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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화는 짧은 혀로 길고 깊으며, 함축적인 의미를 토해낸다. 평이하되 어려우며, 찌르되 상쾌하고, 넘어가되 걸려든다. 작은 이야기들에서 커다란 무엇을 건져내는 언어의 마술이자, 처세의 신비와 삶의 방편이 우화의 핵심이다. 더러 거기에는 누천년에 걸친 인간영혼의 총화가 생생하고 형형하게 두 눈을 부릅뜨고 있는 경우도 있다.

"투쟁은 둥근 원과 같다. 어디에서나 시작할 수 있다. 그러나 결코 끝나지 않는다." (145쪽)

2001년 3월 11일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 대표단 24명이 보름 전에 치아파스에서 시작한 비무장 장정을 마치고, 멕시코시티 대광장에 도착했다. 20여만 명의 시민들이 그들을 맞이하였고, 주제 사라마구와 가브리엘 마르케스 등의 문사, 다니엘 미테랑으로 대표되는 진보적인 사회운동가들이 속속 그 모습을 드러냈다고 전해진다.

전세계적으로 광풍을 야기하였던 신자유주의의 북미판인 '북미자유무역협정'에 저항하는 치아파스주의 반란군이 봉기의 깃발을 휘날렸던 1994년 1월 1일 이후 7년만에 성사된 위대한 투쟁의 시작과 대미는 그렇게 장식되었다. 물론 그 투쟁의 불길은 앞으로도 계속 불타 오를 것이다.

그 투쟁의 선두 어딘가에 마르코스 부사령관이 자리한다. 체 게바라처럼 넉넉한 집안의 인텔리 출신인 그는 1984년에 치아파스의 라칸도나 정글에 도착하여 무장 게릴라가 되었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와 셰익스피어의 <햄릿>과 <맥베스>로 세상을 배웠다는 그는 상상의 인물, 세상의 가장 지혜로운 노인이자 실천가인 안토니오 할아버지를 창조하였다.

마르코스의 이야기는 책 속의 화자인 '나'와 '안토니오 할아버지' 사이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그는 태초의 신화로부터 멕시코의 위대한 영웅 에밀리아노 사파타에 이르는 역사적인 실제와 허구를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멕시코뿐 아니라, 우리의 전지구적인 삶의 조건들을 통시적이자 공시적인 시선으로 포착한다.

"사자는 눈을 보면서 죽인다"에서 안토니오 할아버지는 사자에 대한 공포 그 자체로 인하여 사멸하는 가엾고도 어리석은 짐승들을 말한다. 거기에 대항하는 유일한 동물로 그는 두더지를 말한다. 자기의 내면만을 응시하다가 신들에게 벌을 받은 두더지. 그는 내면만을 응시하기 때문에 사자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이점은 사람도 마찬가지라고 할아버지는 말한다.

"사람은 마음을 들여다볼 줄 알기 때문에 사자의 힘을 보지 않고 자기 자신의 마음이 지닌 힘을 본다네. 그래서 사자를 똑바로 쳐다보지. 사자도 사람을 보지만, 사자는 사람이 자기를 보는 대로 보게 된다네. 사람의 시야 속에서 보게 된다는 말일세. 하여 사자는 자신이 한 마리 사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고, 사람이 보는 대로 자기를 생각하면서 공포에 사로잡혀 이내 도망치게 된다네." (51-52쪽)

대상에 대한 공포의 근원은 바로 자기 내면에 대한 성찰의 부족과 그로 인하여 야기되는 공포의 절대화임을 마르코스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투쟁의 대상에 대한 내적인 응시와 자기성찰에 충실하다면 공포와 그로 인한 패배는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그는 에둘러 말하고 있다.

이른바 신자유주의의 야만성이 멕시코의 오지 정글에까지 휘몰아쳐 인간생존을 위협하는 상황에 직면하여 그것에 어떻게 대항할 것인지에 대한 해답을 반란자이자 철학자이며 문사인 마르코스는 평이한 수사로 명료하게 제시한다.

책 속에 들어있는, 그가 그린 원색의 투박한 그림들은 어쩌면 일천만에 달하는 멕시코 원주민들의 꿈과 희망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500여 년 전 저 무지한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의 식민지 개척단의 앞잡이들이 무참하게 파괴하고 학살한 마야문명과 마야인들의 후손이 거주하는 멕시코 땅에 여전히 떠도는 슬픔과 우울의 만가가 새로운 희망과 빛을 만나기를 나는 간절하게 바란다.

그것은 백인 식민주의자들의 흉악한 학살과 폭정과 야만을 척결하는 시간대의 도래에서야 가능하겠지만. 그럼에도 이제는 그곳에 이미 있던 아메리카를 백인들의 시선으로 포착하는 어리석음으로부터 자유로울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콜럼부스는 결코 아메리카를 발견하지 않았다. 이미 그곳은 수많은 인디언과 여타 종족들의 건강한 삶의 현장이었고, 그곳은 또한 눈부신 문명의 개화가 존재했던 빛의 왕국이 아니었던가!

'마야'를 떠나 승천한 그들 문명의 자취들은 여전히 해결 불가능한 과제로 남아 있는 터이다.

햄릿

윌리엄 세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민음사(1998)


맥베스

요 네스뵈 지음, 이은선 옮김, 현대문학(2018)


돈키호테 1

미겔 데 세르반테스 사아베드라 지음, 안영옥 옮김, 열린책들(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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