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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서울 명동의 언덕바지에 있는 명동성당이 사회적 존재로서의 고통과 번민으로 가슴 아파하는 사람들의 피난처가 되어버렸다. 지난 해에도 철도 노조원의 농성에 이어 발전 노조원들이 그리고 성모병원의 직원들이 그곳에서 농성을 하며 문제의 해결을 하소연하며 자연권으로서의 인권이 보장되길 하소연한 바 있다.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위임을 받아 그들의 계약에 의해 성립된 법에 입각하여 물리적인 강제력을 통해 때로는 그 사회의 질서를 유지해야 하는 정부는 "더 이상 농성이 지속되어 국가의 질서를 문란하게 한다면 농성의 해제를 강제하고 범법자들은 법에 의거 처단하겠다"고 위협하지만 좀체 성역 안으로 경찰을 투입하지 않는 모습은 참으로 보기에 좋아 기쁘기 한량없었다.

70년대 초에 V. 위고의 소설 <노트르담의 곱추>란 번역본을 '똥종이' 해적판으로 읽은 적이 있다. 작중 주인공인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 카지모도는 실로 버림받은 영혼이라 할 다중들의 위협과 모멸을 피하여 노트르담 사원으로 피신하게 되자, 그 부랑인들은 성당 밖에서 카지모도를 놀려대기만 했지, 그 안으로 들어가 이를 잡아내지 못하는 장면이 나온다.

우리의 역사 고대에 삼한에는 소도(蘇塗)란 특정지역이 있었다. 그곳엔 솟대라 하여 높다란 깃대가 얼려 있었는데 그것은 오늘날 고딕식 교회당 건물의 십자가나 무당집의 입구에 세워진 신대처럼 신성 하강을 상징하는 곳으로 신성이 지배함을 뜻한다. 우리 역사에서 최초의 고대국가인 고조선의 건국신화에서 보듯, 단군에서 왕검으로 이어지는 역사에서 단군시대는 국가 통치의 군주는 신정정치에 걸맞게 종교적 제사장이면서 정치적 군장의 역할을 하였다.

그러다가 왕검의 시대로 옮아가 정치적 군장이 온 천하의 백성들을 다스리는 시대가 실현되었다. 이렇게 옮아가는 과도기는 마치 서양사의 근대 태동에서 신권의 교황과 세속권의 왕들이 서로 대립하여 갈등하는 과정을 경험했었다. 그러한 특정의 시기, 마치 소도에서 보듯 하늘의 세계와 땅의 세계를 일상적 삶 속에 담고서 사람들은 살지 않았나 생각된다.

근대 이후 인간은 인간 이성의 절대성을 믿고 이성주의를 철저히 신봉하며 오늘도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많은 학자들은 사유의 불확실성과 현상의 불확정성을 주장하며 이성의 맹신을 경계, 질타하고 있다.

머리는 하늘을 향하고 두 발은 땅을 딛고 살아가는 인간은 참으로 묘한 존재다. 인간과 우주의 원형적 의미를 신화학적으로 밝혀보려 한 엘리아데와 프레이져는 인간이 닿을 수 없는 하늘을 '성(聖)'의 세계로 그리고 온갖 인간들의 다양한 삶이 펼쳐지는 땅의 세계를 '속(俗)'의 세계로 규명한 바 있다. 이를 공간화하여 이해한다면 땅의 인간은 시간적으로는 순간성, 공간적으로는 유한성, 가치적으로는 상대성의 한계 속에서 제한적인 삶을 영위하는 인간은 하늘의 존재가 실재하든 아니면 하나의 관념이든 그것이 지니는 영원과 무한과 절대의 그 무엇을 갈망한다고 하겠다. 그래서 존재의 허무와 절망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불로초를 구함'이나 '바벨탑을 쌓음'처럼 몸부림치며 신성의 하강이란 '은총의 단비'가 내려지길 끝없이 기원하는 모습을 보인다.

자연상태의 인간들이 어쩔 수 없이 사회 또는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야만 하는 상황에서, 나름대로의 욕망을 지니고 살아가는 각 개인들은 때로는 조화의, 때로는 대립의 면모를 지닌다. 힘의 우위가 지배하는 현대란 자본주의 사회에서 힘의 약자인 가련하고 불쌍한 이들이 어제와 같이 오늘처럼 그리고 내일도 명동성당에서 농성을 하며 하소연하고 구원을 염원할 것이다. 사실 그곳은 명동성당이 아니라 조계사란 사찰이라도 관계없다. 부족한 우리 인간이 추구하는 세속적 질서가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는 가치의 세계가 승화, 고양되는 그러한 한국사회가 실현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한다.

문제적인 사안이 엉킨 실타래처럼 해결되기 어렵다 하더라도 사회적 평화를 위하여 물리적 공권력을 투입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신속과 과감의 능률성을 발휘해서는 안되겠다. 그것은 모순과 갈등의 현대 한국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지닌 구원 또는 위안, 그리고 삶의 희망을 앗아가는 것이 되니깐. 또한 성소(聖所)의 관련자들은 박애 또는 자비의 원의를 바탕으로 세속적 잣대로 이들을 내몰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금할 길 없다.

실로 버림받아 비천한 이에 대한 가치의 실천이 한 인간의 구원을 뜻한 소설, V. 위고의 작품 < 레 미제라블(Le-Miserable) >을 다시금 한번 더 읽고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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