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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키 가방을 메고 다녀야 대접을 받는다는 러시아 이주노동자

▲ 한글을 배우는 이주노동자들
ⓒ 이주원
한국에는 두 부류의 외국인들이 산다. 우선 우리의 부모들이 어릴 때, "기브 미 초콜릿"을 외치며 꽁무니를 따라 붙던 미국인들이 산다.

한국전쟁 뒤 폐허로 바뀐 이 땅에서 미국인은 우리들에게 환호와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때의 이미지가 남았는지 아직도 한국인에게 백인들은 우수한 인종인냥 대접받는다.

1970년∼80년대, 일본의 관광객들이 깃발을 들고 한국 땅에 물밀듯이 들어왔다. 일본보다 물가가 싼 한국은 일본인들에게 꽤 매력적인 관광상품이었다.

10년 뒤, 한국에서도 옛 일본 관광객들과 똑같이 깃발을 든 한국인들이 태국을 비롯한 동남아시아로 여행을 떠나는 게 보편화되었다. 동남아시아로 여행을 떠났던 한국인들의 필수 소지품이 '사탕, 초콜릿, 모나미 볼펜' 등이었다. 이런 물건들을 가지고 간 이유는 빈곤한 아시아 국가들의 가난한 아이들에게 나눠주기 위해서였다. 한국전쟁의 참담한 기억을 지닌 한국인들에게 빈곤한 아시아 국가의 아이들은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던 '과거의 현재형'이었던 모양이다.

한국은 박정희 개발독재가 낳은 심각한 사회모순이 점점 쌓여가지만, 가난한 아시아 국가들의 민중들이 보기에는 '코리아드림(Korea Dream)'을 꿈꿀 수 있는 땅이다. 현재 40만명이 넘는 외국인 이주노동자들이 '코리아드림'을 꿈꾸며 들어왔다. 이들은 한국인들이 일하기 꺼려하는 힘들고, 더럽고, 위험한 직종에서 성실하게 노동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을 바라보는 한국인들의 시선은 차갑고, 배타적이며 때론 공격적으로 돌변하기도 한다. 이들도 미국과 유럽에서 온 백인들과 같은 이방인일 뿐인데, 한국인들은 이들을 열등하고 모자란 인종인냥 취급한다.

한국사회에 깊게 뿌리내린 민족주의적 배타성과 경제적 우월성이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 이주노동자들을 바라보는 두 개의 잣대이다. 물론 한국인들 중에서도 양심과 지성의 목소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목소리들이 아직은 소수이기 때문에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할 뿐이다.

가끔 외국인 이주노동자들도 한국인과 일체감을 느낀다고 한다. 한국에 거주하는 한 외국인 이주노동자는 "지난 월드컵 때, 아시아인으로써 한국인들과 일체감을 느꼈다"고 그때의 소감을 밝혔다.

<외국인노동자 인권문화센터> 정진우 실장은 "한국의 월드컵 4강 진출을 함께 응원했던 이주노동자들에게 보여준 한국인들의 애정 어린 모습들 속에서 그들은 한국인과 함께 살아가고 있고, 역사적인 월드컵을 함께 응원했다는 자부심을 가졌다"고 말해주었다.

이 체험은 한국인들과 함께 문화를 즐긴 적이 없었던 외국인 이주노동자들에게 새로운 경험이었다.

월드컵의 끝난 뒤, 공장과 거리에서 부둥켜안으며 응원했던 흥분이 가라앉자 외국인 이주노동자들은 다시 냉대와 멸시의 현실로 돌아왔다.

이런 현실의 냉혹함을 정 실장은 "한국을 응원하며 건배했던 사장님과 한국인 동료들이 다시 험한 말로 힘든 작업을 시키고, 거리에서 함께 환호했던 한국인들이 버스나 지하철에서 차가운 시선을 보내는 현실을 다시 보았다"면서 "이주노동자들이 가졌던 한국사회의 구성원이 되었다는 생각이 얼마나 부질없는지 많은 이주노동자들이 느끼고 있다"고 증언하고 있다.

블라디미르(28·남·가명). 그는 나이키 가방을 메고 다녀야 대접받는다는 러시아 이주노동자다. 그에게 왜 그러냐고 물어봤다. 그는 더듬거리는 한국말로 "좋은 옷, 가방, 신발을 입거나 신어야지 아이들도 미국 사람이라고 좋아하고, 가게에서 물건을 살 때로 친절하게 대해준다"고 했다. 그는 "허름하게 옷을 입으면 러시아 사람이라고 부모들이 아이를 우리 곁에 가지 못하게 하고, 가게에서도 불친절하다"고 침울하게 말했다.

삶의 총체적 방식(total way of life)으로 그들을 받아들여야

외국인 이주노동자들이 한국에서 받는 이런 아픔들의 근본원인은 무엇일까?

신자유주의의 물결이 거세게 흐른다. 이런 세계화의 물결은 제3세계의 빈곤을 더욱 부채질한다. 계속 빈곤해지는 제3세계 아시아 민중들은 생존을 위해서, 선진산업국은 저임금 노동력의 필요하기 때문에 이주노동자들은 점점 늘어날 수밖에 없다. 이는 한국도 마찬가지였다.

▲ 경불련 정책토론회에서
ⓒ 이주원
1992년 도입한 '현대판 노예제'인 산업기술연수제도가 외국인 이주노동자 문제의 근본원인이다. 연수제는 저임금 노동인 외국인 이주노동자를 수입해 인력난과 자금난을 겪고 있는 중소영세기업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천박한 발상이었다.

유승무 교수는 지난 3월 4일 경불련 정책토론회에서 한국이 연수제를 고집하는 이유를 보며 "아마도 국가가 나서 외국인 이주노동자의 노동을 착취하여 자본의 이윤을 높이려는 발상이 숨겨져 있는 게 아니냐"고 따끔하게 일침을 가했다.

유 교수는 "노동력 상품은 다른 상품과 다른 특수성, 즉 인간이라는 특수성을 지니고 있다. 외국인 이주노동자도 노사 관계의 당사자지만 동시에 인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외국인 이주노동자에게도 작업환경만큼이나 작업장 밖의 생활, 즉 삶의 문제도 중요하다"고 밝혔다.

사람이 살다보면 생로병사는 물론 교육, 여가활동, 종교활동, 천재지변, 각종범죄에 직면하게 된다. 한국도 이런 문제를 풀어갈 건강, 산재, 고용 보험, 국민연금 등 사회적 토대와 사회적 자본을 마련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외국인 이주노동자에게는 전혀 쓸모 없는 '그림의 떡'일 뿐이다. 한국에서 40만명 이상의 외국인 이주노동자들이 생활하고 있는데, 이들의 삶과 관련된 사회적 토대와 자본이 거의 없다는 것은 우리사회의 천박한 연대의식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유 교수는 "노무현 정부가 외국인 이주노동자의 고용허가제를 허용하기 전에 그들을 위한 사회적 장치와 자본을 마련해야 하는 것"이 먼저 풀어갈 문제라고 주장했다.

현 한국의 외국인 이주노동자 관련 제도(연수제는 물론이고 고용허가제 시안에서조차)에는 노동력의 재생산 문제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외국인 이주동자들의 ▲의·식·주 문제 ▲언어·풍습·종교의 문제 ▲교육과 직업훈련의 문제 ▲건강·여가·오락·문화생활의 문제 ▲가족관계·친구관계· 사회생활 문제 ▲2세의 법적·신분적 문제와 건강·복지·교육·장래의 문제 등을 고려한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외국인 이주노동자의 이러한 삶의 문제는 여전히 제도 밖의 문제로 고스란히 남아 있다.

외국인 이주노동자의 작업장 밖의 생활, 즉 삶의 문제에 관심이 없는 것은 국가만이 아니다. 이들의 삶의 문제에 대해 관심이 없기로는 노동운동 진영도 예외는 아니다. 노동운동 진영은 아직 경제투쟁 중심의 전투적 노동조합을 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들에게 시민사회의 일원으로 국제적 연대의식을 요구하는 것은 억지에 가깝다.

그렇다면 국가가 외국인 이주노동자들의 고용허가제 허용하고, 삶의 문제에 관심을 갖는다고 문제가 풀릴 것인가?

유 교수는 "한 국가의 정부와 시민사회가 해결하기에는 이미 세계적인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는 "고용허가제가 외국인 이주노동자들도 노동자로서 권리를 주며, 불법상태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대폭 줄일 수 있다"고 밝힌 뒤, "신자유주의 물결에 따른 제3세계의 빈곤화와 도시화를 고려한다면, 이 제도도 한시적일 수밖에 없다"고 했다.

▲ 권리를 찾아 나선 이주노동자들
ⓒ 이주원
한국불교도 세계시민사회연대에 동참해야

현재로서 이주노동자 문제는 전 세계가 앓고 있는 불치병이다. 서구 유럽 국가들도 이주노동자 문제가 우파와 좌파의 정치적 색깔을 보여주는 잣대가 됐다. 그만큼 이 문제는 세계화의 물결을 타고 등장한 전지구적 차원의 사회문제이다. 이런 이유로 이 문제를 개별 국가가 해결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가능하지 않다. 국제적인 문제를 한국과 같이 해결할 능력이 거의 없는 일국 정부가 풀려고 하는 것 자체가 해프닝이기 때문이다.

과거와 달리 한 국가나 그 국가의 시민사회가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시대는 갔다. 콕스나 홀거 하이데의 주장처럼 세계의 정치·경제의 터닝포인트 시기인 지금은 국제적 차원에서 세계시민들의 연대와 진지전이 필요하다. 특히 외국인 이주노동자 문제의 한 국가의 제도적 한계를 뛰어 넘기 위해서 시민사회단체가 사회운동 차원에서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고 대안을 만들어야 한다.

한국인들이 외국인 이주노동자들과 더불어 살아야 할 운명이라면, 제3세계 외국인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은 반드시 넘어서야 한다. 사대주의적 시각이나 민족주의적 시각에서 벗어나 문화적 상대주의 시각으로 이들을 바라볼 수 있는 보편적인 시각이 필요하다.

불교사상은 외국인 이주노동자 문제의 균형 잡히고 보편적 시각을 제공한다. 그런데 그동안 한국불교는 외국인 이주노동자 문제에 관심조차 갖지 않았다. 이제는 바꿔야 한다. 신자유주의의 폭력을 넘어 설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세계 시민들의 비폭력 연대뿐이다. 이런 역사적 물결에 불교도 한 뜻으로 동참해야 한다. 아직 한국불교가 외국인 이주노동자 문제를 풀어갈 역량은 없다. 그래서 오히려 이 문제야말로 불교계가 새삼스럽게 관심을 가져야 할 적합한 사회문제가 아닌가 한다.

불교인권센터 이상효 사무국장은 "현 불교계의 열악함 속에서 외국인 이주노동자의 지원운동을 고민하면 막막해진다. 내가 보기엔 이주노동자 문제를 인권문제로 바라봤으면 좋겠다. 포교의 의미보다는 '방생'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확대하여 '인간방생'의 개념으로 이주노동자 문제를 불교계가 풀어갔으면 좋겠다"며 외국인 이주노동자 문제에 대한 한 가지 해법을 내놓았다.

오늘날 한국불교는 우리사회의 최대종교로서 최소한의 사회적 정당성을 갖추어야 한다는 당위성에 어느 정도 공감하고 있다. 더구나 앞으로 불교시민운동의 방향은 시민사회운동이 외치는 목소리와 톤을 같이할 가능성이 크다. 불교사상이 특수이해를 넘어 모든 존재의 보편이익을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남은 문제는 불교시민운동 주체의 발굴과 교육 그리고 실천뿐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www.goodbuddhist.org와 www.budgate.net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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