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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의 자선당을 통째로 뜯어 옮겨 오쿠라슈코칸(大倉集古館)의 조선관(朝鮮館)으로 삼았다. 하지만 이 건물은 애석하게도 1923년 관동대지진 때 불타버리고 간신히 유구만 남았다가 1996년 1월에야 겨우 그 잔석만 국내로 되돌아왔다. (자료제공 : 김정동 교수)
경복궁의 자선당을 통째로 뜯어 옮겨 오쿠라슈코칸(大倉集古館)의 조선관(朝鮮館)으로 삼았다. 하지만 이 건물은 애석하게도 1923년 관동대지진 때 불타버리고 간신히 유구만 남았다가 1996년 1월에야 겨우 그 잔석만 국내로 되돌아왔다. (자료제공 : 김정동 교수)
당초 우리측에서 제출한 청구품목은 4479점. 그러니까 그 성과는 턱없이 미흡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였다. 그나마 이것도 직접 회담에 나선 교섭대표가 나름의 애를 쓴 결과이긴 할텐데, 아무튼 시대적 상황이 여러 모로 역부족이었던 탓도 없지 않았으리라 여겨진다.

하지만 그날 이후 더 이상의 문화재반환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럼 이때 돌아오지 못한 나머지 문화재들은 어찌 하라는 것인지? 문화재협정 그 자체에 대한 평가가 크게 엇갈리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민간소유의 유출문화재는 아예 교섭대상에서 제외되었다는 것도 문제였다. 개인이 소유한 문화재는 일본정부로서도 어찌할 수 없다고 하고, 또한 국유물(國有物)이라고 하더라도 가령 대학기관과 같은 곳에 귀속된 것은 자기네들이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라고 강변을 거듭하였다니, 애당초 최소한의 성의만 표시하겠다는 것이 일본측의 저의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런데 더욱 큰 문제는 하나 더 있었다. 문화재협정을 통해 어쨌거나 그만한 생색을 냈으니 문화재반환의 문제는 그것으로 일단락되었다는 인식이 알게 모르게 통용되고 있다는 대목이다. 말하자면 문화재협정으로 유출문화재의 소유에 대한 기득권을 공연히 추인해준 꼴이 되지 않았나 하는 얘기이다. 그리하여 마땅히 되돌아와야 할 우리 문화재가 오히려 그로 인해 발목이 잡혀버린 것은 아니었던가 하는 우려도 없지는 않다.

이러한 점은 문화재협정이 서명된 지 40년이 가까운 세월이 흐르도록 이렇다할 추가적인 교섭의 재개 내지 협정의 개정을 위한 정부차원의 공식적인 조치가 전혀 없었다는 사실에서도 그대로 확인된다. 그나마 1991년 5월에 영친왕비의 복식 등의 양도에 관한 협정이 하나 있었던 것이 유일한 예외였다면 예외였을 뿐이다.

<월간 아리랑> (1996년 1월호)의 표지에 수록된 '이천향교방석탑'
<월간 아리랑> (1996년 1월호)의 표지에 수록된 '이천향교방석탑' ⓒ 월간 아리랑
만에 하나 문화재 협정을 가리켜 유출문화재의 반환을 포기한다거나 이에 대한 논의를 종결하는 근거로 삼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참으로 고약한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누가 뭐라건간에 유출문화재의 반환에 대한 당위성은 전혀 훼손된 바 없으며 또한 그에 대한 논의는 여전히 진행형이라는 명제는 아무런 변함이 없다고 보는 것이 옳겠다.

그런데 과연 민간소유의 문화재로 이미 귀속되었다고 하는 것이 문화재의 반환을 거부하는 절대적인 근거가 되기는 하는 것일까? 백 번을 양보하여 문화재의 유출 경위가 투명하다면 간혹 그럴 수도 있는 일이라 여겨지지만, 대개는 그렇지도 못한 것이 사실이니까 설령 개인의 소유물이라고한들 문화재반환의 대상에서 무턱대고 제외하기는 어려운 노릇이다. 더구나 그것이 일방적인 권세와 횡포가 판을 치던 식민지 시대에 벌어진 일이었다면 말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경우는 어떨까? 일본 도쿄의 오쿠라슈코칸(大倉集古館)에는 지금도 식민지 조선에서 걷어들인 석조유물들이 그득하다. 그 중에 하나 오층석탑의 존재가 눈길을 끈다. 이 석탑은 어찌 하여 이 먼 곳까지 옮겨진 것일까? 알고 봤더니 이것은 특이하게도 조선총독부가 직접 기증한 물품이다.

원래 경기도 이천에 있었다는 이 석탑의 이건 경위에 대해서는 약간의 기록이 남아 있다. 이름하여 '이천향교방석탑'. 이를테면 이천 향교 근방에 있던 석탑이라는 얘기이다. 이 석탑이 제자리를 떠난 것은 1915년 가을 경복궁에서 개최된 '시정오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 때문이었다.

이 당시 공진회미술관이 건립되면서 야외전시구역을 치장할 만한 야외전시유물이 필요했던 것이고, 지리적으로 가까운 경기도 이천에서는 '안흥사오층석탑'과 더불어 이 석탑이 수집대상에 포함되었다.

경복궁에서 개최된 조선물산공진회(1915년) 당시의 야외전시유물. 사진의 중심부에 놓여진 석탑이 '이천향교방석탑'이다.
경복궁에서 개최된 조선물산공진회(1915년) 당시의 야외전시유물. 사진의 중심부에 놓여진 석탑이 '이천향교방석탑'이다.
지금도 경복궁 내 야외전시구역에 남아 있는 개성의 남계원칠층석탑, 원주의 영전사삼층석탑, 천수사삼층석탑, 그리고 박물관 실내에 진열 전시되어 있는 경주남산의 삼릉계 약사불과 감산사지 석불상 등이 모두 이때의 야외전시유물로 수집된 문화재였다.

애당초 유물의 수집목적이 공진회장을 치장하는 것에 있었기 때문에 일단 외형이 번듯하고, 특히 옮겨오는데 큰 불편이 없도록 고만고만한 크기의 석조문화재들이 선택되었다는 것이 그 공통점이었다.

조선고적도보에 수록된 평양정거장 앞 육각칠층석탑. 오쿠라 기하치로가 당초에 이 석탑을 점찍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대신에 이천향교방석탑이 일본으로 옮겨졌다.
조선고적도보에 수록된 평양정거장 앞 육각칠층석탑. 오쿠라 기하치로가 당초에 이 석탑을 점찍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대신에 이천향교방석탑이 일본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조선물산공진회가 끝나고 곧이어 총독부박물관이 출범하자 이때의 야외전시유물들은 통째로 넘겨져 그대로 박물관의 수장품이 되는 것은 예견된 수순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은 아니었다. 이미 제 고향을 떠난 처지가 되어 버린 이천향교방석탑이 참으로 어이없게도 멀리 낯선 땅 일본에까지 한차례 더 자리를 옮겨야 했던 것은 1918년 10월의 일이었다.

이미 경복궁의 자선당을 뜯어 옮겨 오쿠라슈코칸의 '조선관'으로 삼았던 오쿠라 기하치로가 또 다시 욕심을 부렸다는 것이다. 그가 점찍은 대상물은 원래 평양정거장 앞에 놓여 있던 칠층석탑이었으나, 이것의 반출을 청원하는 과정에서 조선총독부가 고적조사위원회의 이름을 빌려 이를 불허하고 그 대신 못이긴 척 '이천향교방석탑'을 거저 가져가라고 했던 것이 그 발단이었다.

그런데 그 핑계가 참으로 가관이었다. "먼저 시정오년기념공진회 때 경기도 이천군 읍내면에서 이전하여 지금 박물관 본관 앞에 놓여 있는 오층석탑은 제작상 특이한 점이 없을 뿐만 아니라 가량(佳良)하다고 칭할 만하지 못하며, 일언(一言)으로서 이를 평한다면 타(他)에 내력이 있고 또는 우수한 석탑 많은 조선에 있어서는 특히 박물관에 보존하여 진열품의 하나로 헤아림은 오히려 적당하지 못한 감이 있다"는 이유를 달았다.

일본으로 옮겨진 '이천향교방석탑'과 짝을 이루던 또 하나의 '이천향교방석탑'이 현재 이천양정여자종합고등학교의 교정에 그대로 남아 있다.
일본으로 옮겨진 '이천향교방석탑'과 짝을 이루던 또 하나의 '이천향교방석탑'이 현재 이천양정여자종합고등학교의 교정에 그대로 남아 있다. ⓒ 이순우
말하자면 조선 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저 그런 석탑이라서 구태여 박물관에 놓아두고 진열할 만한 가치가 없다는 얘기였다. 괘씸하고도 부아가 치미는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조선물산공진회장을 장식하겠다고 기껏 옮겨온 지 3년만에 그것도 그다지 '빼어난' 석탑이 아니라는 해괴한 이유를 달아 그것도 선심이나 쓰듯이 개인미술관에 거저 줘버린다는 것이 어디 말이나 될 법한 얘기인가 말이다.

일의 경위는 그러했다. 제 아무리 사유물이라고는 할지라도 그것이 이처럼 얼토당토 않는 조선총독부의 기증행위에 따른 것이라면 진작에 반환문화재의 목록에 포함되었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니까 지금으로서도 이천향교방석탑을 되돌려 받아야 하는 이유는 더욱 뚜렷한 셈이 된다. 그네들 스스로 정말 그러한 평가를 내리고 있었다면 그토록 '하잘것없는' 석탑을 진작에 되돌려주면 될 일일 텐데, 왜 그렇게는 하지 못하는 것일까?


또 하나의 유출문화재인 평양율리사지팔각오층석탑. 아쉽게도 이 석탑은 언제 옮겨진 것인지 그 경위가 분명하지 않다.
또 하나의 유출문화재인 평양율리사지팔각오층석탑. 아쉽게도 이 석탑은 언제 옮겨진 것인지 그 경위가 분명하지 않다. ⓒ 월간 아리랑

선린상업학교 교정의 오쿠라 동상. 1927년에 세워졌다가 태평양전쟁 막바지인 1944년 일제의 금속물 공출로 사라졌다.
선린상업학교 교정의 오쿠라 동상. 1927년에 세워졌다가 태평양전쟁 막바지인 1944년 일제의 금속물 공출로 사라졌다. ⓒ 선린80년사


오쿠라 기하치로(大倉喜八郞)는 누구인가?

오쿠라 기하치로(大倉喜八郞: 1837-1928), 오쿠라재벌의 창업자인 그는 일찍이 건물점(乾物店)을 개업하였다가 곧이어 총포점(銃砲店)을 열었는데, 조선 땅에 처음 진출한 것은 그의 나이 40세 무렵의 일로 강화도조약의 체결로 부산항이 개항된 때였다. 1878년에는 시부자와 에이이치(澁澤英一)와 더불어 부산에서 일본제일은행의 조선지점을 열었고, 그 후로 무역과 군수업의 일에 주력하면서 거대상인으로 성장하였다.

그는 특히 오쿠라구미(大倉組)를 설립하여 건설업에도 적극 진출하였는데, 가령 덕수궁 석조전은 이 회사가 시공을 담당하여 준공한 것이었다. 압록강제재무한공사라는 회사를 설립하여 압록강 유역의 목재를 대규모로 벌채한 것도 그의 소행이었으며, 나중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건립할 당시 지반공사에 사용된 말뚝재는 바로 이 회사가 공급한 목재였다.

그의 행적에 있어서 특기할 만한 사항의 하나는 그가 선린상업학교의 설립자였다는 사실이다. '선린(善隣)'이라는 이름은 한일우호선린의 뜻으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정하여 준 것이라 전해지며, 한때 선린상업학교의 교명(校名)조차도 그의 이름을 본 따 '오쿠라상업학교'로 바꾸려고 했던 적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가 선린상업학교의 설립자였던 탓에 1927년 즉 그의 나이 90세에 학교교정에 자신의 동상이 건립되기도 하였으나, 이 동상은 역설적이게도 태평양전쟁의 막바지에 금속물 공출로 철거된 바 있다.

그의 이력에 있어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대목은 역시 오쿠라 슈코칸의 설립에 관한 것이다. 지금은 그의 집터에 세워졌다는 오쿠라호텔의 한켠에 남아 있는 오쿠라슈코칸은 원래 조선과 중국 등지에서 수집한 미술품을 수장하기 위해 1909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1912년에는 일반에게 공개되었으며, 그후 경복궁의 자선당 건물을 옮겨다 '조선관'으로 삼아 1917년에 역시 일반에게 공개하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자선당은 1923년 관동대지진의 피해를 입의 그의 수집미술품과 더불어 소실되고 그 유구만이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수습되어 1996년에 우리나라로 되돌아와 경복궁 한켠에 따로 전시되어 있다. 지금의 오쿠라슈코칸은 1927년에 도쿄제국대학 건축과 교수 이토 쥬타(伊藤忠太)의 설계로 재건된 것이라고 하며, 이곳에는 이천향교방석탑뿐만 아니라 평양의 율리사지에서 옮겨진 팔각오층석탑이 하나 더 남아 있는데 이 석탑이 언제 그곳으로 옮겨진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 이순우

덧붙이는 글 | 오쿠라집고관에 옮겨진 '이천향교방석탑'과 '평양율리사지석탑'에 대해서는 일찍이 정영호 교수(한국교원대)가 조사하여 <문화사학> 창간호(1994)에 "재일 고려석탑 이기"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소개한 바 있고, 또한 재일동포잡지 <월간 아리랑> (1996년 1월호)에도 오쿠라집고관에 대한 탐방기사가 보도되어 그곳의 야외전시유물로 전락한 우리 문화재의 존재에 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바 있음을 적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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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년전부터 문화유산답사와 문화재관련 자료의 발굴에 심취하여 왔던 바 이제는 이를 단순히 취미생활로만 삼아 머물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린 것 같습니다. 알리고 싶은 얘기, 알려야 할 자료들이 자꾸자꾸 생겨납니다. 이미 오랜 세월이 흘러버린 얘기이고 그것들을 기억하는 이들도 이 세상에 거의 남아 있지는 않지만, 이에 관한 얘기들을 찾아내고 다듬고 엮어 독자들을 만나뵙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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