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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 하나. 쌍둥이 언니이면서 어머니인 것은?
21세기로 넘어오면서 넌센스 퀴즈는 과학의 진지한 주제가 됐다. 현대 과학은 ‘나’와 유전자가 동일한 쌍둥이면서 동시에 ‘나’에게 생명을 준 모성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핵이 제거된 난세포에 체세포의 핵을 이식시키면 동일한 유전자를 가진 제2의 생명체가 탄생하게 된다. 이렇게 탄생한 아기는 체세포를 준 엄마의 딸이자, 엄마와 동일한 유전자를 가진 쌍둥이 동생이 된다. 복제인간이다.

미국 클로네이드사가 복제아기 탄생을 발표했다. 아직 실험이 성공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법의 테두리 밖에서 복제인간 출현은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 마침 복제인간의 이야기를 다룬 독일 작가 샤를로테 케르너의 소설 ‘블루 프린트’(다른우리)가 나왔다. 복제를 통해 시리라는 쌍둥이 동생을 낳은 피아니스트 이리스 셀린의 이야기.

다발성 경화증이라는 불치병에 걸린 이리스는 자신의 재능을 동생이자 딸 시리를 통해 이어나가려 한다. 어린 시절부터 스파르타식 피아노 훈련에 동원된 시리는 완벽한 테크닉을 전수받지만 피아노 선율에 실린 이리스의 혼만은 복제하지 못한다. 결국 순회 공연은 실패하고 시리는 피아노를 그만 둔다. 이리스이기를 포기한 것이다.

SF소설의 디스토피아적 분위기 대신 케르너는 시리의 1인칭 관점으로 정체성 혼란에 빠진 복제인간의 내면을 마치 성장소설처럼 그려나간다. 복제인간 출현이 기정사실처럼 돼버린 지금에 와서 복제인간의 자아와 인권의 문제를 제기한 ‘블루 프린트’의 문제 의식은 선구적인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블루 프린트’가 내보인 낙관적 미래상을 읽으며 우려를 금할 수 없다. 소설 속에서 복제 허가를 받을 수있는 것은 생식능력이 있는 성인남녀 0.32%로 정해져있다. 이는 정상적 분만에 의해 일란성 쌍둥이가 태어나는 확률과 동일하기 때문에 자연의 섭리 안에서 유전적 다양성은 유지된다는 주장이다. 생명의 권위와 사회적 질서도 엄정하게 지켜지는 것으로 설정했다. 소설 속에서는 문제가 그저 복제인간의 개인적 혼란일 뿐인 것이다.

과연 그런가. 과학의 발전이 아무리 눈부셔도 결코 건너뛸 수없는 난제는 있는 법이다. 복제 인간의 문제를 정체성의 문제로만 한정한 케르너의 문제 의식은 생명의 신성함을 도외시한 것은 물론이고 과학적으로도 많은 것을 간과했다. 한번의 복제로 온전한 아기를 갖게되는 확률이나 복제를 통해 태어난 아이가 성장하면서 정신적 육체적 결함을 갖게 될 가능성, 완벽한 복제 기술에 이르기까지 쓰레기통에 버려질 복제 아기들의 운명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문제들이다.

조만간 궁리출판사에서는 인간 복제 기술의 현황과 문제점 등을 다룬 책을 낼 계획이란다. 2003년은 아무래도 복제 인간이 화두가 될 모양이다.

블루프린트

샤를로테 케르너 지음, 이수영 옮김, 다른우리(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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