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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강준만은 지난 95년 <김대중 죽이기> 이후 97년부터 1인 저널룩 <인물과 사상> 시리즈를 내고 있다. 대표적인 저서로 <김대중 죽이기>와 <전라도 죽이기>, <우리 대중문화 길찾기>, <서울대의 나라> 등이 있다.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강준만은 지난 95년 <김대중 죽이기> 이후 97년부터 1인 저널룩 <인물과 사상> 시리즈를 내고 있다. 대표적인 저서로 <김대중 죽이기>와 <전라도 죽이기>, <우리 대중문화 길찾기>, <서울대의 나라> 등이 있다. ⓒ 오마이뉴스 김정훈
대학 새내기가 되었다. 지역 사회 너머의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고 교과서와 참고서를 떠나 각종 서적들을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아직 쌀쌀한 기운이 남아 있던 98년 3월, 입학과 함께 한 선배의 추천으로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하 난쏘공)>과 역사학연구소에서 낸 <강좌 한국근현대사>, 박세길의 <다시쓰는 한국현대사> 시리즈를 집어 들었다.

그런데 이게 웬 일. ‘정치·경제’와 ‘국민윤리’ 교과서로 ‘사회탐구’ 공부를 하는 틈틈이 <조선일보>를 보며 논술을 준비했던 범생이에게, 이 책들은 놀라움을 넘어 당혹으로 다가왔다. 대학 입학 전인 1996년 이른바 ‘연세대 사태’가 있었기에 “데모하는 데는 아예 얼씬도 말라”는 부모님의 주의를 받은 터라 몸과 마음은 점점 긴장되기 시작했다. 지금은 웃기는 일이지만 대학 1학년 1학기 때만 해도 ‘이런 책’을 읽으면 큰 죄라도 짓는 것인 줄 알았던 것이다.

이 책들은 ‘만주 벌판을 호령한 고구려’나 ‘민족통일의 대업을 이뤄낸 신라’ 이야기가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역사 교과서와는 달리 우리의 현대사를 주로 다루고 있다. 그런데 그 내용이란 것들이 너무도 놀라웠다. 한두 사람 혹은 한두 권이라면 모를까 적지 않은 이들이, 대부분의 한국 현대사 관련 서적들이 그동안 교과서와 ‘콩기름 일보’를 통해 보아왔던 역사와는 다른 사실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달라도 너무 달랐다. 혼란스러웠다. 어느 순간 그동안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던 ‘사실’과 ‘가치’들에 대해 “이건 아닌데…”하는 의문부호를 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IMF 사태가 박정희 때문이라고?

그러나 한계가 있었다. 앞서 말한 책들의 경우 소설 <난쏘공>은 당시 사회상을 반영하고 있기는 하지만 동화 같은 분위기로 다소 감성적인 부분이 강하게 부각됐던 것 같고, 나머지 두 책은 근 반세기를 한 권 혹은 세 권에 압축하느라 상당한 생략을 수반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다른 책들이라고 해서 별반 다를 바 없었고, 아직 우리 역사에 대한 전반적인 감도 잡지 못한 대학 새내기가 뒤적거린 관련 논문들은 이해하기조차 쉽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었다.

박정희. 그는 과연 보릿고개를 없애고 부정부패와는 담을 쌓은, 민족을 구원한 영도자인가?
박정희. 그는 과연 보릿고개를 없애고 부정부패와는 담을 쌓은, 민족을 구원한 영도자인가?
그런데 새내기들로 하여금 살아있는 역사 공부를 시키기 위함이었는가? 대학에 입학하기 직전 ‘IMF 구제금융’이라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고, 마침 <조선일보>를 비롯한 언론과 학자들은 이런 사태까지 오게 된 근본원인을 분석하느라 바빴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IMF 사태의 근본적 원인으로 투기자본 등 외부적인 요인 못지않게 ‘박정희’의 경제정책을 꼽고 있는 것이었다. 박정희식 경제개발 모델의 한계들이 곪아터진 결과가 IMF 사태라는 것이었다. 그 주장의 타당성 여부를 떠나 ‘새마을운동’과 ‘자주국방’을 기치로 ‘한강의 기적’을 이룬 박정희가 IMF 사태의 근본원인이라고? 폭력이 넘쳐나는 우리 현대사에 대한 충격과 함께 IMF 사태의 원인을 놓고 벌어진 논란은 자연스럽게 새내기의 지적 욕구를 충동질하기 시작했다.

결국에는 마땅한 책도 없어 학부나 대학원에 다니는 선배나 관련 강좌를 들으며 궁금증을 해소하는 방법 밖에 없었는데, 역시나 당시 일어난 사건들의 구체적인 정보를 얻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람의 설명이라는 것은 중언부언이 다반사였고 불필요한 주관이 개입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한국의 1970년대가 워낙에 많은 사건들로 채워졌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 사건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놓은 서적을 찾기 힘들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암울했던 1970년대의 파노라마를 읽다

이미 전태일은 ‘개인’ 전태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잊혀진지 이미 오래다.
이미 전태일은 ‘개인’ 전태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잊혀진지 이미 오래다.
그런데 이제는 이런 아쉬움을 어느 정도 떨쳐 낼 수 있을 것 같다. 주로 언론 관련 서적을 써온 강준만이 이번에는 한국의 현대사를 10년 단위로 훑는 ‘한국 현대사 산책’ 시리즈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먼저 1차분으로 지난 해 11월 나온 1970년대편 <평화시장에서 궁정동까지> 1~3권은 각권 약 3백 쪽의 분량으로 당시 일어났던 구체적인 사례들을 연도별로 소개하고 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처음 책을 받아보는 순간 눈이 간 주황색 책띠에 써있는 말이 걸작이었다. “전태일은 가고 없다. 사람들은 전태일을 잊어 버렸다. 남은 건 경부고속도로다.” 처음에는 이게 무슨 소린가 했다. 선뜻 파악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밤을 밝히며 단번에 세 권을 읽어버린 지금, 그 것은 결국 1970년대 즉 ‘야수(野獸)의 시대’ 전체를 아우르는 고발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 그가 말하고 있는 ‘전태일’은 그저 전태일 개인이 아니요 그의 분신자살만도 아니다. 강준만이 말하고 있는 전태일은 마치 기계와 같은 취급을 받으며 착취당하기만 하는 노동자들과 그들은 외면한 채 권력과 함께 춤을 춘 언론, 또 강남 열풍으로 대변되는 한국인의 속물화 등 사람이 전혀 사람답지 않은, ‘인간성이 말살된 70년대’를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또 ‘경부고속도로’는 소위 한강의 기적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경부고속도로라는 남북 종단 도로를 통해 발생한 동서간의 지역차별과 이농(離農)으로 황폐화되는 농촌, 소수에게 집중되는 부(富), 그것을 가능케 하고 유지시켜 준 부정부패 등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으로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1970년대 급속한 경제개발의 견인차 역할을 한 경부고속도로. 그러나 지역 차별이라는 ‘괴물’에 의해 그 의미가 변질되기도 한다.
지난 1970년대 급속한 경제개발의 견인차 역할을 한 경부고속도로. 그러나 지역 차별이라는 ‘괴물’에 의해 그 의미가 변질되기도 한다.
그러나 강준만이 이러한 것들을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고 있지는 않다. 어쩌면 1970년대의 파노라마를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질지 모를 정도로 방대한 자료를 담고 있는 이 책은, 독자 스스로 1970년대와 박정희를 이해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물론 그 과정에서 글쓴이의 주관이 완전히 배제되지는 않았겠지만 여느 역사책들과는 달리 <평화시장에서 궁정동까지> 시리즈는 연도별로 구체적인 사건을 나열하는 방식을 통해 1970년대와 박정희의 ‘공(功)’과 ‘과(過)’를 가감 없이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정치나 경제 부분뿐만 아니라 나훈아와 남진, 대학가요제와 강변가요제 등 문화나 언론, 군사적인 부분까지 최대한 다양한 영역을 보여주기 위해 애쓰고 있다. 강준만의 노력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그렇다고 이 책이 마냥 음울한 것만은 아니다. 이 책에는 간간히 코미디도 섞어놓았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결코 유쾌한 코미디가 아니라 가슴 아픈, 분노가 치미는 코미디라는 것이다. 블랙코미디도 이런 블랙코미디가 없다.

2003년은 1970년으로부터 자유로운가?

강준만 / 한국 현대사 산책 1970년대편 - 평화시장에서 궁정동까지 1~3 / 인물과사상사 / 2002 / 각권 8,800원
강준만 / 한국 현대사 산책 1970년대편 - 평화시장에서 궁정동까지 1~3 / 인물과사상사 / 2002 / 각권 8,800원 ⓒ 인물과사상사
그러나 독서를 끝낸 지금 더욱 우울하게 다가오는 것은 아직도 우리가 1970년대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이 아닐까? 희망이 아닌 절망을 발견할 때 사람은 한없이 심란해지기 마련이다. 굳이 IMF와 같은 ‘거창한’ 문제까지 들여다볼 필요도 없다. 아직도 호주제나 국가보안법 등 폐지나 개정이 필요한 것들이 남아 있고 봉건시대가 지난 지가 언제인데 젊은 연인들 사이에도 아직 가부장적 요소가 엄연히 존재한다. 또한 상대적으로 진보적이라는 대학생들마저도 선후배나 교수·학생 사이에 마치 군대에서와 같은 위계질서가 뚜렷하고, 보다 나은 성적을 받기 위한 커닝에 무감각한 것이 현대 한국 사회의 풍경이다. 과정이야 어떻든 이기기 위해,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더 빨리 도착하기 위해 가릴 것은 없단다. 1970년대에 그랬던 것처럼.

강준만이 말하는 1970년대의 주도적인 분위기, 이른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는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한 것인가? 과연 2003년의 한국은 1970년대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운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강준만의 다른 책 - “세상에 공짜는 없다!”

한국 현대사 산책 1970년대편 1 - 평화시장에서 궁정동까지

강준만 지음, 인물과사상사(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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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기억 저편에 존재하는 근현대 문화유산을 찾아 발걸음을 떼고 있습니다. 저서로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알마, 2008), <다시, 서울을 걷다>(알마, 2012), <권기봉의 도시산책>(알마, 2015)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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