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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는 밭을 탓하지 않는다고 했다. 2000년 4.13 총선, 부산에서 낙선한 후 노무현씨가 했던 말이다. 이제 대통령이 된 그는 비슷하게 우직한 행보를 계속하고 있다. 거대야당의 수정합의약속을 믿는다며 대북송금특검법에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농부로서 밭을 믿고 최선을 다하겠다는 뜻이다. 그런데 다시 살펴보자. 문제의 싹을 틔운 그 밭이 믿을만한 밭인지.

김대중이라는 농부는 얼어붙은 한반도를 잘 가꾸어보겠다고 이런저런 시도를 했다. 그때 북한이라는 밭은 부족하지만 그런 대로 화답을 했다. 물론 거름과 퇴비 값이 많이 들기는 했다. 하지만 6.15 선언이라는 열매도 맺고, 얼어붙은 땅도 많이 녹았다. 그런데 남한의 정치권이라는 밭은 도대체 풀리질 않았다. 남북정상회담 발표를 총선용이라고 비난했다. 혹시 총선 후에 발표했으면 어떻게 했을까? 총선에 악영향을 줄까봐 일부러 늦춘 것이라고 역시 비난했을 거다. 남북정상회담은 2000년 3월 베를린선언 등을 통해 반공개적으로 추진된 것인데도 말이다.

또 국가보안법도 스스로 손질을 안해서 대통령도 실정법상 애매한 위치에서 '북의 수괴'를 만나야했다. 남북정상회담 후 만들어진 남북 4대 경협합의서도 국회비준이 안되어 남한기업의 원활한 북한시장진출에 문제가 많았다. 이미 남한 정치권은 수구냉전이데올로기에 얼어붙어 스스로 문제의 싹을 가지고 있던 밭이었다. 김대중이라는 농부가 그런 밭의 토질을 바꾸고 신경도 많이 써야했는데 그러지 못한 실수를 하긴 했다. 50년간 얼어붙었던 북한 땅을 녹이느라 신경을 못 쓴 모양이다. 그래서 노무현이라는 농부는 새로운 농법을 시도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미지수다. 남북관계의 특수성을 고려해 '진실을 규명하되 정보를 관리하는' 차원에서 제한적 특검으로 협상하자했는데 난항이 예상된다. 수사기간도 줄이고(120일에서 100일), 북한송금부분은 비공개로 하고, 특검팀이 수사정보를 유출했을 때에는 형사처벌하자는 협상안으로 얘기하려했는데 이번에는 민주당에서 난리다.

대북송금파문 일지

▲2002년 9월25일=한나라당 엄호성의원, 국감에서 4천억원 대북지원 의혹 제기.
▲10월14일=감사원, 산업은행 감사 착수
▲2003년 1월8일=한나라당, 4천억원 지원설 포함 7대 의혹 특검 및 국정조사 요구.
▲1월18일=노무현 대통령 당선자, 대북지원설 등 각종 의혹사건에 대한 검찰의 소신있는 수사 주문.
▲1월28일=현대상선, 4천억원 대출 관련자료 감사원 제출.
▲1월30일=감사원, 감사결과 발표
▲2월3일=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 "진상은 밝혀져야 한다"고 언급.
검찰, 대북송금 사건 수사유보
▲2월4일= 한나라당, 대북송금 특검법안 국회 제출
▲2월14일=김대중 대통령, 대북송금 관련 대국민담화 발표
▲2월26일=대북송금 특검법안 국회 통과
▲3월14일=노 대통령, 대북송금특검법 원안대로 공포결정. 여야의 수정합의 촉구. / (연합뉴스)
자신들이 건의한 '선 거부권행사, 후 법안수정' 안을 대통령이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볼멘 소리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사실상 해체하라 했던 동교동계도 슬그머니 다시 나와 불평불만이다. 그런데 민주당은 이걸 알아라. 한나라당에 자꾸 명분을 주지 마라. 민주당이 제대로 정비가 안되어 얘기가 안 풀린 것 아니냐는 빌미를 제공하지 마라. 대통령 혼자 농사짓게 하지말고 이왕 특검하게 됐으면 안정적으로 빨리 문제가 잘 풀리도록 도와라.

그렇게 해서 국민의 알권리를 충족시키면서도 수사결과공개가 국가안보나 공공의 이익에 맞지 않는 경우에 특검이 국회 정보위에 비공개보고를 하는 등의 절차를 밟아 송금문제를 얼른 마무리할 수 있게 해라. 이라크 다음은 북한이라고 뒤숭숭한 마당에 남북관계를 볼모로 이권다툼과 정쟁을 하지 마라. 후속협상을 질질 끌지도 말고, 수사공개범위를 놓고 지루하게 논박만 벌이지도 마라.

대통령과 국민이 밭을 믿고 특검이라는 씨를 뿌려주었으면 알아서 화답을 해라. 그렇지 않으면 이제 국민들이 밭을 갈아엎을지도 모른다. 내년이 총선이다. 농부들이 농사가 잘 안 되는 밭을 탓하며 불을 지르거나 갈아엎을 수도 있다는 점을 명심해라.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홍대신문에도 송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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