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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열도에 불벼락을 쏟은 안중근 의사
일본 열도에 불벼락을 쏟은 안중근 의사
하얼빈역

누가 뭐라고 해도 동북 삼성의 으뜸 항일 유적지는 하얼빈역 플랫폼이다. 안중근 의사가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장쾌하게 쓰러뜨린 이곳은 백성들의 울분을 한꺼번에 쏟은 분화구였다.

그때 우리 백성들은 안 의사의 거사 소식에 강화도조약이래 30년 동안 쌓였던 체증이 한순간에 ‘뻥’ 뚫렸으리라.

김 선생은 옛 친구였던 하얼빈시 조선민족사업촉진회 서명훈 회장을 찾아뵙고 하얼빈 시내 항일 유적지 안내를 부탁드렸다. 서 회장은 우리 일행을 대단히 반기면서 흔쾌히 앞장섰다.

안 의사 의거 당시 하얼빈 역
안 의사 의거 당시 하얼빈 역
곧장 하얼빈역으로 갔다. 안 의사가 거사한 지 이미 90년의 세월이 지난 뒤인지라, 하얼빈역 건물은 옛 모습을 전혀 읽을 수 없는 현대식 건물로 바뀌었다.

그동안 사진으로만 봤던 옛 하얼빈역은 러시아 풍의 고색창연한 건물이지만, 오늘의 하얼빈역은 콘크리트 건물에 원색의 광고문을 덕지덕지 붙인 우람한, 마치 백화점 건물 같았다.

서 회장은 그 새 역 일대가 몰라보게 싹 바꿨다지만, 다행히 거사 현장인 역 플랫폼만은 옛 모습 그대로 지니고 있다고 했다.

오늘의 하얼빈 역
오늘의 하얼빈 역 ⓒ 박도
그런데 이곳 답사가 쉽지 않았다. 이토 히로부미는 우리 민족으로 볼 때는 침략의 원흉이지만, 일본에서는 메이지유신을 이끈 총리대신으로, 입헌군주제를 확립한 대단한 인물로 여기고 있다. 지금도 일본인들은 그를 근대화의 영웅으로 추앙하여 국회 의사당 앞에 동상을 세워 두고 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그의 초상을 한때 천 엔권 지폐에다 넣을 만큼 위인으로 받드는 인물이기에(현재 천 엔권은 나쓰메소오세키: 소설가), 중일 외교상 한국인들이 거사 현장을 답사하면서 사진 찍는 일을 중국인들은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다고 했다.

서 회장, 김 선생은 하얼빈역 일등 대합실로 가서 교섭을 벌였다. 하지만, 예상대로 역무원의 제지가 완강해서 플랫폼 입장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김 선생은 어떤 인물인가? ‘만주의 호랑이’로 일본 경찰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일송 선생의 손자가 아닌가? 한참동안의 하소연과 대합실 이용료를 치룬 후 겨우 플랫폼 입장이 허용됐다.

일등대합실에서 플랫폼으로 통하는 출구, 안 의사도 이곳을 통해 플랫폼으로 나갔다.
일등대합실에서 플랫폼으로 통하는 출구, 안 의사도 이곳을 통해 플랫폼으로 나갔다. ⓒ 박도
우리 일행이 통과한 일등 대합실 개찰구가 지난날 안 의사가 권총을 감춘 채 무사히 통과했던 바로 그곳이라 해서 더욱 감회가 깊었다.

그날 안 의사는 이 대합실에서 기다렸다가, 열차 도착 직전 일본인 환영객들 틈에 끼어 플랫폼으로 나갔다고 했다.

만주국 시절에는 이토 히로부미가 안 의사의 총에 맞아 쓰러진 그 자리에다 1미터 높이로 유리 집을 지어놓고 전등을 켜서 표지를 해두었다지만, 중국이 해방된 후에는 흔적도 없이 지워버렸다고 했다.

하지만 하얼빈에 사는 민족혼을 지닌 한국인이라면 어찌 그 지점을 지울 수 있으랴. 조선 민족의 역사를 연구하는 서 회장은 당신의 가슴속에 또렷이 그 표지를 새겨놓았다.

서 회장은 당신이 발걸음으로 재면서 대합실 개찰구에서 정확히 5간〔약 9미터〕거리 지점이 안 의사가 총을 쏜 자리요, 그때 안 의사와 이토 히로부미 사이의 거리는 2.5간이라고, 당신이 발걸음으로 가늠하면서 자세히 일러주었다.

다행히 우리 일행은 서 회장의 증언으로 정확한 지점을 확인할 수 있었지만, 다른 분들이야 어찌 정확히 그 지점을 알 수 있겠는가?

이제라도 우리나라 보훈처나 광복회가 나서서 헤이룽장성 인민정부의 양해 아래 이 자리에다 동판이라도 새겨둔다면, 뒷사람들에게 역사의 현장을 알리는 귀중한 기념물이 되리라.

1909년 10월 26일

1909년 10월 중순, 이토 히로부미의 만주여행은 겉으로는 정치적 성격을 전혀 띠지 않은 한가한 여행이라고 내세웠다. 하지만 그의 속내는 한반도를 손아귀에 넣고도 부족해서 만주까지 일본제국 판도 안에 넣고자하는 야심에 찬 만주 시찰이었다.

그해 10월 16일, 이토 히로부미는 수행원과 함께 일본 모즈 항에서〈데츠레이마루〉라는 상선에 승선해서 이틀 후 중국 다롄(大連)에 도착했다.

이토 일행은 이 일대에 머물면서 일본군 장병을 위문했고, 10월 21일에는 뤼순(旅順)에서 1904년 러일전쟁 전사자를 추모했다.

10월 25일 밤 11시, 이토는 특별열차로 봉천(지금의 선양) 역을 출발하여 하얼빈으로 향했다. 그는 죽음의 길인 줄도 모르고 러시아 대장(재무)대신을 만나 만주 문제를 협상하기 위하여 오만 방자한 노익장을 과시했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이토 히로부미 일행을 태운 특별열차가 하얼빈역 플랫폼에 멎었다. 열차 도착에 맞춰 러시아 군악대의 주악이 시작됐다. 러시아 대장대신 코코체프가 객차 내로 들어가 이토에게 도착 인사를 했다.

이토는 코코체프의 정중한 안내를 받으며 열차에서 내린 후, 의장대 앞을 지나서 환영 나온 각국 영사들이 서 있는 곳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이토는 그들과 의례적인 인사를 나눈 후, 일본거류민단 환영객 앞을 지나 다시 의장대쪽으로 되돌아오고 있었다.

일본거류민단에 섞여 있던 안 의사는 이 순간을 하늘이 준 기회로 알고 가슴속에 숨겨뒀던 브라우닝 권총을 뽑아들었다.

서 회장이 서 있는 곳이 안 의사 의거 지점(왼쪽부터 김중생, 필자, 서 회장)
서 회장이 서 있는 곳이 안 의사 의거 지점(왼쪽부터 김중생, 필자, 서 회장) ⓒ 박도
하늘에 감사하며 회심의 첫 발을 쏘았다. 그때 안 의사와 이토 히로부미 거리는 불과 열 발자국쯤이었다.

첫 탄알이 이토의 팔을 뚫고 가슴에 명중했다. 하지만 총소리가 축포와 주악 소리에 뒤섞여서 그때까지 경비병들은 영문을 몰랐다. 참으로 다행이었다.

안 의사는 다시 혼신을 다하여 방아쇠를 당겼다. 두 번째 탄알은 이토 가슴에 명중했다. 경비병과 환영객들은 그제야 돌발 사태를 알아차리고 겁을 먹은 채, 우왕좌왕 흩어지고 도망쳤다.

총을 맞은 이토는 가슴을 움켜쥐고서는 비틀거렸다. 다시 안 의사는 이토의 남은 명을 끊고자 침착하게 정조준하여 세 번째 방아쇠를 당겼다.

세 번째 탄알은 이토 복부 깊숙이 명중되었다. 절명의 탄알이었다. 그제야 늙은 여우 이토는 꼬리를 내리고 코코체프 쪽으로 픽 쓰러졌다.

안 의사는 그 자가 혹시 이토 히로부미가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에, 만일을 대비하여 그 곁을 수행하던 하얼빈 주재 일본총영사 가와카미, 수행 비서관 모리, 만주철도국 이사 다나카 세 사람에게도 총알을 한 방씩 안겼다.

시모노세키 '일청강화기념관' 뜰에 있는 이토의 흉상.
시모노세키 '일청강화기념관' 뜰에 있는 이토의 흉상. ⓒ 박도
안 의사의 권총에 장전된 일곱 발의 총알 중, 발사된 여섯 발은 단 한 방도 헛방이 없었다. 대단한 담력과 신묘한 사격술이었다. 불타는 적개심으로 네 사람을 쓰러뜨린 뒤, 그제야 안 의사는 러시아어로 만세 삼창을 불렀다.

"코레아 우라!(대한 독립 만세)
코레아 우라!
코레아 우라!”

그런 후, 안 의사는 러시아 헌병에게 순순히 체포되었다. 그때가 오전 9시 30분 무렵이었다. 잠깐 사이에 당신이 바란 바, 모든 걸 한 순간에 다 해치웠다. 이토 히로부미는 곧장 열차에 옮겨졌다. 수행 의사 고야마가 맥을 짚고 캠퍼 주사를 놓고 브랜디를 입에 넣어 주었지만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즉사였다.

장한 대한 남아가 열본 열도에 쏟은 불벼락이었다. 누가 그의 뒤를 따르랴. 조지훈 선생은 그날 거사를 다음과 같이 기렸다.


쏜 것은 권총이었지만
그 권총의 방아쇠를 잡아당긴 것은
당신의 손가락이었지만

원수의 가슴을 꿰뚫은 것은
성낸 민족의 불길이었네.
온 세계를 뒤흔든 그 총소리는
노한 하늘의 벼락이었네.

의를 위해서는
목숨도 차라리 홍모(鴻毛)와 같이
가슴에 불을 품고 원수를 찾아
광야를 헤매기 얼마이던고

그 날 하얼빈 역두(驛頭)의
추상같은 소식
나뭇잎도 우수수
한때에 다 떨렸어라.

당신이 아니더면 민족의 의기를
누가 천하에 드러냈을까
당신이 아니더면 하늘의 뜻을
누가 대신하여 갚아 줬을까

세월은 말이 없지만
망각의 강물은 쉬지 않고
흘러서 가지만

그 뜻은 겨레의
핏줄 속에 살아 있네.
그 외침은 강산의 바람 속에 남아 있네.
―조지훈 〈安重根 義士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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