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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임소혁
산동네에서 대문을 열고 사노라니 불청객이 심심찮다. 내 집은 북한산 비봉으로 오르는 등산로 들머리에 있기에 주말이면 등산객들로 붐빈다.

현관문을 두드리는 불청객 대부분은 등산객으로 수통을 내밀고는 물을 채워 달라고 한다.

휴대 전화가 대중화되기 전에는 주위에 공중전화가 없기에 빌려 달라고 하는 이도 더러 있었다.

대체로 통화 내용은 집에 있는 아이에게 가스 밸브를 잠그지 않은 것 같다면서 곧장 잠그라는 얘기, 얼른 일어나 밥 챙겨 먹고 TV만 보지 말고 숙제하라는 등이다. 때로는 급하게 화장실을 찾는 여성도 있다.

불청객은 사람만이 아니다. 지난해에는 제비 한 쌍이 찾아왔다.

동네를 몇 바퀴 휘돌더니 내 집으로 들어오는 전깃줄에 앉아 나에게 한참 동안 뭐라고 조잘거렸다. 당신 집에 쉬어 가고 싶으니 허락해 달라는 수인사(修人事) 같았다.

내가 환영의 뜻으로 손을 흔들자 그들은 고맙다는 인사인 양, 잔뜩 조잘거린 뒤 처마 밑 전홧줄에다 자리를 잡았다.

참 오랜만에 보는 제비라 반가웠고 이참에 내 집에다 아예 새 집을 짓고 가을까지 살기를 바랐다. 서울에서 제비와 한 집에 살다니 이 무슨 복이요, 경사인가.

그날 밤잠을 설치면서 몇 차례나 일어나서 제비가 머물고 있는 자리를 살며시 엿보았다. 부부 제비는 전홧줄에 금실 좋게 나란히 앉아 잠을 자고 있었다.

이튿날 출근할 때까지도 그대로 앉아 있었다. 이들이 이제 내 집에 자리를 잡는 것 같아 출근길 발걸음이 가벼웠다.

이들이 처마 밑에다 둥지를 튼다면 어릴 때 보았던 것처럼 둥지 밑에다 배설물받이도 만들어 줘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날 점심시간에 궁금해서 집으로 전화를 했다.

“웬일이에요.”
“제비가 집에 있나 궁금해서.”
“제비가 낮에 집에만 있나요. 장모보다 더 섬기는 구려.”
“……….”

그날 퇴근 후 곧장 귀가했으나 제비는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들이 앉았던 자리 밑에 배설물만 남긴 채….

그날 밤에도, 이튿날에도 제비는 종내 나타나지 않았다. 아마 그들이 하룻밤을 자면서 이곳을 살핀 결과, 그들이 정착해 살기에는 이 도시가 적당치 않았나 보다.

아스팔트와 시멘트로 뒤덮인 도시에서 그들이 먹이를 구하기란 수월치 않을 테니까. 며칠 동안 그들이 남긴 청량한 재잘거림의 여운이 귓전에 맴돌았다.

불청객 중 가장 귀찮은 방문객은 들고양이다. 이놈들은 꼭 천장에다 보금자리를 튼다. 얌전하게 머물다 가면 좋으련만 밤낮 없이 울어댄다. 때로는 싸움을 하는지, 짝짓기를 하는지, 밤새도록 퉁탕거리고 울부짖는다. 막대기로 천장을 두들기며 쫓지만 그때뿐이다.

한번은 이놈들이 천장에서 저희끼리 퉁탕거리다가 천장 판막이가 떨어져서 제놈도 놀라고 우리 식구도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이들과 숨바꼭질을 하면서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며 동거했다.

하지만 이놈들이 새끼까지 낳을 때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본격적으로 퇴치작전에 나서지만, 어린 새끼는 차마 어떻게 할 수 없어 물총 세례로 쫓아 버린다. 다만 이놈들의 내습 이후로 쥐들이 자취를 감춘 점만은 감사해야 할 일이다.

매우 드문 일이지만, 따뜻한 봄날 현관문을 열어 놓으면 산새들이 거실 마루까지 들어와 잠시 놀다 간다. 그때만은 나도 그들 친구가 된 기분이다.

아무튼 내 집은 여러 초대하지 않은 손님들이 무시로 드나든다. 어쨌든 내 집에 청했든, 청하지 않았든 손님이 찾아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 임소혁
한 달 전, 비탈길을 헐떡이며 내 집을 들어서는데 잘 생긴 개 한 마리가 꼬리를 치면서 맞이한다.

너무 뜻밖에 일이라 아내에게 물었더니, 점심 때 낯이 선 개 한 마리가 집안에 들어와서는 아무리 쫓아도 가질 않는다고 했다.

첫 눈에도 귀티나는 개였다. 하얀 털에 갈색 얼룩무늬의 스피츠 종(種)이다.

개란 놈은 영물(靈物)이라 제 주인을 꼭 따르고 몇 백리나 되는 집도 영락없이 찾아간다는데, 대체 웬 일일까?

이놈이 주인 따라 등산 왔다가 그만 주인을 잃었을까? 아니면 주인이 이놈을 잃었을까?

그도 저도 아니면 주인이 어느 날 갑자기 이 개가 미워서 차에다 싣고 수 십 킬로미터나 되는 이 동네에다 풀어놓고 줄행랑을 쳤을까? 또는, 주인집 가족 중 누군가 못 살게 굴어 이놈이 제 발로 도망쳐 왔을까?

별별 생각이 다 떠올랐지만 개와 대화가 되지 않으니 정답은 끝내 헤아릴 수 없었다. 아내는 내가 귀가하기 전, 몇 번이나 개에게 네 집을 찾아가라고 일렀지만, 그때마다 고개를 돌리면서 먼 산만 쳐다보더라고 했다.

나도 아내처럼 개에게“네 집에 가!”하고 일렀지만 역시 고개를 돌린 채 먼 산을 쳐다보았다. 만일 등산객이 하산 길에 이 개를 잃었다면 다시 찾으러 오리라 생각이 들어 그냥 내버려두었다.

밤이 늦었는데도 개는 내 집을 떠나지 않아 아내가 밥을 줬다. 허나 개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딸애가 밤늦게 귀가하자 아주 제가 주인인 양 짖기까지 했다.

이튿날 출근길에 저놈이 먼저 나선다. 아내는 이참에 너희 집 찾아가라고 개에게 소리쳤다. 개는 연신 꼬리치며 내 앞뒤를 쫓더니 동네 어귀 버스 정류장까지 따라 왔다.

내가 버스에 오르자 저놈도 잽싸게 뒤따라 올랐다. 버스 기사가 역정을 내며 "야이 이놈의 개새끼야!" 대걸레 자루를 휘두르자 개는 비명을 지르며 뒷문으로 도망쳤다.

학교에 도착한 후 뒷일이 궁금해서 아내에게 전화를 했더니 집안에 있다고 했다.

그날 퇴근 후, 개에게 몇 번이나 네 집을 찾아가라고 일렀지만 여전히 먼 산만 쳐다볼 뿐이었다. 빗자루로 때리는 척 쫓자 집밖으로 나가는 듯하더니 이내 다시 집안으로 들어왔다.

그날 밤 개 문제로 가족회의가 열렸다. 아내는 남의 개이니까 파출소에 데려다 주라고 했고, 딸과 아들은 제 발로 들어 온 거니까 그냥 두자고 했다. 나도 아이들 의견에 동조하면서 주인이 찾아가든지 제 발로 떠나지 않는 한, 우리 집에서 기르자고 했다.

아내는 평소 개 기르는 일을 탐탁해 하지 않았다. 개털과 배설물 처리 때문이었다. 그동안 내가 몇 번이나 개를 기르자고 제의했지만, 정작 밥을 줘야 할 아내가 반대해서 친지와 동료 선생님들이 강아지를 분양해 주겠다는 호의를 매번 사양했다. 하지만 이번만은 제 발로 찾아온 손님이라 아내도 차마 쫓을 수가 없었나 보다.

우리가 개를 기르는 일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이 동네에 이사 온 후 두 차례나 길렀다. 첫 번째 개는 진돗개의 피가 섞인 아주 영리하고 예쁜 놈이었다. 이름도 '루키'라고 붙여 주었다.

일 년여 무척 정이 들었는데 이웃집에서 놓은 쥐약을 먹고는 입에 거품을 쏟으면서 죽었다. 그놈을 뒷산 땅속 깊이 묻을 때 내 혈육을 잃은 듯 마음이 아팠다.

그 얼마 후 고모님이 토종개 새끼 한 마리를 갖다 줘서 다시 길렀다. 이놈은 먹성이 좋아 아무렇게나 길러도 잘 자랐다.

주인에 대한 충성심도 대단해서 출근길에는 꼭 버스 정류장까지 배웅해 주고 퇴근길에는 늦은 밤이라도 용케 내 발자국 소리를 알고는 뛰쳐나오곤 했다.

두어 해 지나자 몸집도 컸다. 복날을 앞둔 여름날 개장수가 찾아왔다. 값을 잘 쳐 줄 테니 팔라고 했다. 아무리 사람이 비정(非情)하다지만 복날 제물이 될 개장수에게야 넘겨줄 수 있으랴.

한 마디로 딱 잘라 거절했으나 개장수는 군침을 삼키며 부득부득 조르다 갔다.

이튿날 아침 내 집 개는 종적이 없었다. 개장수의 소행임이 심증은 갔지만 물증도 없고 그 후 개장수는 꼴도 볼 수 없어서 다시 찾을 길이 없었다.

그런데, 이놈의 개는 밥을 먹지 않았다. 하얀 밥을 두 그릇이나 두고도 냄새만 힐끔힐끔 맡을 뿐 쫄쫄 굶고 있었다. 아들 녀석이 보다 못해 우유와 비스킷을 주자‘게 눈 감추듯’바닥까지 핥았다.

전번 집에서 양식으로 자란 모양이었다. 현관문만 열리면 들어오려 하고, 문밖에서 들어오겠다고 마냥 낑낑거리는 걸 보면 아파트 실내에서 살았나 보다. 아내는 개에게 일렀다.

“너 우리 집에서 살려면 아무거나 잘 먹고, 아무 데서나 잘 자야 한다.”
그러고는‘저놈이 배가 덜 고프고 덜 답답한 모양’이라면서 내버려두자 다음날부터는 개밥 그릇의 바닥까지 핥았고 현관문을 열어도 들어올 생각을 않았다.

팔자 길들이기는 사람이나 개나 마찬가지인가 보다. 아내는 개의 목줄도 풀어 주자고 했다. 우리는 너를 묶어 키우지는 않겠다. 언제든지 네 맘 내키는 대로 네 주인을 찾아가라는, 네 주인이 찾으면 돌려주겠다는 뜻이다.

이웃과 친지들이 개가 예쁘다고, 집에 개가 제 발로 들어오면 좋은 일이 생긴다고 한 마디씩 덕담을 했다. 나는 건성으로 화답하지만 내심으로는 그런 요행을 조금도 기대하지 않았다.

나와 너, 우리는 피차 하느님의 피조물이 아니냐. 알고 보면 우리 모두 이 세상에 잠시 왔다가 떠나는 나그네 신세다. 네가 길을 잃고 잠시 헤맬 때 내가 잠시 쉴 곳을 마련한 게 무슨 그리 대순가.

옛날 우리네 인정은 나그네가 길을 가다가 목이 마르면 아무 집에나 들러 목을 축였고, 날이 저물면 아무 집이나 들러 하룻밤 묵고 갔다. 그게 사람이 사는 세상이었다.

내 집 마루 벽에는 <명심보감> 일 절이 걸려 있는 바, “오는 것을 거절 말고 가는 것을 잡지 말라”이다.

초대하지 않은 손님 개야, 너무 깊이 정들까 보아 아직 너의 이름도 짓지 않았다만, 네가 내 집에 머물고 싶을 때까지 편히 살아라. 물론 네가 떠나고 싶을 때는 언제든지 떠나도 좋다.

덧붙이는 글 | 박도 기자는 경북 구미에서 태어났다. 현재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며,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이다. 작품으로는 비전향 장기수의 딸과 해직기자의 순애보를 그린 장편 소설《사람은 누군가를 그리며 산다》와 산문집《비어 있는 자리》《애물단지》《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민족 반역이 죄가 되지 않는 나라》《샘물 같은 사람》《아버지의 목소리》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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