 철교다. ⓒ 박도
그 날로부터 한 세기가 흘렀다. 하지만 뤼순 감옥 죄수 묘역에 묻혀 있는 안 의사의 유해는 여태 찾지 못했고, 고국으로 반장도 못하고 있다.

아직도 우리나라의 국권이 제대로 회복되지 못했음인가? 아니면 살아있는 사람들이 안 의사를 추모하는 마음이 부족함인가?

나는 하얼빈 역 플랫폼을 떠나면서, 아직도 안 의사의 유언이 제대로 실현되지 못함에 무척 마음이 아렸다.

아울러 안중근 의사는 조국의 광복 제단에 목숨을 바쳐 침략의 원흉을 단죄했으나 끝내 국권을 잃어버린 점이었다. 이는 당시 우리나라의 힘이 너무나 허약했고, 지도층에는 강대국에 빌붙었던 매국노가 많았기 때문으로 나그네의 발걸음을 무겁게 했다.

나라의 힘이 없고 지도층이 부패 무능하면 외침을 받게 되나 보다. 지난날의 역사만 그런 게 아니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게다.

안 의사가 뤼순 감옥에서 남겼다는〈대한국인 안응칠 소회〉란 글은 한 세기가 지난 지금도 가슴 뭉클한 감동과 아울러 새겨들을 말씀으로 음미해 볼 만하다.

하늘이 사람을 내어 세상이 모두 형제가 되었다. 각각 자유를 지켜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것은 누구나 가진 떳떳한 정이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이 시대를 으레 문명한 시대라 일컫지마는 나는 그렇지 않은 것을 탄식한다.

무릇 문명이란 것은, 동서양의 잘난 사람 못난 사람 남녀노소를 물을 것 없이 각각 천부의 성품을 지키고 도덕을 숭상하여 서로 다투는 마음이 없이 제 땅에서 편안히 생업을 즐기면서 같이 태평을 누리는 그것이다.

안 의사가 묻히기를 희망했던 하얼빈 시내 쑹화강 강변 (현 스탈린 공원. 옛 하얼빈 공원과 지척간이다)
안 의사가 묻히기를 희망했던 하얼빈 시내 쑹화강 강변 (현 스탈린 공원. 옛 하얼빈 공원과 지척간이다) ⓒ 박도
그런데, 오늘의 시대는 그렇지 못하여 이른바, 상등 사회의 고등인물들은 의논한다는 것이 서로 경쟁하는 것이요, 연구한다는 것이 사람 죽이는 기계다.

그래서 동서양 육대주에 대포 연기와 탄환 빗발이 그칠 날이 없으니, 어찌 개탄할 일이 아닌가.

이제 동양 대세를 말하면 비참한 현상이 더욱 심하여 참으로 기록하기 어렵다. 이른바, 이토 히로부미는 천하대세를 깊이 헤아려 알지 못하고 함부로 잔혹한 정책을 써서 동양 전체가 장차 멸망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슬프다. 천하대세를 멀리 걱정하는 청년들이 어찌 팔짱만 끼고 아무런 방책도 없이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는 것이 옳을까 보냐.

그러므로 나는 생각다 못하여 하얼빈에서 총 한 방으로 만인이 보는 눈앞에서 늙은 도적 이토 히로부미의 죄악을 성토하여 뜻있는 동양 청년들의 정신을 일깨운 것이다.

1909년 11월 6일 오후 2시 30분
여순 옥중에서 대한국인 안중근


동북 조선 역사의 두 거두인 서명훈,  김우종 선생과 함께 (2000 여름 제2차 답사 때 하얼빈의 번화가 중앙대가에서  왼쪽에서 서명훈, 필자, 김우종 ) 이런 분들이 버팀목으로 계시기에 지금도 동북의 조선족들이 이국 땅에서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다.
동북 조선 역사의 두 거두인 서명훈, 김우종 선생과 함께 (2000 여름 제2차 답사 때 하얼빈의 번화가 중앙대가에서 왼쪽에서 서명훈, 필자, 김우종 ) 이런 분들이 버팀목으로 계시기에 지금도 동북의 조선족들이 이국 땅에서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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