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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농업개방을 막는’ 농민들(왼쪽 사진)과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유족 및 관계자는 오늘도 국회 앞을 떠나지 못하고 지키고 있다.
‘국내 농업개방을 막는’ 농민들(왼쪽 사진)과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유족 및 관계자는 오늘도 국회 앞을 떠나지 못하고 지키고 있다. ⓒ 유창재, 김진석
4월, 화사하게 함박눈처럼 피었던 벚꽃이 하나둘씩 떨어져 가는 여의도를 떠나지 않고 지키는 사람들이 있다.

막바지 벚꽃을 구경하기 위해 찾는 평일이건 주말이건 할 것 없이 찾아오는 많은 인파들 사이에서 자리를 떠나지 않고 변함 없이 우두커니 서 있는 이들은 '전국농민회총연맹' 등 농민들과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 유가족 등 관계자들이다.

선글라스를 끼고, 손에는 카메라와 먹을 것들을 들고, 한참 열풍인 인라인스케이트를 신고 여의도를 찾는 관광객들과는 달리, 이들의 손에는 '농업포기 농민말살, 한·칠레자유무역협정 국회 비준 저지!' '한국전쟁전후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통합 특별법 제정촉구' 등이 적힌 피켓이 들려 있다.

피켓을 유일한 무기로 이들은 거리의 시민들과 국회를 찾는 국회의원들에게 무언의 끝없는 외침을 던지고 있다. 하지만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하고 쌀쌀한 저녁 바람만을 맞을 뿐이다. 이들은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또 내일을 맞는다. '메아리없는 외침'과 따뜻한 눈길조차 없어 더욱 외로운 이들의 투쟁을 <오마이뉴스>가 찾아가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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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1] "우리 농업을 지키는 것보다 더 급한 농사가 있습니까"

경남 고성의 농부 정채룡(56)씨.
경남 고성의 농부 정채룡(56)씨. ⓒ 오마이뉴스 유창재
"요즘 한참 바쁠 때죠. 모자리 준비하랴, 씨나락 엮으랴…. 하지만 어쩌겠어요. 우리 농업을 외국에 핸드폰과 컴퓨터와 맞바꿔 팔아먹는다는데 막아야죠. 우리 먹거리를, 우리 생존 주권인 '농업'을 외국으로 넘긴다는데 애터지게 농사를 지어봐야 무엇하겠소. 지금은 당장 느끼지는 못하겠지만 '식량주권'을 뺏겨버리면 이 나라 자체가 먹는 것에 '종'이 될텐데…."

하얀 상복을 입고 '농업포기 농민말살'이라 적힌 피켓을 몸에 두른 채 14일 오후 2시부터 국회 정문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는 경남 고성의 농부 정채룡(56)씨의 말이다.

정씨는 고등학교 때부터 40여 년간 쌀농사와 과일농사를 지어온 토박이 농사꾼이다. 그는 요즘 한참 바쁜 일손을 놓고 국회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검게 탄 얼굴에 굳은 살이 박힌 그의 손에는 호미와 괭이 대신 피켓이 들려 있었다.

그는 남들처럼 벚꽃구경을 하러 서울에 올라온 것이 아니다. 지난 2월 15일 서울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과 칠레 라고스 대통령이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 협정문에 공식 서명함에 따라, 이달(4월)중으로 국회 비준 일정이 예정돼 있어 이를 막아보겠다고 농사일을 내팽개쳐 놓고 국회 앞을 찾았다.

농부 정씨는 "지금 농부들이 서울에 올라와 시위하는 것이 시민들에게 하루, 아니 몇 시간 동안 잠시 불편을 주는 것이겠지만, 농민들에겐 몇 십년 고생하며 참고 살아왔던 문제다"면서 "우리 스스로가 농업 경쟁력을 갖추지 못한 단계에서 세계시장에 내놓는 것은 죽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정씨는 "상공업 때문에 '농업'을 팔고 있는 것은 결국 국내 농업에 '사형' 선고를 내리는 것과 같다"며 "농민들은 우리 국민들에게 우리의 맛있는 먹거리를 먹이고자 작은 농사는 잠시 접어두고 큰 농사를 짓기 위해 올라온 것을 이해해 달라"고 말했다.

정씨처럼 상복을 입고 '한·칠레자유무역협정' 국회 비준을 막기 위해 농민들이 국회 앞을 찾기 시작한 것은 지난 4월 7일부터. 14일로 8일째를 맞는 '전국농민 릴레이농성'은 경기도 농민 50여명이 처음 시작했다. 이어 9일 농민들은 '한국농업 장례식'을 거행하고 '한·칠레FTA' 협정이 국내 농업을 사실상 죽음으로 몰아넣는 것이라며 국회비준 반대의 정당성을 서울시민들에게 알렸다.

지난 7일부터 계속해서 전국 각처에서 상경하고 있는 농민들은 여의도 문화공원 안에 천막을 치고, 냉기를 막기 위한 비닐 깔판과 난로 하나에 의지한 채 교대로 밤을 새운다.

이들은 해가 뜨면 "언발에 오줌누기일지라도 농업 개방을 막기 위해 끝까지 해보겠다"는 의지로 국회 정문 앞과 한나라당사, 민주당사, 여의도 일대 지하철 역부근 등에서 해가 질 때까지 1인 시위와 '농업 장례식'을 치르고 있다.

이같은 농민들의 외침에 지난 12일 현재 국회의원 125명이 '국회비준 거부'에 동참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서명을 했다. 하지만 서울 지역 국회의원 45명 중 4명만이 농민들을 지지하겠다고 밝혔다고 한다.

한편 농민들은 국회에서 '한·칠레FTA'이 통과될 경우 '식량주권과 식량안보'를 지키기 위해 전국의 350만 농민들이 힘을 모아 '고속도로'를 점검하는 등의 강력하게 대응한다는 방침이다.

전국농민회총연맹 민동욱씨는 "국회의원도, 언론도, 시민들도, 누구도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가운데 농민들이 '생계'를 걸고 직접 나서게 됐다"면서 "농업개방이 막을 수 없는 필연적인 일이라면 2004년 말에 진행될 WTO 협상이 끝날 때까지라도 개방을 늦춰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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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2] "민간인학살 문제, 사회가 관심을 가져주길"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 남인우 조직협력국장.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 남인우 조직협력국장. ⓒ 김진석
"보상을 바라거나 위령제를 치르는 비용을 국가에 구걸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에 대한 진상규명과 조사가 확실히 이뤄지길 바란다. 그 당시 사례들에 대한 책임이 밝혀져 관련자들에 대한 '정치적 사망선고'가 내려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지난 4월 1일 여의도 국회 앞 한나라당사 부근으로 자리를 옮겨 농성을 벌이고 있는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범국민위원회'(범국민위) 유족들의 바람은 하나다.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통합특별법'이 조속히 제정되는 것. 이들이 농성을 벌인지 12일 현재 45일째를 맞고 있지만 세상 사람들의 관심 밖에 놓여 있다.

직장생활을 8년 동안 하다가 "사회가 민간인학살 문제에 관심을 보이지 않아 현대사에 묻혀 실체가 없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직접 나서게 됐다는 남인우 조직협력국장. 그는 유가족이나 당사자는 아니지만 유족들과 함께, 때로는 대신해서 12일째 아침 8시부터 저녁 8시까지 매일같이 국회 앞을 지키고 있다.

남 조직협력국장은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지난 50년 넘게 '빨갱이'로 몰려왔고, 아직도 악몽에 시달리며 심리적인 피해를 겪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면서 "이들의 문제는 과거역사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이라도 반드시 청산해야 할 역사적 과오이기에 진상규명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범국민위에 따르면, 한국전쟁 전후 미군과 국군, 우익단체에 의해 학살된 민간인 수는 전국 100여곳에서 100만여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유가족은 500만명, 남한 인구의 약 10%에 해당한다.

하지만 유족들은 '빨갱이'라는 낙인이 찍혀 일상생활의 어려움뿐만 아니라 배울 기회도 갖지 못하는 등 그동안 겪은 고통 때문에 앞에 나서길 꺼려한다는 것. 그들은 가슴속에 쌓인 '분노'조차 제대로 터뜨릴 수 없는 심리적 압박 속에 여전히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특히 거창사건, 제주4·3사건 등 특정지역의 문제에 대해 지난 2001년 9월 여야 의원 47명이 '통합특별법'을 발의했지만 이후 심의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다며 강한 불만을 제기했다. 이어 '민간인학살' 문제에 대해 큰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는 국내언론의 태도에 대해서도 불만이 터져나왔다.

남 조직협력국장은 "나중에는 '친일파 척결' 문제까지 이어져 정치권에서 어떻게 반영할지 걱정이 된다"면서 "더구나 그 동안 '민간인학살' 문제에 대해 정부가 무관심했기에 국회 앞에서 농성을 한다고 해서 쉽게 이들의 목소리를 들어줄 것이라고 애초부터 생각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범국민위는 오는 25일과 5월 말경에 2차례 문화제를 열 예정이며, 6월초 대규모 집회를 준비중이다. 특히 오는 6월 국회 일정에 맞춰 '국회 앞을 떠나지 않고' 끊임없이 통합특별법 제정을 요구할 계획이다.

국회 본회의가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되는 4월. '국내 농업개방을 막는' 농민들과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유족들은 오늘도 국회 앞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민의의 전당인 국회가 이들의 뼈아픈 목소리를 어떤 형태로, 어느 정도 담아낼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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