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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연말 화궈펑을 밀어내고 실권을 장악한 덩샤오핑은, 1989년 톈안먼(천안문 사태)의 비극으로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조타수를 자오쯔양에서 장쩌민(江澤民)으로 바꾸는 등 회생책 속에서 살아남는다. 당시 장쩌민의 등장은 의외였다. 그의 앞에는 리펑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톈안먼에서 쫓아내라고 외치는 리펑을 권좌를 앉힐 만큼 덩샤오핑이 정치감각이 없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장쩌민은 1985년 상하이 시장으로 중앙정계에서 들어선다. 지금은 중국 경제의 제 1도시인 상하이를 책임지는 시장이나 당서기는 요직에 들지만 당시만 해도 상하이는 개발의 전 단계여서 위상은 그다지 높지 않은 편이었다. 이후 그는 1987년 11월에 열린 중국 공산당 제 13기1중전회(一中全會)에서 중앙정계의 흰자위인 중앙정치국 위원에 오른다.(노른자위는 상무위원인데, 중앙정치국 위원 가운데 6~10명 가량이 상무위원을 맡는다.) 그렇다고 해도 자오쯔양과 경합하던 리펑 등 기라성 같은 선배들이 포진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장쩌민의 등장은 의외였다.

하지만 장쩌민은 톈안먼 사태가 끝난 1989년 6월 중앙위원회 총서기에 올라 당을 장악하고, 1989년 11월에는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에 올라 군을 장악한다. 또 1993년 3월에는 양상쿤(楊尙昆)으로부터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주석을 인계 받아 취임하면서 실질적인 중국의 리더가 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의 위에는 여전히 덩샤오핑이 있었다. 어떻든 주도권을 잡기 위한 헤게모니 쟁탈전이 없을 리 없다.

1994년 6월 23일 홍콩 문회보(文匯報)는 덩샤오핑의 칭다오(靑島) 시찰을 보도하면서 중앙과 지방관계의 개선 등 몇가지를 말했다고 보도했다. 일본 마이니치의 기자 가마무라 고지는 저술에서 당시의 이 기사도 1992년 남순강화가 보수파에 대한 반격이듯이 누군가를 향한 것이었고, 그 당시에 권력을 장악해가던 장쩌민을 향한 것으로 봤다.

사실 끝없는 도전과 재기에 의해 오뚝이처럼 살아난 덩샤오핑과 달리 장쩌민은 한갓 권력의 하부에 있다가 어느 날 분 변화의 바람 속에서 갑자기 상경해 황제에 오른 한 고조(漢 高祖) 유방(劉邦)과 같은 인물로 보였다. 하지만 장쩌민은 이미 쇠약한 덩샤오핑을 압도할 힘을 갖고 있었고, 이 칭다오 시찰 기사는 진위마저 의심받으며, 별다른 의미를 갖지 못한다. 당시만 해도 이미 덩샤오핑의 건강은 상당히 악화되었기 때문이다.

기자의 주위에 있는 이들 가운데 장쩌민을 두꺼비에 비유하는 이가 있다. 그를 두꺼비에 비유하는 것은 인상 때문이기도 하지만 기(氣)를 모으는 힘이 유달리 뛰어나다는데 있다. 두팔을 내리는 주룽지와 달리 배가 나온 장쩌민은 대부분 두 손을 배꼽 아래 단전쪽으로 모아 항상 자신의 기가 빠져나가지 않도록 보호한다. 이는 그의 독특한 인상을 만드는 한편 강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1994년 여름 덩샤오핑은 중국 최고 수뇌부의 대결장인 베이다이허 회의에 참석하지 못한다. 덩샤오핑의 생일인 8월 22일 장과 리펑 등이 덩샤오핑의 집에 방문한다. 이와 더불어 덩샤오핑의 건강악화설이 힘을 얻고, 장쩌민은 친정체제 구축에 더욱 힘을 싣는다. 그해 9월 25일부터 열린 공산당 제 14기 중앙위원회 제 4회 전체회의(14기 4중전회)에서 상하이 시장인 황쥐(黃菊) 상하이시장, 우방궈(吳邦國) 등 친위세력을 중앙정계로 끌어올린다. 이른바 상하이방(上海幇)의 전면적인, 아니 노골적인 부각이었다.

1995년 1월 덩샤오핑 집안의 대변인과 같은 역할을 한 그의 3녀 덩롱(鄧榕)이 미국에서 가진 ‘뉴스위크’와의 기자회견에서 “지난 5년간 중국이 얻은 성과는 장쩌민과 분리되어 말할 수 없다”는 사실상의 백기를 내민다. 문혁 시기에 동료들의 구타에 못 이겨 베이징대학 건물에서 뛰어내려 장애인이 된 덩푸방은 아버지의 명성을 등에 업고, 장애인기금을 모금하는 등 정치 보복을 받을 소지가 많았기에 덩씨 가족으로서는 그런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덩씨 가족의 항복 등 이제 더 이상 장쩌민의 시대가 열리는 것을 의심할 누구도 없었다.

장쩌민 시대의 개막

이후 자신의 중국을 만들기 위한 작업을 시작한다. 1995년 3월에는 지앙시성 지우지앙(九江)시에 있는 후야오방의 묘지에 방문한다. 중국 고대 사상의 격전장이자 정치의 격전장인 루산(盧山)의 남쪽에 자리한 공칭청(共靑城)에 방문한 것을 시작으로 다음에 춘지에에는 후야오방의 유족들을 만나 회담해 그는 후야오방의 이끌던 공산주의 청년단을 자신의 세력으로 끌어들인다. 공칭청의 위쪽 우라오펑(五老峯) 아래 있는 바이뤼둥(白鹿洞) 서원에서 주희와 육상산이 ‘격물치지’(格物致知)를 놓고 사상논쟁을 벌이고, 루산의 정상에서 마오쩌둥과 펑더화이가 벌인 논쟁을 벌인 것에 반해 장쩌민은 이곳에서 합종(合縱)의 지혜를 보여준다.

이후에도 장쩌민은 이런 합종연횡의 지혜를 발휘하며, 권력을 장악한다. 장쩌민은 후야오방의 계열인 후진타오(胡錦濤)를 부주석으로 만들어 완전히 자신의 세력권 안으로 만드는 한편, 자신의 경쟁자였지만 자신의 등극을 인정한 리펑(李鵬)과 경제통인 주룽지(朱鎔基)를 이끌고,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바탕으로 권력을 완전히 장악한다. 물론 쩡칭홍(曾慶紅)를 비롯해 우방궈, 황쥐, 자칭린(賈慶林) 등 자신의 사람을 등용한다. 한편으로는 상하이에서 올라와 중앙 정치를 흔든 자신을 질시하던 천시퉁(陳希同) 등이 부패사건에 연루되자 베이징과 상하이의 구도로 싸움을 이끌어 몰아낸다.

드디어 장쩌민의 시대가 된 것이다. 그는 1926년 8월 17일 지앙쑤성 양저우(揚州)의 혁명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초기에 6번째 삼촌이자 계부로 상하이 초기 공산당 지도자 지앙상칭(江上靑)의 후광을 많이 입는다. 지앙상칭의 휘하에서 있다가 공산화 후 상하이 시장이 된 왕다오한(汪道涵)이 계속해서 그를 끌어주었기 때문이다. 또 80년대 겨울을 보내기 위해 상하이를 방문하던 덩샤오핑이나 천윈 등에게 계속해서 장쩌민을 소개해 그가 눈도장을 받도록 했다. 그는 1989년 6월 수렴청정을 펴던 덩샤오핑, 천윈(陳雲), 리셴녠(李先念) 등 세 원로의 후원으로 경쟁자들을 밀치고 앞으로 치달은 후 후야오방이나 자오쯔양 등 전임자들이 걸었던 실책을 피하고, 덩샤오핑의 노쇠로 인한 정치적 기운이 넘어오던 기운을 움켜쥔 것이다. 이제 중국 정치의 가장 지대한 관심은 장쩌민의 시대가 얼마나 지속될 수 있는 건가하는 것이다.

친위세력 포진시켜 세 장악

97년 차오스(喬石)가 보수파를 배후로 베이따이허 회의에서 반란을 꾀했다가 역풍을 맞았다는 설도 있는 등 반란의 기운도 있었고, 2002년 11월 열린 16기 1중전회를 앞두고는 다양한 이야기가 오갔다. 가장 논란이 된 것은 과연 그가 권력을 후진타오 등 4세대에게 넘기는가 하는 것이었다.

21세기에 들어서 중국은 물론이고 세계 언론의 가장 큰 관심은 2002년 11월에 있는 16기 1중전회였다. 그리고 그 결과는 좀 더 확실한 장쩌민 시대의 개막이다. 이 회의 결과 나타난 가장 뚜렷한 인사는 동반퇴진을 말하면서 고희(古稀)를 넘긴 정치인들이 퇴장한 것이다. 톈안먼 비극의 발원지였지만 건재했던 리펑(李鵬) 전인대(全人大) 상무위원장을 비롯해 주룽지(朱鎔基) 국무원 총리, 리루이환(李瑞環) 정협(政協) 주석, 웨이젠싱(尉健行) 당기율검사위 서기, 리란칭(李嵐淸) 부총리 등이 중앙정치국위원에서 물러났다. 물론 장쩌민 주석도 물러났다. 하지만 장은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것으로 풀이되는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을 갖는 한편 후진타오를 비롯해 7명에서 9명으로 늘어난 상무위원의 대다수를 자신의 세력으로 채우는 데 성공했다.

장쩌민의 실질적인 후원을 받은 인물은 주석직을 받은 후진타오를 비롯해 우방궈, 자칭린, 쩡칭홍, 황쥐, 뤄간 등 6명이다.

우방궈는 1941년 7월 안후이성 페이둥(肥東) 출생으로 49세에 주룽지를 이어 상하이를 책임졌다. 하지만 그의 행정적인 능력은 떨어지는 편이고, 이 때문에 베이징에 올 때 베이징의 토착세력인 천시퉁 등에게 멸시를 받았지만 장쩌민의 후원하에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자칭린(賈慶林)은 1940년 3월 허베이성 포토우(泊頭) 출생이다. 그는 제1기계 공업부에서 장쩌민을 만나 인연을 쌓았고, 1978년, 38세로 부부장급이 되어, 52세로 청국(廳局)장급이었던 장쩌민보다 직급이 높게 됐다. 하지만 자칭린은 오히려 이전보다더 장쩌민을 더 존중했고, 장쩌민은 1995년 천시퉁이 잃어버린 베이징의 실권을 자칭린에게 넘겨주었다. 이런 인연은 1985년 그의 아내 린여우팡(林幼芳)이 거대한 부패사건과 연루되어 위기에 빠졌을 때 구해주는 한편 2002년에는 중국 정치의 최고봉인 중앙위 상무위원까지 오르는 영예를 안겨줬다.

1939년 지앙시성 지안(集安) 태생인 쩡칭홍(曾慶紅)은 누구나가 공인하는 장쩌민 맨의 선두다. 혁명 1세대로 공산당 원로인 쩡산(曾山)의 아들인 그는 후야오방에게 인정받아 태자당(太子黨)으로 불리는 집단의 한 주자가 됐다. 그는 특히 장쩌민을 이끌었던 왕다오한 등과 연을 가졌고, 자연스럽게 장쩌민과 같은 길을 걷게 됐다. 이후 1989년 장쩌민이 베이징으로 올라올 때 동행한 유일한 인물이다. 이후 중앙 인사권을 장악하면서 ‘상하이방’을 중앙에 심고, 세력을 넓히는데 큰 공헌을 했다.

상하이방이라는 말이 나올 때 가장 빈번하게 등장했던 황쥐는 1938년 9월 저지앙 지아샨(嘉善) 태생이다. 칭화대학을 졸업한 후 상하이에 머물다가 장쩌민과 인연이 됐다. 장쩌민의 사람이 된 이상 그 전임자인 주룽지나 우방궈의 뒤를 이어 중앙으로 진출했고, 상무위원까지 올랐다.

1935년 7월 산둥성 지난 태생인 뤄간(羅幹)은 장쩌민이 실권을 잡기전 직접적 인연이 없었지만 제1기계공업부 출신이라는 동질성으로 ‘라오링다오’(老領導 오래된 상급자)라고 불러서 마음을 얻었고, 특히 리펑에게 업무 능력을 인정받았다는 점도 상무위원 발탁의 배경이다.

장쩌민 계열이 아닌 인물로는 원자바오(溫家寶), 우관딩, 리창춘 정도. 하지만 이들 역시 장쩌민과 큰 마찰이 없었던 인물들이다.

주룽지의 뒤를 이어 총리를 맡을 가능성이 높은 원자바오는 후진타오와 같은 1942년 출생했다. 정협주석 리루이환과 같은 톈진 태생인 그는 문화혁명 당시 깐수성으로 갔고, 거기에서 원로 쑹핑에게 발탁되었고, 업무 능력을 인정받았다.

1938년 8월 지앙시 위간(余幹) 태생인 우관딩(吳官正)은 후진타오와 칭화대 동기다. 그는 드물게 청백리로 인정받았던 인물로 소금과 같은 역할을 하기 위한 인물이다. 때문에 2002년 11월 16기 1중전회에서 당의 규율을 관리하는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서기에 선임됐다.

1944년 2월 태생인 리창춘(李長春)은 랴어닝 따리엔 출신으로 하얼빈 공대에서 공부했다. 문혁이 시작된 1966년에는 대학을 마쳤고, 이후 관리로 승진을 거듭해 42세이라는 초유의 나이에 랴오닝성장이 되었고, 1990년에는 허난성 성장으로 전임했다. 1997년에는 급속한 발전으로 지나치게 비대해져 부패가 만연하다는 평가를 받는 광둥성으로 당서기로 전임했고, 2002년 11월에는 상무위원에 오르게 됐다.

이로써 장쩌민은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이 누리던 중국의 실권을 장악하는 세 번째 인물이 됐다. 설사 장쩌민이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을 다른 사람에 넘긴다고 해도, 이런 상황을 부정하는 인물은 없다. 2002년 11월 16기 1중전회를 통해 형성된 구조를 놓고 다양한 말이 오가는 것에 대해 기자가 아는 중국 연구가는 부정적인 시각으로만 보지 말라고 강조했다.

사실 감독인 장쩌민이 후진타오를 투수에 기용하고, 원자바오를 포수에, 쩡칭홍을 유격수에 기용한다는 것일 뿐 옳고 그름의 의미를 둘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이제 확실한 것은 장쩌민이 팀의 성적을 책임지는 감독으로 완전히 굳어진 이상 그 팀의 성적에 관해서도 책임을 져야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감독대행 시절 유능했던 투수역할을 했던 주룽지나 리루이환, 리란칭 등을 퇴진시킨 이상 그 책임도 장쩌민에게 있기 때문이다. 전임자인 마오쩌둥이 (외세에) 맞는 문제를 해결했고, 덩샤오핑이 굶는 문제를 해결하는 등의 성적을 낸 이상 그 역시 중국 역사에 무엇인가를 남기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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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케이아이테크놀로지 상무. 저서 <삶이 고달프면 헤세를 만나라>, <신중년이 온다>, <노마드 라이프>, <달콤한 중국> 등 17권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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