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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기 씨
윤석기 씨 ⓒ 오마이뉴스 이승욱
구렛나루가 어느새 거칠게 길어 있었다. 그렇게 벌써 20여일 째가 지나고 있었다. 대구지하철 참사 실종자유가족대책위원회 윤석기(38) 위원장은 지난 11일 새벽, "평소보다 일찍 회의가 끝났다"는 말과 함께 '함박' 웃음을 지으며 기자를 맞았다.

"그러면 일찍 쉴 수 있겠군요"하는 기자의 질문에 "서류 정리할 게 아직 남아 있다"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의 두 눈에서 밀려오는 '피곤'을 느낄 수 있었다.

지하철 참사가 터진 직후 윤 위원장은 각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 지금까지 신원 확인을 마친 사망자는 단 49명.

애초 600여명을 넘나들었던 실종자 수에 비한다면 많이 줄어들긴 했다. 그러나 현재까지도 220명의 실종자 가족들이 간절한 마음으로 정부, 그리고 대구시와 '힘 겨루기'를 하고 있다.

특히 사고수습 과정에서 보여줬던 대구시의 '무능'과 조해녕 대구시장에 대한 불신은 사태가 폭력사태로 악화될 수 있다는 우려를 낳기도 했다.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이냐"

하지만 윤 위원장은 이런 우려를 불식시키기라도 하는 듯, 실종자 가족들의 '힘'을 결집시켰다. 이런 윤 위원장의 대처능력과 실종자 가족들에 대한 설득력에 현장 기자들까지도 혀를 내둘렀다.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이냐"는 궁금증이 쏟아졌다.

하지만 윤 위원장의 이면은 평범하다. 대구 출신인 윤 위원장은 건국대 86학번. 학사장교를 거쳐 94년 중위로 예편한 그는 지금은 서울에 있는 한 외국계 보험회사에서 컨설턴트 일을 하고 있다. 그 사이 한 대기업에서 과장으로 일을 하다, 결국 IMF를 계기로 '뛰쳐나왔다'는 경력을 제외한다면 샐러리맨으로 '평탄한' 길을 살아왔다.

ⓒ 오마이뉴스 이승욱
그는 이번 참사로 아내의 언니, 즉 처형을 잃었다. 그래서 부모형제나 자식, 즉 피붙이를 잃은 다른 실종자 가족들에 앞서서 '실종자 가족 대표'라는 직함이 부담스러웠다고 한다.

사고 당일 대구로 내려올 때만 하더라도 그는 자신이 실종자 가족 대표를 맡아서 일을 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사고수습을 하는 대구시의 처사를 보고서는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한다.



"처음엔 '내가 할 일이 아니다' 느꼈지만..."

초기에는 일부에서 "직접 당사자도 아니면서 왜 나서냐"는 의혹의 눈초리를 던지기도 했다고 털어놨다. 그의 면전에서 '인간적인 모멸감'을 주는 일부 사람들의 행동에 '이건 내가 할 일이 아니다'라고 느꼈지만, 오히려 그의 발목을 잡는 것은 실종자 가족들이었다. 그가 위원장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도 한 실종자의 아버지가 그를 믿고 선뜻 권한을 넘겨줬기 때문에 가능했다.

"사고가 나기 한 달 전쯤 아내가 딸애를 출산했죠. 실종된 언니 걱정에다, 출산 후유증으로 고생하고 있던 아내가 못내 걱정스러웠죠. 저희 가족들도 '잃은 사람 찾는 것보다 산 사람을 살려야 한다'면서 걱정했어요. 그런데 실종자 가족인 한 아주머니가 찾아와, '아내 전화번호를 알려주면 내가 부탁해보겠다'며 간고히 매달렸죠. 이러다 저러다 하다보니 지금까지 오게 됐습니다."

윤 위원장은 딸애의 출생신고도 제대로 못해 벌금을 내야 할 처지라며 머리를 긁적였다.

윤 위원장이 실종자 가족의 '두터운' 신망을 얻었던 것은 그의 '공정한' 일 처리 때문이었다. 그는 매일 전날 있었던 협상안과 대책위 회의결과를 실종자 가족들에게 일일이 공개했다. 그리고 모든 현안들은 실종자 가족들의 '동의'를 얻는 가운데서 진행시켰다. 그만큼 실종자 가족들의 대책위에 대한 신뢰는 깊어지게 했다.

현재 실종자 대책위는 '지하철 운행 중단'과 '조해녕 시장 등 책임자 처벌' 요구를 집중적으로 거론하고 있다. 물론 실종자들의 신원확인과 보상이 1차 문제지만, 재발 방지를 위한 노력도 실종자 가족들의 '몫'으로 여기고 있다. 그래야 실종자들의 넋을 달랠 수 있다는 것이 윤 위원장의 생각이기도 하다.

"조해녕 대구시장에 대한 책임문제는 끝까지 물을 것입니다. 이것은 시장으로서 자질 문제예요. 기본적인 품성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처음부터 실종자 가족들의 원성을 샀던 것도 수많은 거짓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조 시장이 왜 책임이 없는 겁니까."

ⓒ 오마이뉴스 이승욱
"왜 조 시장 책임이 없나. 끝까지 물을 것"

윤 위원장을 비롯한 실종자 가족들은 12일 대책위 이름으로 조 시장과 지하철공사 전 사장의 처벌을 요구하는 '고소장'을 검찰에 접수했다. 하지만 여기서 그치지는 않을 태세이다. 윤 위원장은 지난 8일 3차 시민대회에서 "시장도, 국회의원도, 시의원도 모두 한나라당인 데 같은 식구끼리 견제와 감시를 어떻게 잘 할 수 있겠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사실상 '한나라당 책임론'까지 거론한 셈이다.

애초 지하철 참사는 조해녕 대구시장이 한나라당 당적을 보유한 터라 '미묘한 정치적 갈등'도 예상되고 있었고, 정치권 내부에서도 각각의 이해 관계에 따라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윤 위원장이 한나라당 책임론을 들고 나오자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는 '신중론'도 제기됐다. 하지만 윤 위원장은 거침없이 말한다.

"대구 사정을 잘 모르고 있었던 처지라 한나라당이 어떻다, 저렇다 말할 게 못 됐죠. 그런데 모 지역방송 토론회에 출연했을 때 한 참석자가 '한나라당 책임론'을 이야기하더군요. 솔직히 죄지은 사람도 한나라당, 벌을 주는 것도 한나라당이면 제대로 되겠습니까. 분명히 한나라당에게도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일부에서 윤 위원장이 '정치적 발언'을 하자 '정치적 야망이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하는 것에 대해서도 일축한다. "정치요? 저는 대학 다닐 때부터 정치, 정치인은 '쓰레기'라고 생각했던 사람입니다. 내가 왜 그 바닥에 뛰어든다는 생각을 하겠습니까. 옳은 말을 하는데도 정치적인 눈길로 보는 사람들이 문제 아닙니까."

ⓒ 오마이뉴스 이승욱
그는 대구지하철 참사를 대구만의 문제로 끝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대구지하철 외에도 전국 각지에 있는 지하철에 대한 안전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는 "전국적으로 전문가들이 동원돼 지하철의 안전문제를 점검하는 범국민 대책위까지 꾸려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근 실종자의 인정사망 여부를 심사하는 실종자인정사망심사위원회가 꾸려졌다. 우여곡절 끝에 구성된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단기간에 끝날 수 있을 것이고, 그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며 희망적인 생각을 내비쳤다.

하지만 아직 대책위가 요구하는 '포괄선인정사망'(기자주-지금까지 접수된 실종자들을 인정사망하고 가능성이 낮은 부류부터 검토해나가는 방식. 현재 실종자 가족들은 경찰 수사가 진행되고 있어 이 방식으로 처리해야 시간이 줄어든다고 주장하고 있다)이 받아들여질지는 미지수이다. 앞으로 길에도 이리저리 암초들이 산재해 있다.

그래서일까. 윤 위원장은 그들을 '지원해줄' 여론이 잦아들까 염려하고 있었다.

"사고가 나자 시민들의 분노가 하늘을 찌를 듯했었죠. 성금과 자원봉사자가 넘쳐 났습니다. 너무 고맙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안타깝습니다. 일반 시민들의 관심이 서서히 사라지는 걸 냉정하게 느낍니다.

물론 실종자 가족들은 우리 부모와 자식과 형제들의 죽음을 먼저 챙겨야 합니다. 하지만 원인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왜냐면 실종자 가족들은 먼저 가족을 잃어봤기에 알 수 있습니다. 언젠가 또 다른 희생자를 낳지 않기 위해 국민들의 힘을 모아야 합니다."


대책위 사무실 앞까지 배웅하는 윤 위원장을 뒤로 하고 대구시민회관을 빠져 나왔다. 초봄이지만 아직도 새벽 기운은 쌀쌀했다. 불현듯 더이상 '제2의 윤석기'가 나오지 않길 바라는 바람이 기자의 마음을 적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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