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문재인 민정수석 내정자에게

▲ 문재인 민정수석 내정자
ⓒ 오마이뉴스 권우성
어제 강연차 대구에 다녀왔습니다. 평소 자신감에 넘쳐 활기차던 대구가 침울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하긴 비행기 안에서부터 평소와 다른 감을 받았습니다. 대구행 비행기를 탈 때마다 "대구에 살거나 대구와 관련이 있는 사람들은 매우 밝다"는 생각을 하였는데 비행기 안이 어제는 조용하였습니다. 강연분위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강의를 들으러온 어머니들의 표정은 대구어머니들답지 않게 어두웠고 침울하였습니다.

"대구와 지하철은 인연이 없다"거나 "지하철 화재사건이 터지고 난 뒤부터 매사에 의욕이 없고 그냥 멍하게 있게 된다"는 어머니들의 이야기나 "사건 이후 지하철타는 사람이 별로 없다. 한 칸에 한두 명밖에 타고 있지 않다"는 택시기사의 말, "한동안 우울할 것 같다" "왜 대구에서만 이런 일이 터지는지 모르겠다" "대구에는 나쁜 사람들이 많다"는 대학생들의 말은 대구지하철 화재사건 이후 대구시민들 정서의 일단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문 변호사님, 저는 대구시민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는 참 착한 백성들(?)"이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일부 언론이 타깃을 정해 강요하지 않는 한 우리들은 늘 책임을 자신 속에서 찾는 것이 버릇이 되어 있는 사람들이거든요. 그런데 과연 이번 사건을 놓고 "대구와 지하철이 인연이 없다"거나 "대구에는 나쁜 사람들이 많다"는 식으로 생각하고 자책하는 것을 어쩔 수없으니 놓아두자는 식으로 대응해도 되는 것일까요.

지금 사회 각계에서 이번 사건에 대한 각종 원인 진단이 나오고 있고 대응책이 모색되고 있습니다. 조선일보를 비롯한 수구언론은 이 사건을 심지어 '테러'로 규정하는 선정주의적 접근도 마다하지 않고 있으며 어떻게 해서든 이 사건을 'DJ정부'와 '노당선자' 흠집내기로 활용하려 애쓰는 듯한 '의혹'을 갖게 합니다. 언론을 통해 공개된 원인진단이나 재발방지책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보지만 중요한 핵심을 우리 모두 비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자 신문들은 사고원인이나 피해규모 확대의 원인을 보다 미세한 것에서 찾고 있습니다. '마스콘 키'와 관련된 문제가 그것인데 물론 사건속으로 들어가 개개인의 대응이 적절했는지 여부를 확인하고 책임을 묻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근본적인 원인에 동의하리라는 전제하에 문재인 민정수석내정자에게 저는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문재인 변호사님.

와우아파트가 무너지고 성수대교가 붕괴된 일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 수많은 대형비리사건들이 우리 뇌리에 박혀 있습니다. 한보사태나 신동아그룹 사건, 지금 수사가 진행되고 있는 SK 최회장 사건 등등 모든 대형비리 사건은 '돈'과 '권력' 주변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건들이 사회의제화하고 사법적 판단을 거쳐 처리되는 과정에는 늘 정- 경 - 권 - 언 유착의 '부패사슬'이 가동되었고 우리는 단 한 번 대형비리 사건을 그에 걸맞게 해결해본 경험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대구 지하철 참사에서 오히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왜 일본의 지하철전동차는 석유를 뿌리고 불을 붙여도 불이 나지 않는가, 왜 우리지하철 전동차는 같은 상황에서 불붙어 유독가스를 내뿜어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는가'하는 점입니다. 1968년 일본에서도 유사한 사고가 났고 그 이후 지하철 안전관리에 만전을 기해왔다고 합니다. 대구지하철 참사와 관련해 대한 기술사협회가 낸 보고서에 따르면 현재 전국 지하철 모두가 언제든 비슷한 조건이 형성되면 '대구참사'를 겪을 우려 속에 달리고 있습니다.

어디 지하철뿐인가요. 부실한 도시가스관, 녹슨 수도관, 낡은 전기관련 배관에 인터넷 라인…. 개별적으로 부실한 각종 관들이 정돈되지 못한 채 서로 엉클어져 있을 '땅속 문제'를 생각하면 길을 걷다가도 불안한 마음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이런 저런 관들이 뒤엉켜 혼란스러운 '땅속 문제'가 정 -경 - 권 -언 부패사슬로 뒤엉키고 혼란스러운 '땅위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적게는 해당 지하철 내장공사과정에서 벌어졌을지도 모를 부정, 크게는 우리 사회 전체를 움직이는 '비공식적 부정'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비공식적 부정'이 배후에서 조정하는 사회를 원칙과 정의가 지배하는 사회로 바꿀 궁리를 '곰곰히' 하지 않는다면 몇십년 후에도 우리는 부패의 사슬이 결과한 대형부정부패사건과 각종 대형참사를 자초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재인 변호사님.

조선일보는 지난 2월 19일 '이념형 청와대 적절한가'라는 사설을 통해 노무현 당선자의 청와대 진용구성이 '충격적인 실험'이라고 전제하고 "국정을 제대로 이끌기 위해서는 개혁성도 필요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안정성과 신뢰가 확보돼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어 조선일보는 "국민에게 (이번 청와대 진용이) 안정성과 신뢰감을 주고 있느냐의 물음엔 얼른 대답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실 조선일보가 투옥경력을 가진 운동권 출신만 10명에 이른다는 청와대 진용을 '충격적인 실험' 정도로 묘사한 것이 우리에겐 더 충격적입니다. 이전 정권 때였다면 벌써 '사상검증'을 시도하고 '감놓으나, 배놓으라' 훈수 두었을 조선일보도 대선 결과 앞에서 어쩔 수 없이 '조정되는' 현실을 목도하며 기쁘기에 앞서 엄숙해지는 것은 왜일까요.

일부 시민사회단체 할동가들은 벌써 무서워지기 시작하였습니다. 특히 학생운동 - 민중운동 - 재야운동 등을 통해 시민사회단체활동을 하게 된 활동가들이 느끼는 두려움의 정도는 더 큰 것 같습니다. 뜬금없이 웬 두려움이냐구요.

그 두려움의 실체는 이런 겁니다. 역사상 처음으로 '운동권 출신' 변호사가 대통령이 되었고, 그 '일당'이 청와대 주요 진용을 차지했습니다. 그런데 만일 그들이 실패한다면 어떻게 될까를 현실적으로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두렵지 않을 수 없다는 겁니다.

김영삼씨가 대통령이 되고 많은 재야활동가들이 현실정치로 뛰어들었습니다. 김대중씨가 대통령이 되자 보다 많은 운동가들이 같은 선택을 했습니다. 총학생회장 출신의 상당수가 정치권으로 진출했고 더러는 국회의원이 되었습니다. 과거에도 많은 '운동권' 출신들이 현실정치 속에서 부분적 '힘'을 가진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디까지나 보수정치의 한 부분으로 '편입되었고' 아무리 높은 점수를 주어도 자기 정체성을 상실했다고 평가할 수밖에 없습니다.

노무현의 대통령 당선과 그 '일당'의 청와대 입성은 질적으로 다릅니다. 민주화 운동의 정통성을 가진 사람들이 '당당하게' 정권의 중심에 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러 현실적 조건을 고려할 때 이들이 실패할 확률도 상당히 높고, 그결과에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 '노무현과 그 일당'(?)이 실패했을 경우 한동안 우리 사회에서 '희망'이라든가 '진보'라는 단어는 설자리를 잃게 되고 수구세력이 보수라는 미명하에 '기세'를 떨칠 것입니다. 그들은 떠들어댈 것입니다.

"운동권이라고? 인간이 다 그렇고 그런 거지 다를 것이 무어냐... 운동권출신이라고 도덕성이 더 높다고? 웃기지마라. 권력을 쥐면 인간은 다 변하게 되어 있다..."

이말을 받아 대중들은 맞받아칠 것입니다. "그놈이나 그놈이나 다 같다. 운동권 출신이라고 속는 셈치고 믿어주었으나 혹시가 역시로 끝났다."

일시적으로 노무현에 기대했던 사람들은 현실정치에 더욱 더 실망하고 돌아서게 될 것입니다. 노무현식 실험에는 이런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다같이 확인해야할 시점에 우리는 서 있습니다. 철없는 승리에의 도취나 김영삼, 김대중 정권 때 청와대에 들어갔던 학생운동권 출신 몇 명이 보인 설익은 자만따위가 '노무현과 그 일당'(?)에게 애초 허용될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문재인 변호사님, 초심으로 돌아가 엄숙한 역사의 요구를 다시 바라보아주실 것을 당부합니다. 지금 이 순간, 미국의 대외정책과 북핵문제가 가져온 위기, 대북 송금문제를 비롯해 숱한 현안들이 당선자앞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우리 내부의 갈등,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내부의 갈등이 비정상적인 경로로 중요의제를 왜곡되게 사회의제화하고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정치적 거래의 수단으로 변질시키고 있는 현실입니다. 우리 사회 일각의 목표는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갈등의 확대재생산을 통한 기득권유지 = 개혁성향이 강한 당선자 흔들기라는 현실이 가장 넘기 어려운 과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각각의 문제는 적절한 사회의제화와 이에 따른 해법모색으로 해결되어야 하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각자 선 바로 그 자리에서 자기 몫을 충실히 해내는 것이 그것입니다. 특별히 시민사회단체는 시민사회단체로서 자기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내야 합니다. 그리고 청와대에 들어간 운동권출신 보좌진은 그 자리에서 자기몫을 제대로 해내야 합니다.

작은 권력이 주어지면 세상을 얻은 듯 교만해지는 것이 인지상정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적어도 80년대 엄혹한 시절, 순수함과 비타협적 투쟁으로 시대의 아픔을 고스란히 받아내고 길을 뚫어왔던 사람들에겐 권력이나 돈보다 더 큰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헛된 현실적 명예보다 소중한 가치를 가슴에 품고 있기에 우리는 감옥살이와 고문의 고통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까.

그래서 저는 노무현 당선자가 아니라 문재인 변호사님과 80년대이후 '운동의 길'을 걸어왔던 몇 분들에 대해 소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현안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실수도 할 수 있고 결과적으로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도덕성'만 견지해준다면, 문재인 변호사와 그 주변이 부패하지 않는다면 그래도 '희망'은 지킬 수 있을 것 같아서입니다.

만일 문재인 변호사와 그 주변이 도덕성마저 잃어버리고 부패하게 된다면 아마 많은 국민들은 '희망'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기조차 부끄럽게 생각할 것입니다. 특히 80년대 '민중'이라는 단어와 '민주주의'라는 가치에 인생을 걸었던 과거의 동지들은 참혹한 '여생'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도덕성은 순간순간의 자기관리와 작은 선택의 문제의 결과 견지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소한 특권을 부리려하지 않는 태도에서부터 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해 처신하는 일, 푼돈 밝히지 않는 일 등등을 포함해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 일 즉 신념을 포기하느니 자리를 버리겠다는 초연한 처세까지, 자기와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결국은 이겨주실 것을 당부드립니다.

5년후 문 변호사님과 그 주변의 누군가가 대형비리사건과 연루되어 이름이 오르내리는 일을 우리가 만나는 악몽의 시나리오는 '영화화' 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다시 대구로 돌아볼까요. 한 평범한 여성 회사원이 말하더군요. 대구 젊은이들 사이에서도 노무현 당선자와 그 주변의 참신한 인물들에 대해 기대가 크다고. 기대가 크니까 혹시 잘못되었을 때 실망감도 클 것 같다고.

지금 노무현 당선자와 그 주변에 대한 기대는 역대 어느 청와대 진용에 걸었던 기대보다 큽니다. 그리고 그 기대는 일부 지역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국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대구에 가서 새삼 확인하고 왔습니다.

대구참사가 무리 없이 해결되어 대구시민들이 우울함에서 벗어나 활기찬 본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고 전국민이 '땅속 문제'로 불안에 떨지 않을 수 있도록 '땅위 문제'들이 정의와 상식의 관점에서 해결되길 바라마지 않습니다.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전 민언련 사무총장, 상임대표 전 방송위원회 부위원장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