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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광재

나주시 한 복판에 위치한 금성관은 조선시대에는 임금·궁궐을 상징하는 전패(殿牌)와 궐패(闕牌)를 놓아두고 매월 1일과 15일에 고을 관민이 모여 임금께 예배드리는 망궐례를 올렸던 곳이다. 또 외국 사신과 정부고관의 행차가 있을 때 이곳에서 연회를 갖고 동서편에 있던 온돌방에서 숙식하기도 했다.

금성관에서 나와 오른쪽으로 돌면 북이 매달린 누문(樓門)이 보인다. 바로 정수루이다. 1603년 나주목사 우복룡이 건립한 것으로 전해지며 나주 관아의 정문이었다. 한때 북을 매달아 놓고 읍성 4대문의 문 여닫는 시간을 알린 것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한국전쟁 당시 분실되었다가 근래에 다시 복원되었다.

정수루를 지나 관아 공간으로 들어서면 목사내아가 한눈에 보인다.
오백살도 넘은 팽나무가 지키고 서 있는 이 집은 나주목사의 관저였으며 전통한옥으로 ㄷ자형 건물이다.

조선시대 목사가 살았던 목사내아
조선시대 목사가 살았던 목사내아 ⓒ 신광재

당시 상류층의 생활공간을 엿볼 수 있으나 일제강점기 이후 군수관사로 사용하기도 한 곳이다. 목사내아 옆으로는 책실이 있었는데 이는 목사의 비서인 책방이 사용하던 곳으로 이들은 공무 외에 목사이 자제교육까지 담당하였으며 심부름꾼인 방자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목사내아에서 금성산 기슭 쪽으로 100여미터 올라가면 조선 선비의 산실 나주 향교가 자리잡고 있다. 지금은 국도 13호선이 허리를 끊고 지나가지만 60년대까지만 해도 장원봉 끝자락에는 향교만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조선시대 읍성 서문으로 드나들던 백성들은 성문보다 먼저 만나는 곳이 바로 향교였다. 향교를 처음 찾는 사람들은 일단 그 넓은 터와 건물의 위용에 놀라게 된다.

현재의 건물은 조선중기 이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나주향교 대성전 건물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웅장한 건물로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오는 나주의 대표적인 문화재이다.

나주향교는 다른 곳에서 보기 드문 두 가지가 있다.

조선선비들의 산실 나주향교
조선선비들의 산실 나주향교 ⓒ 신광재

그 하나가 향교 입구의 많은 비석사이에 서 있는 충복사 유허비이다. 나주향교의 수복이었던 김애남이 임진왜란 때 대성전의 위패를 목숨걸고 지켰다 하여 나라에서 그 정신을 기리는 충복사를 세웠는데 지금은 없어지고 유허비만 남은 것이다.

나머지 하나는 박성건의 금성별곡 시비이다. 박성건이 1480년 금성교수로 있으면서 그의 생도 10명이 한꺼번에 생원, 진사과에 급제하는 경사를 축하하며 '금성별곡'이라는 경기체가 작품을 남겼는데 후대에 이를 기념하며 비를 세운 것이다.

이밖에 나주읍성권 길을 걷다보면 큰 전통기와집들을 볼 수 있으며 5일시장과 나주곰탕의 진미를 맛볼 수 있는 식당들이 즐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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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매일신문에서 역사문화전문기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관심분야는 사회, 정치, 스포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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