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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너를 기다리며
다시 너를 기다리며 ⓒ 정동순
햇볕이 잘 드는 우리 집 침실 창가에는 두 개의 덩치 큰 화분이 나란히 있다. 도라지를 심은 것인데 겨울이라 아무 것도 없는 빈 화분이다. 이웃집 아줌마가 놀로 왔다가 아무 것도 없는 화분이 덩그러니 놓여 있는 걸보고 이상한지 이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본다.

원래는 이곳으로 이사 오기 전에 씨애틀 근교의 밭(시에서 시유지를 약간의 돈을 받고 채소나 꽃을 가꾸길 원하는 도시 사람들에게 임대하는 땅)에 심었던 것이다.

여름에 이사준비를 하면서 짐을 싸고 여러 가지 것들을 정리하면서도, 귀하게 얻은 씨로 심은 도라지와 들깨가 마음에 걸렸다. 그런 걱정을 하다가 하루는 삽이며 화분을 챙겨서 밭으로 향했다.

밭에 도착하니 언제나처럼 마음이 편안해졌다. 흙냄새도 좋고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워싱턴 호수가 한가하고 나뭇가지마다 바람도 살랑거린다. 이국생활에서 받은 스트레스가 이곳에 오면 다 풀리곤 했는데……. 도라지들은 잘 자라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잎과 줄기가 튼튼한 것들을 골라 흙 째로 파서 큰 화분에 정성껏 심었다. 그리고 나머지는 비닐에 싸서 아는 언니의 어머니께 드리기로 했다. 큰 화분을 들고 주차장까지 오는데 무게가 장난이 아니었다.

드디어 이삿날, 모든 이삿짐을 남편이 운전하게 될 유홀이라는 트럭에 싣고, 화분들은 여러 날 가더라도 햇빛을 잘 받을 수 있게 내가 운전할 승용차의 조수석에 실었다.

우리는 워싱턴 주의 침염수림 사이를 달리고, 몬태나의 산악지대를 끙끙거리며 오르고, 와이오밍의 황야에서 하품을 해대며 달리고 또 달렸다. 내가 물을 마실 때 이 녀석들에게도 물을 좀 나누어주었고 밤에는 차밖에 내놓고 시원한 공기를 쐬어 주었다. 드디어 삼일 째 되던 날 콜로라도 주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새로 살 집에 화분들을 내려놓으며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내가 그 먼 곳으로부터 너희들을 정성껏 데려 왔으니 너희들도 잘 자라야 된다.”

하늘색도라지꽃
하늘색도라지꽃 ⓒ 정동순
처음에는 베란다에 두었는데 오후 늦게 해가 좀 비치다가 마는 것이었다. 그래서 거의 종일 해가 비치는 안방으로 화분을 옮기게 되었다. 그리고 도라지는 내 바람대로 무럭무럭 잘 자라주었다.

9월이 되자 도라지 줄기 끝에서 풍선 같은 꽃봉오리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냥 잎과 같은 초록색이어서 눈에도 잘 안 띄었는데 점점 커지면서 색은 옅어졌다.

매일같이 봉오리들을 들여다보며 9월 중순에 부산에 가기 전에 활짝 핀 꽃을 보았으면 했다. 그러나 부산으로 떠나는 날이 되어도 꽃은 피지 않았다. 떠나면서 나는 남편에게 물 자주 주라는 부탁을 몇 번이나 했다.

한국에 도착하여 일주일인가 지났을 때 남편이 전화를 했다.

“도라지꽃이 피었어.”남편은 약간 흥분된 목소리로 꽃이 핀 사실을 전해 주었다.
“무슨 색이에요?”나도 기뻐서 물었다.
“하얀 색인데 꼭 별처럼 생겼어.”

먼 길을 따라와서 핀 너
먼 길을 따라와서 핀 너 ⓒ 정동순
남편은 신이 나서 열심히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비디오 카메라로 꽃을 찍어 놓겠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정성들인 꽃을 못 보는 것이 아쉬웠지만 가족들과 지내는 즐거움으로 도라지꽃에 대해서는 곧 잊어버리고 말았다.

드디어 한 달간의 한국 방문이 끝나고, 긴 비행기탑승으로 인한 피로를 이끌고 집에 돌아왔다. 방에 들어섰을 때 도라지꽃은 볼품없이 사그라져 있었다.

다음날 아침, 남편은 잠깐 거실로 나와 보라고 했다. 피곤함이 다 가시지 않은 눈으로 거실로 가니 티브이 화면 가득, 아주 예쁜 하얀 도라지꽃 한 송이가 피어 있었다.

정말 단정하게 꽃잎이 다섯 갈래로 나뉘어져 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곧이어 파란색 도라지꽃이 클로즈업되었다. 파란색 꽃은 애수가 깃든 것처럼 약간 떨리는 느낌까지 있었다. 나는 산허리 우리 친정어머니 밭머리에서 하늘거리던 도라지꽃들을 떠올랐다.

다시 너를 기다리며
다시 너를 기다리며 ⓒ 정동순
도라지는 전해오는 민요와 함께 우리들에게 항상 친숙감을 준다. 타향살이에서 이 작은 식물에 의지하는 마음이 참으로 크다. 식물을 기르면서 느끼는 안정감과 꽃을 기다리는 마음은 내 생활에 탄력을 준다.

도라지꽃에는 애달픈 소녀의 이야기가 숨어 있다. 옛날에 어느 산골에 도라지라는 소녀가 먼 친척 오빠와 함께 살고 있었다고 한다. 어느 날 오빠는 중국으로 공부를 하러 떠나며 10년만 기다리라고 했다.

그러나 10년이 지나도 오빠는 돌아오지 않았다. 떠도는 소문에는 오빠가 풍랑을 만나 바다에 빠져 죽었다느니, 중국에서 결혼을 했다느니 하는 소문뿐이었다.

소녀는 오빠를 기다리는 것을 포기하고 산 속에 들어가서 혼자서 살았다. 세월이 흘러 할머니가 된 소녀는 그래도 오빠가 그리워 뒷산으로 올라가 오빠가 떠났던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 때 등 뒤에서 커다란 소리가 들렸다.

“도라지야.”할머니는 오빠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서 그 자리에서 숨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한 송이의 꽃이 피어났다. 사람들은 이 꽃을 도라지라고 불렀다. 도라지꽃의 꽃말은 영원한 사랑이라고 한다.

그런데 나는 도라지꽃을 보고 있으면 도라지꽃의 꽃말이 향수라는 착각이 든다. 이 꽃만큼 고향을 생각하는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것이 또 있을까? 도시의 삭막함이 싫은 사람들은 베란다에 도라지를 한번 키워보시기를 바란다. 삭막함이 싹 가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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